소설리스트

학사신공-1229화 (986/2,000)
  • 1229화. 열반주(涅槃珠)

    *

    거검에서 초승달 모양의 검빛이 쏘아져 나갔다.

    공간파동이 일고 검은 실들이 빼곡하게 나타나 백척을 덮쳤고, 백포 노인 허상 위에는 마기가 응결해 만들어진 새까만 거대 손이 흉흉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원염 성조가 기습할 거라 예상치 못한 백척은 안색이 급변해 하얀 기운으로 몸을 보호하고 입에서 어두운 녹색 방패를 분출했다. 방패는 그의 입을 떠나자마자 거대해졌고 표면에 거북 허상이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백척의 본체가 진동하자 은색의 거대 종이 그의 몸을 빠져나왔다. 거대 종은 수많은 은색 주술문자로 반짝였다.

    댕!

    종소리가 허공에 파문을 남기며 퍼져나갔다. 목숨이 경각이 달린 백척이 자신의 본명 기물을 불러낸 것이다.

    그는 한립이 흑마비의 공격에서 목숨을 건졌다면 다른 합체기 수사도 분명 가능할 거라 여겼다.

    이때 화염을 품은 검은 실들이 들이닥쳤고 은색 파문도, 거대 거북 허상도 검은 실과 닿는 순간 종잇장처럼 뚫려 나갔다.

    쩌정!

    몸을 바르르 떨며 사라진 검은 실들은 다음 순간 은색 종에 검은 실금이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백척은 경악했지만 손을 쓸 새도 없이 거대 은색 종과 함께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잘려 죽임을 당했다.

    대승기 수사의 혼백을 지닌 백포 노인 허상도 법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검은 손에 잡혀 없어진 후였다.

    흑포 청년은 무표정하게 백척의 시체를 훑고는 검은 기운을 날려 여러 저물환을 끌어왔다. 의식으로 저물 법기들을 살핀 원염 성조의 표정이 어두웠다.

    “경계심 많은 늙은이답게 역시 운계석을 이 녀석에게 맡기지 않았구나.”

    그의 눈길이 곧장 한립 등 남은 세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너희 중에 누가 운계석을 숨기고 있느냐! 얌전히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흑포 청년의 말에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선배님 무언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영족 수사들도 지니고 있지 않은 물건을 어찌 저희에게 찾으십니까?”

    한립이 한숨을 내쉬며 차분히 답했다.

    “그렇다면 너희를 살려두어 어디에 쓸데가 있겠느냐.”

    한립의 말에 원염 성조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그는 검은 거검을 횡으로 그어 새까만 검빛을 고공으로 날려 보냈다.

    “이런, 막아야 합니다! 금제를 깨서 마기를 골짜기 내부로 불러들이려는 속셈입니다!”

    그것을 본 농 가 노조가 주저하지 않고 금색 표창 세 개를 날려 보냈고, 정체 모를 금색 표창들은 괴이하게 공간을 넘어 새까만 검빛 앞에 나타났다.

    콰쾅!

    새까만 검빛은 잠시 주춤하다 금색 빛줄기 세 개를 손쉽게 잘라냈고, 세 개의 표창은 여섯 조각으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 오색 기운을 품은 새빨간 구슬이 번득 달려들어 새까만 검빛과 충돌했다. 깃털 옷 소녀가 아끼고 아끼던 보물을 발동한 것이다.

    새빨간 구슬은 쿵! 하고 터져 주변을 붉은 불구름으로 뒤덮었다. 불구름은 평범한 뇌화와 달리 화염 속에 금색과 은색 실이 있어서 엄청난 열기로 주변을 뿌옇게 변화시켰다. 이에 이제껏 고요하던 연못이 보글보글 거렸다.

    “열반주(涅槃珠)!”

    한립의 표정에 놀란 기색이 느껴졌다. 열반주는 영계에서 명성이 대단한 보물이었다.

    평범한 뇌화주와 달리 특수한 비술로 진혈 일부를 연화해 열반화(涅槃火)를 응결하는 보물이라 체내에 진혈을 지닌 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혈맥 속의 진혈을 대가로 하는 열반화의 위력이 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립은 열반주를 처음 보았지만 평범한 합체 후기 수사는 결코 열반화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마 엽 수사의 필살기 중 하나일 텐데 흑마비가 방출한 검빛에 통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한립은 재빨리 생각을 마치고 두 손에서 극산을 발동했다. 그러자 거원의 몸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금색 뇌전들이 튀어나와 방대한 육체를 뒤덮었다.

