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8화. 영왕(靈王)과 운계석(隕界石)
*
한립이 아낌없이 법력을 쏟아부어 자언정은 평소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고 보라색 주술문자 허상은 웅! 울어대며 실체화되었다.
다행히 검은 실은 흑포 청년이 대충 날린 일격이란 진정한 현천의 보물을 이용한 공격이었음에도 팔뚝 깊이만큼 파고들더니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것을 본 흑포 청년의 눈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검은 칼날을 쥔 손에 까만빛이 번득였고 거대 보라색 주술문자가 날카롭게 울기 시작했다. 이에 검은 실들의 위력이 배로 늘어나 보라색 허상이 버티지 못하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실들은 한립을 향해 쾌속으로 접근해왔다. 안색이 급변한 한립이 재빨리 법결을 연화시켜 자언정의 다른 신통을 사용하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챙강!
파앗!
한립이 동공을 수축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신에서 검은 기운을 꿀렁꿀렁 일으켰다. 검은 기운들이 수많은 주술문자로 응결해 그의 몸에 꼭 맞는 새까만 갑옷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색 법상이 솟구쳐 여섯 개의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쏘아져 나온 금색 화염들이 뭉쳐져 그의 앞에 거대한 금색 소용들이를 만들어냈다.
콰릉!
거세게 회전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금색 주술문자들이 쏟아져 나와 엄청난 괴력으로 검은 실들을 빨아들였다.
금색 기운이 흐르는 삼두육비 법상 본체는 흐릿한 금색 갑옷을 입고 한립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금신은 여섯 개의 팔을 사정없이 휘둘러 주먹 허상들을 사방팔방으로 날려 보냈다.
한립은 허공을 박차고 뒤로 물러나며 풍뢰시에서 뇌전을 응결해 무수히 많은 금색 뇌전 구슬로 뒤쪽에서 쇄도하는 검은 실들을 상대했다.
그뿐만 아니라 72자루의 비검들도 튀어나가 수천 개의 푸른 검빛으로 늘어나 흐릿하게 거산의 모습으로 변해 검은 실들을 갈랐다.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고 검은 실들 사이에서 푸른색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엄청난 파동이 일었다.
허공의 금색 뇌전구슬도 푸른 태양 속으로 날아들어 천둥소리와 검기가 울어대는 소리가 합쳐졌다.
요란하게 빛나는 푸른 태양을 보고 흑포 청년의 얼굴에 당혹스런 기색이 스쳤다.
“갑시다!”
이때 농 가 노조가 엽 수사와 백척에게 전음을 보내고 몸을 날려 금빛으로 쏘아져나갔다.
농 가 노조가 다른 두 명에게 신호를 보낸 것은 결코 선의(善意)를 품어서가 아니었다. 세 명이 달아나야 흑포 청년의 주의력이 분산되고 살아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엽 수사는 전음을 듣자마자 등 뒤의 오색 화염 날개를 맹렬히 펄럭여 오색 허상으로 변해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백척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멍하니 서있었다.
농 가 노조는 그런 백척의 모습이 무척 의심스러웠지만 더욱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고공의 녹색 빛의 장막까지 솟아올랐다.
엽 수사도 동시에 산골짜기 외곽에 이르러 날개를 펼치고 신형이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다. 공간 신통을 이용해 빛의 장막 밖으로 순간이동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흑포 청년은 달아나는 두 둔광을 보면서도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입가에 비웃음만 걸려 있었다.
퍽!
농 가 노조의 둔광이 녹색 빛의 장막에 부딪힌 순간 휘청이며 튕겨져 나왔다. 그들을 그냥 들여보내 주었던 녹색 장막이 이제는 철벽처럼 단단하게 변한 것이다.
이에 농 가 노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다른 때였으면 금제가 아무리 단단해도 파훼할 수법이 한두 가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엽 수사의 상황도 비슷했다. 당혹스런 얼굴로 여러 공간신통을 시도해 보았지만 빛의 장막을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 연못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셔 있었다.
