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227화 (984/2,000)
  • 1227화. 검은 비수

    *

    지수는 천추 성녀의 변신에 무언가를 감지한 듯 전신의 은색 문양을 번뜩이고 마염을 향해 훅! 하고 입김을 불었다. 허공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청년의 입에서 강력한 은색 음파가 분출되어 마염을 흩어버렸다.

    은색 문양들이 조금 어둑해 지기는 했지만 청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엇, 위선뢰(僞仙儡)였어? 아니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약한데?”

    놀라워하던 흑포 청년은 서늘하게 웃고 손가락으로 허공을 찔렀다. 그의 말대로라면 영족 청년 ‘지수’는 한 마리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츠츳!

    흑포 청년의 손끝에서 나온 검은 빛이 새까만 바늘로 응결해 소리 없이 허공을 갈랐다. 이에 지수의 몸에서 은색 문양들이 피부를 벗어나 불가사의한 속도로 방패를 만들어 앞을 가렸다.

    쾅!

    그러나 은색 방패에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생겨났다.

    지수는 우두커지 서있었지만 몸 안에서 폭음이 울리고 회백색 기운이 새어나와 십여 개의 회백색 촉수로 변했다. 촉수들은 주변을 맹렬히 후려치며 난동을 부리는데 희미하게 분노에 찬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흑포 청년이 그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수의 발작을 이미 예상한 듯 했다. 순식간에 촉수들이 허물어져 사라지고 은색 방패도 사라졌다.

    털썩!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진 영족 청년의 이마에는 방패와 똑같이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흑포 청년이 쏘아 보낸 검은 바늘이 은색 방패와 지수의 머리를 관통한 것이다.

    그런데 괴이한 일은 지수의 상처부위에서 피가 아니라 회백색 음기가 끈적끈적한 액체처럼 새어나오고 있었다.

    “선원정(仙元晶)이 아니라 천외마두의 마혼(魔魂)으로 위선뢰를 조종했구나. 흥미롭기는 한데 이렇게 조잡해서야 원래의 위력을 낼 리 없지. 이 마혼은 네가 집어넣은 것이더냐?”

    흑포 청년이 혼자 중얼거리다 천추 성녀를 향해 냉랭히 물었다.

    퍽!

    “……!”

    그러나 천추 성녀는 지수가 땅에 쓰러진 순간 얼굴이 사색이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바닥을 구르며 기운이 약해졌다 강해졌다 반복하며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고 금색 문양도 곧 사라질 듯 희미해졌다.

    “반뢰(半儡)의 몸!”

    흑포 청년이 손뼉을 짝! 치고는 한결 상쾌한 기분으로 소리쳤다.

    “어쩐지 겨우 합체기 이종족이 위선뢰를 조종한다 했다. 자신의 몸을 반뢰로 제련해 위선뢰를 조종하다 반서를 당한 것이겠지! 으하하, 위선뢰를 가져다 바친 공을 생각해 네 목숨을 친히 거둬 주마.”

    흑포 청년은 광소를 터트리며 허공을 수직으로 그었다.

    파앗!

    공간파동 속에 검은 비수가 떠올라 무시무시한 영기의 압력을 선보였다.

    비수가 번득 사라졌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자 바닥을 구르던 천추 성녀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보호막과 방어 보물들이 무색하게 그녀의 몸은 몰론 원신까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화륵!

    두 동강난 시체가 마염 속에서 활활 타올라 연기로 변하고 손바닥 크기의 고대 거울만이 덩그러니 바닥을 뒹굴었다.

    보라색의 이름 모를 금속이 박힌 타원형의 거울 뒷면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앞면은 회색 기운이 가득해 아무 것도 비추지 않았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몸을 반뢰로 제련했나 했더니 본체가 원래 보물이었구나. 최근 제련 중인 진법을 보조할 보물이 부족했는데 잘 되었어.”

    흑포 청년은 웃음을 터트리고 손을 뻗었다. 의식을 잃은 ‘지수’와 천추 성녀의 본체인 회색 고대 거울이 쉭! 하고 그의 앞으로 끌려왔다.