    금색 뇌전들 때문에 거원의 형상이 모호하게 보였다. 열반주를 알아본 흑포 청년의 표정도 미미하게 달라졌고 손바닥을 통해 새까만 거검에 조용히 검은 기운을 불어넣었다.

    고공에서 검이 공명했다.

    쿵!

    새빨간 불구름을 뚫고 새까만 검빛이 날아올라 녹색 빛의 장막으로 쇄도했다. 검빛은 처음보다 가느다랗게 변해 있었지만 함유한 힘은 이전보다 강했다.

    바로 그때 녹색 빛의 장막 아래에 파문이 일고 뇌전에 휩싸인 금털 거원이 나타나 두 극산을 투척했다.

    산악거원의 변신술에 합체 후기 수행이 더해져 두 극산은 폭음과 함께 푸른색과 검은색 빛구슬로 변해 뻗어 나갔다.

    극산들이 지나는 곳에 하얀 흔적이 남아 마치 허공을 찢으며 날아가는 듯했다. 멀리서 흑포 청년의 표정이 달라졌다. 새까만 검빛이 빛구슬과 연달아 충돌해 두 번의 폭음이 터져 나왔다!

    검빛은 두 극산의 막대한 힘에 휘어지다 결국에는 갈라져 검은빛으로 흩어졌다.

    휘웅!

    방해물이 사라지자 두 극산은 그대로 흑포 청년에게로 향했다.

    “그 패도적인 연체술은 성계의 진마공과 연관이 있구나. 허나 그걸로 나를 상대하려 한다면 헛수고일 것이다.”

    흑포 청년이 입가를 꿈틀하며 고공을 향해 주먹질을 했다. 소리 없이 새까만 주먹 허상 두 개가 튀어나가 극산들과 맞부딪쳤다.

    콰릉! 쾅!

    기세등등하던 극산들이 갑자기 멈추었다가 반대로 한립을 향해 튕겨나왔다. 한립은 기겁하며 거원의 두 팔에 힘을 실어 날아드는 극산들을 받아내려 했다.

    콰르릉!

    극산과 손이 닿는 순간 거원은 신음을 흘리며 열 발자국 이상 뒤로 물러났다.

    ‘삼대 시조 중 하나라더니 평범한 대승기 수사에 비할 바가 아니군. 본연의 육체마저 이렇게 강력하다니!’

    이때 양쪽에서 엽 수사와 농 가 노조가 나타났다. 원염 성조에게 각개격파를 당할까 한 곳에 모여든 것이다.

    그들은 한립만이 상대를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은 거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흑포 소년이 같잖다는 얼굴로 두 주먹을 거두고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백척의 시체 속에서 하얀 빛이 솟아올라 원염 시조 곁의 위선뢰에게로 향한 것이다.

    “……!”

    이에 원염 성조가 움찔하며 번개처럼 손을 뻗었지만 늦고 말았다.

    파앗!

    하얀 기운이 실처럼 위선뢰를 파고들었다. 원염 성조가 분노하며 방향을 틀어 위선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위선뢰에서 음산한 한기가 떠올라 흑포 청년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몸을 꼿꼿이 세운 위선뢰는 이전과 달리 금빛 눈으로 흑포 청년을 바라보았다.

    “감히 내게 손을 쓰다니 어쩔 수 없이 본 영왕이 위선뢰를 빌려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영왕의 의식이 깃들어 위선뢰를 조종하는 듯했다. 그 모습에 한립과 농 가 노조, 엽 수사는 반색했다. 영왕 분신이 그들과 함께하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흑포 청년이 천천히 손을 거두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영족 녀석의 몸에 또 다른 혼백을 숨겨 놓았을 줄은 몰랐습니다. 허나 겨우 졸렬한 위선뢰의 몸을 빌려 본 성조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본 좌가 2성의 법력만 사용해도 수사를 압도할 수 있을 텐데요.”

    “다른 곳에서라면 그랬겠지만, 어차피 고령도에서는 법력의 3, 4할 밖에 못 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위선뢰가 조금 부족하기는 해도 이게 있으면 수사를 상대할 만할 겁니다.”

    노기를 드러낸 영왕은 손바닥을 펼쳐 은색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표면에 울퉁불퉁한 은색 병에는 개미처럼 작은 문자들이 새겨져 반짝였다.

    “고령병(錮靈甁)! 그 모조품으로 날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이 병만으로는 물론 도움이 안 되겠지만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가 문제겠지요.”

    위선뢰가 무표정하게 답하고 병을 던졌다. 그러자 휙! 하고 날아가 뒤집힌 병에서 녹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천지영기를 응결해 놓은 듯 굉장히 청량한 기운을 머금은 액체였다.