크아앙!
돌연 연못 위에서 원숭이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인근의 눈부신 빛이 모조리 사라지고 두 번의 폭음과 함께 두 개의 돌풍과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그곳을 빠져나와 고공에서 멈춰 섰다.
새까만 갑옷을 입은 금털의 거대 원숭이가 두 손에 푸른색과 검은색 산봉우리를 들고 서있었다.
위기의 순간 금색 거원으로 변한 한립은 벽사신뢰와 범성진신의 엄호를 받으며 두 개의 극산의 힘을 빌려 간신히 검은 실들을 뚫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비록 검은 갑옷에 무수히 많은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지만 서서히 아무는 중이었다. 다행히 두 번이나 체내의 진정한 현천의 보물을 사용해 본 적이 있었기에 상대의 공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같은 신통을 지녔어도 당황한 나머지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검은 실의 위력과 단단함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으하하, 재미있구나! 본 노조가 여기까지 헛걸음한 것은 아니었어. 위선뢰에 진령혈맥을 저런 경지까지 발휘하는 인족 수사라! 녀석아, 네 몸에 진령혈맥이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어디 전력을 다해 가진 실력을 다 보여 보거라.
다음 번 공격에는 흑마비에 5할의 위력을 실을 테니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죽은 목숨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 두 녀석도 이곳에서 달아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이 섬의 이름은 고령도(苦靈島)로 산골짜기는 곤령곡(困靈谷)이라 불린다! 영계 것들이 이 안에 들어오면 달아날 길이 없다는 소리지!”
흑포 청년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농 형, 엽 선자. 이제 아셨으면 다른 생각은 버리고 저와 힘을 합쳐 싸워야 살길이 열릴 것입니다. 백 수사께서도 무슨 계획인지 모르겠으나 협조하시지요. 홀로 살아나갈 방법이 있다고 보십니까?”
금털 원숭이가 얼굴을 굳히고 소리쳤다.
한립의 말에 농 가 노조는 어두운 얼굴로 되돌아왔고, 엽 수사도 화염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한립 옆에 파문이 일고 그녀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러나 백척은 힐끗 한립을 보았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제 목숨은 한 형에게 달린 거나 다름없군요. 부디 저 마족 성조를 상대할 비책이 있기를 바랍니다.”
엽 수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비책이라면 두 분도 아직 남겨 놓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또 아직 눈치채지 못하셨겠지만 마족 성조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흑마비 외에 다른 마공 신통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립이 변한 거원(巨猿)은 흑포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소리쳤다.
“그 말씀은…….”
“세령지가 있는 계곡이 영기를 가둬 둔다면 마계에서 영기가 가장 짙은 곳 중 하나일 겁니다. 우리에게는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겠지만 마족 성조라면 천지영기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요.”
“한 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노부의 예상이 맞다면 저 노마는 이곳에서 마기를 보충할 수 없을 테고 법력 소모도 클 테지요. 들고 있는 현천의 보물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농 가 노조도 한립의 본뜻을 알아채고 어두운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이때 멀리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흑포 청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하, 단시간에 그걸 다 파악하고 머리가 나쁜 녀석들은 아니구나! 본 좌는 고령도에서 수행의 제약을 받아 몇몇 신통과 보물들은 펼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허나 그렇다고 대적할 만하다는 헛생각을 하다니 현천의 보물을 뭘로 보는 것이더냐?
그리고 거기 영족 녀석은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 이제껏 건들지 않았건만 아직까지 나서지 않고 뭐하는 것이지? 영왕이 너를 이곳에 보낸 의도가 무엇인지 고하거라. 설마 위선뢰를 갖다 바치려고 온 것은 아닐 테고 말이야.”
흑포 청년은 백척을 향해 냉랭한 눈길을 보냈다. 하얀빛에 가려져 백척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흑포 청년의 물음에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는 대인의 명을 받아 이것에 온 것이 맞습니다. 체내에 분령부(分靈符)가 심어져 있는데 선배님께서 직접 대인과 말씀을 나눠보시겠습니까?”