    흑포 청년은 흥미로운 눈길로 그것을 훑다 힐끗 거대 손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농 가 노조 등 다른 수사들을 보고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 비수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자 늙은 유생 장형과 휘 장로가 비명을 질렀다. 둘의 몸은 괴이하게 절반으로 갈라져 검은 화염에 휩싸였다.

    남은 농 가 노조와 엽 수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현천의 보물…….”

    농 가 노조는 이를 갈았다. 현천의 보물이 아닌 다음에야 마족 성조라 해도 한 호흡 만에 합체기 수사 여럿을 요절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상대가 아무리 마족성조라도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고 그들을 파리 죽이듯 죽일 줄은 몰랐다.

    농 가 노조와 엽 수사는 울분이 차올랐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겨둔 비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쩍!

    농 가 노조가 힘껏 기합을 넣자 뒤통수가 열리고 금빛이 쏟아졌다. 그 안에서 놀랍게도 금빛 찬란한 오조(五爪) 진룡이 날아올랐다.

    처음에는 손가락 만하던 진룡이 즉시 언덕 만하게 커져 흑포 청년을 향해 포효했다.

    엽 수사는 혀를 깨물어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핏방울들이 바람을 타고 흩어져 그녀가 입고 있던 오색 깃털 옷으로 스며들었다.

    봉황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오색 기운을 터트린 옷이 아름다운 갑옷으로 변해 그녀의 온몸을 완전히 가렸다. 엽 수사의 아름다운 얼굴도 오색의 가면으로 덮여 눈만 보였다.

    오직 백척만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거대 손의 압력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농 가 노조의 금룡이나 엽 수사의 갑옷이나 검은 거대 손의 기이한 압력 속에서 발동이 된 것을 보면 보통의 보물보다 현묘한 위력을 지녔을 것이다.

    전신에서 금빛을 반짝인 금룡은 입에서 사발 굵기의 빛기둥을 분출해 거대 손을 공격했다. 금룡은 이 공격에 모든 힘을 다 쓴 것처럼 모호하게 변해 사라졌다.

    엽 수사의 갑옷도 기운을 흘려보내 허공에 거대한 검 허상을 만들어냈다. 검 허상이 오색의 비단천 같은 궤적을 남기고 거대 손을 갈랐다.

    쿠르르릉!

    거대 손이 극심하게 흔들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퍼지던 거대한 압력이 줄어들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농 가 노조와 엽 수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농 가 노조는 재빨리 금빛을 분출해 반룡화된 주먹으로 땅을 거세게 내리쳤다.

    콰쾅!

    땅이 흔들리고 거대 손의 구속에서 벗어난 농 가 노조는 화살처럼 튀어 올랐다. 허공에 멈춰선 그는 꼼짝하지 않고 흑포 청년을 주시했다.

    농 가 노조는 소매를 펄럭여 여덟 개의 각양각색의 보물을 불러내 자신의 주위를 맴돌게 했다. 그 중 작은 옥새와 금색 고리가 방출하는 기운에 주변의 천지원기가 희미하게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현천의 보물을 따라 만든 모조품이었다.

    그러나 엽 수사는 그와 상반된 선택을 했다.

    오색 갑옷에서 기운이 등으로 몰려들어 두 개의 거대한 날개가 튀어나왔다. 기다란 오색 깃털로 이뤄진 날개 끝에는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날개를 펄럭인 소녀는 화염을 폭발시켜 강력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허공이 무너질 듯 왜곡되고 그녀를 중심으로 하얀색 구멍이 뚫렸다. 엽 수사는 그 안으로 뛰어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고공에서 농 가 노조와 엽 수사의 행동을 지켜보던 흑포 청년이 화를 내기는커녕 얼굴이 밝아졌다.

    “겨우 너희의 수행에 성계 깊은 곳까지 침입했다 했더니 진령혈맥을 계승한 것들이었구나! 하하, 거기다 진룡과 천봉혈맥이라! 명성이 자자한 진령 혈맥이 제 발로 굴러 들어왔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근에 떠있던 검은 비수가 두 번 번득였다. 그 모습에 농 가 노조는 안색이 급변하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고 주변의 여러 보물들이 웅! 하고 진동하며 눈부신 빛을 뿜어 그를 가려주었다.