    멀리서 작은 병을 본 한립은 녹색 액체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끼고 심장이 요동쳤다.

    “이 기운은! 아주 희미하기는 해도 틀림없이 그것과…….”

    흑포 청년도 녹색 액체를 보는 순간 안색이 달라져 들고 있던 거검을 휘둘러 초승달 모양의 검빛을 8개나 방출했다. 검빛이 중간에서 하나로 뭉쳐 위선뢰를 갈랐다.

    또 다른 손에서는 검은빛이 쏘아져 나가 떨어져 내리는 녹색 액체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위선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검빛을 피하지 않고 검은빛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쉭!

    놀랍게도 위선뢰의 손가락 중 하나가 뽑혀나가 그대로 검은빛과 충돌했다.

    그 여파로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빛 속에 아주 작은 검은 송곳이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실낱같은 검은 기운을 풀풀 풍기는 것이 보통 보물이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녹색 액체는 수직으로 떨어져 위선뢰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거대 검빛이 지척에 도달해 위선뢰를 덮쳤다. 흑마비가 펼친 강력한 신통에 검은빛으로 뒤덮인 위선뢰가 당장이라도 산사조각 날 듯했다.

    하지만 검은빛 속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리고 두 개의 녹색 거대 손이 뻗어나와 검빛을 막아냈다. 검빛이 두 손을 마구 가르는데도 녹색빛만 반짝일 뿐 아무런 손상을 입힐 수 없었다.

    검은 송곳도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공격에 합류했지만 날카로운 충돌 소리만 울리고 튕겨나와야 했다. 녹색 거대 손들에는 작은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이에 원염 성조가 난색을 표하며 뜻밖에도 거검을 내리고 상대를 냉랭히 쳐다보았다.

    검빛을 두 손으로 조각낸 비취색 위선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위선뢰는 아까와 달리 표면의 은색 문양이 암녹색으로 물들어 피부를 타고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녹색 손을 회수한 괴뢰가 흑포 청년과 눈을 마주쳤다.

    “참천조화로(參天造化露)를 겨우 위선뢰에게 쓰다니 아깝지도 않습니까!”

    원염 성조가 흥분해 소리쳤다.

    “진짜 참천조화로였으면 진작 참천조화단(參天造化丹)을 만들었을 겁니다. 진정한 참천조화로를 열 배로 희석해 훨씬 묽은 위선로(僞仙露)가 딱 위선뢰에 걸맞았습니다.”

    위선뢰가 서늘하게 답했다.

    “희석을 한다고 선령의 기운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닐 테니 선원정을 대신해 위선뢰의 기운을 촉발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저 위선뢰가 선령의 기운을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몇 번이요? 지금의 상태로 노부의 일격을 막는다면 마계 시조라는 명성에 걸맞다 인정하겠습니다.”

    위선뢰는 허공을 박차고 녹색 빛으로 변해 달려들었다. 상대의 말뜻을 곱씹던 원염성조가 그것을 보고 포효를 터트렸다. 그의 등 뒤로 산만한 거대 마영(魔影)이 떠올랐다.

    두꺼비처럼 생긴 검은 그림자는 중간의 머리 양쪽으로 네 개씩 작은 머리가 달려 있었다. 마계에서 전설로나 전해지는 구두마섬(九頭魔蟾)이었다!

    구두마섬은 즉시 커다란 입을 벌려 금빛을 날려 보냈다.

    콰쾅!

    금빛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쇄도하던 위선뢰가 그것과 충돌해 더 빠른 속도로 뒤로 튕겨나갔다. 흑포 청년은 서늘한 미소를 짓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거대 두꺼비의 입에서 분출된 금빛 그림자가 미친 듯이 움직여 금색 잔영으로 연못 위에 커다란 그물을 만들어냈다. 그물에 갇힌 위선뢰는 그물에 닿을 때마다 사방팔방으로 장난감처럼 펑펑 튕겨나가야 했다.

    그것을 본 흑포 청년이 수결의 모양을 바꾸자 금빛이 수축해 위선뢰를 끌어당겼다.

    위선뢰가 힘없이 흑포 청년 앞에 끌려오자 금빛의 정체가 거대 두꺼비의 기다란 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대 두꺼비의 혀는 살점이 주술문자 모양을 이루고 있어 반짝이는 법기 같아 보였다.

    “으하하, 뻔뻔스럽게 허풍을 떤 것이었습니까? 이렇다 할 신통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펼쳐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원염 성조가 웃음을 터트리며 금색 거대 혀를 끌어당기자 위선뢰의 몸에서 뭔가 우두둑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두마섬의 혀로 위선뢰를 짓눌러 터트려 버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위선뢰는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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