그의 몸에서 하얀빛이 가시고 갑자기 비단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나타났다. 눈동자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중년인의 미간에는 희미하게 보라색 반점이 찍혀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비단 장포는 은색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고 움직일 때마다 하얀빛을 터트려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흥, 그 늙은이라면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들어나 보자꾸나.”
흑포 청년은 놀라는 기색 없이 코웃음을 쳤다.
파앗!
백척이 미소를 머금고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쳐 은색 부적을 불러냈다. 부적은 바람을 타고 떠올라 혈색 좋은 백포 노인의 허상으로 변했다.
한립은 안력을 돋우어 그들의 행동을 주시했고 농 가 노조와 엽 수사도 시선을 교환하고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노인 허상은 표표히 날아올라 흑포 청년과 마주 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원염 수사. 이곳에서 3대 시조 중 한 명인 수사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원래 이곳을 담당하던 멸정과 무상 수사는 어디에 계십니까?”
백포 노인 허상은 누군가의 혼백 한 줄기를 품고 있는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청년에게 포권을 했다. 영족 대승기 수사는 원염 성조와 아는 사이 같았다.
한립과 농가 노조 그리고 엽 수사는 시조라는 두 글자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멸정, 무상 수사는 다른 일이 있어 근 천 년간 이 섬은 본 좌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영왕이 후배들을 이곳까지 보낸 것은 두 영물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해서입니까? 겨우 합체기 수사들이 와봤자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아실 텐데요. 영왕 대인이 친히 나선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마족들이 영족의 땅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지만 않아도 노부가 직접 갔을 겁니다. 노부도 그간 원염 수사의 몽염마공(夢魘魔功)에 어떤 진척이 있나 궁금하군요. 허나 지금은 시간이 없어 후배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백척을 제외하고 다른 아이들은 벌써 화를 당한 듯한데 너무 조급히 손을 쓰신 것이 아닌지요?”
“그나마 수사의 체면을 보아 한 명이라도 남겨둔 것입니다. 허나 계속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으면 제가 어떻게 나와도 탓하지 마십시오.”
“하아, 원염 수사의 성격은 수만 년이 지나도 그대로십니다. 좋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한 가지 물건을 이용해 정령련과 본 족 아이가 세령지에 들어갈 기회를 교환하고자 합니다. 원래는 멸정, 무상 수사에게 제안하려던 거래인데 수사께 기회가 돌아갈 줄은 몰랐습니다!”
영왕 허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습니까? 멸정과 무상이 여기에 있었다 해도 영계인과 그런 거래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제 볼일이 끝난 것 같으니 저 영족 녀석을 죽이겠습니다. 영왕의 분혼은 제가 잘 쓰지요.”
흑포 청년은 전혀 믿지 않는 얼굴로 거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 모습에 농 가 노조와 엽 수사가 급히 체내의 법력을 끌어올렸고, 한립이 변한 거대 원숭이는 온몸에서 금빛을 발산했다.
“원염 수사, 설마 운계석(隕界石)에도 관심이 없단 말입니까?”
“운계석을 갖고 있다고요? 그럴 리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허허, 노부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계의 다른 대승기 수사들보다 몇 배를 더 살아왔는데 당연한 일이지요. 이게 있으면 마족에 닥친 대겁(大劫)을 만년은 지연시킬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요.”
“예전에도 영왕이 평범한 영계 출신은 아닐 거라 짐작했지만 성계의 비사(祕史)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제 짐작이 맞았나 봅니다. 안타까운 것은…….”
“설마 운계석이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까? 마계에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정녕 모르십니까?”
노인은 흑포 청년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안타까운 것은 수사가 오늘 만난 사람이 나라는 사실입니다!”
흑포 청년은 돌연 검은 거검으로 백척을 가르고 다른 거대 손으로 백포 노인을 공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