    채채채챙!

    보물들이 만들어낸 빛의 장막이 안으로 깊숙이 찌그러졌다. 무언가에 의해 호되게 찔린 듯했다.

    빛의 장막 속 여러 보물들이 차례로 터져나가고 모조품인 옥새와 금색 고리만이 남아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놀란 농 가 노조가 수결을 맺고 입에서 하얀 기운 두 덩이를 뿜어 보물에 흡수시킨 뒤에야 빛의 장막이 안정을 되찾았다.

    펑!

    하얀 공간균열이 나타났던 곳에서도 검은 빛이 번득이고 열댓 장 떨어진 허공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잠시 후 오색 화염에 휩싸인 날개달린 엽 수사가 허공에서 튕겨 나왔다.

    작은 체구의 소녀는 오색 갑옷을 입고 흑포 청년을 향해 겁에 질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한쪽 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검은 빛이 엽 수사의 공간 비술을 파고들어 팔을 잘라낸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팔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천추 성녀처럼 단번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엽 수사가 빠르게 농 가 노조와 백척의 표정을 살폈다.

    농 가 노조는 창백한 얼굴로 냉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이전과 달리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고 백척은 마치 저항하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멍하니 땅에 박혀 있었다.

    절망스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흑포 청년은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당황하며 검은 비수를 직접 들어올렸다.

    그 모습에 농 가 노조와 엽 수사가 난색을 표했다. 이번 공격에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다음 번 공격을 막아낼 가능성의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흑포 청년은 그들을 비웃으며 비수를 곧게 세웠다. 은색의 상고 문자가 떠오른 검은 비수에서 빛기둥이 솟아올라 맑은 하늘에 검은 구멍을 뚫었다.

    휘이잉!

    음산한 바람을 타고 마기가 쏘아져 내려와 백여 개의 머리통만한 검은 문자를 이루었다. 주술문자들은 빙글빙글 회전하며 떨어져 검은 비도로 흡수되었다.

    별안간 비검이 거검(巨劍)으로 변하고 흑포 청년은 냉랭히 농 가 노조와 엽 수사를 내려다보았다.

    “베어라!”

    거검은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검빛으로 변해 쇄도했다.

    ‘왜……?’

    ‘이게 무슨…….’

    그런데 법력을 잔뜩 끌어올리고 검빛을 쳐다보고 있던 농 가 노조와 엽 수사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검빛이 그들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검빛의 목표는 한립을 휘감은 검은 화염이었다. 마염에 휩싸여 쥐 죽은 듯 떠있던 그를 향해 흑포 청년이 불의의 공격을 가한 것이다.

    “기운을 숨긴다고 나를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보아하니 이 중에세 네 실력이 가장 뛰어난 듯한데 제일 먼저 저승길로 보내주마!”

    순간 초승달 모양의 검빛이 천여 가닥의 기다란 실로 갈라졌다. 검은 실들은 거대한 그물을 이루어 검은 화염 주변을 뒤덮은 다음 급속도로 수축했다.

    “봉하라.”

    그 순간, 마염 속에서 한립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렸다.

    우웅!

    보랏빛이 휘리릭 뭉쳐져 ‘봉(封)’ 자를 형성한 다음 스스로 터졌다. 이상한 파동이 도처로 퍼져 좁아들던 검은 그물의 속도를 늦추었다가 금방 다시 원래 속도로 돌아갔다.

    콰릉!

    천둥소리와 함께 청백색 실이 그물 틈을 빠져나가 농 가 노조와 엽 수사의 중간 허공에 나타났다.

    그는 뇌전을 칭칭 감고 등 뒤로 청백색 날개를 펼친 한립이었다. 풍뢰시를 발동한 그는 손에 작은 보라색 솥을 들고 있었다.

    “자언정! 혈광의 보물을 어찌 네 놈이 지니고 있는 것이더냐? 됐다, 귀찮으니 답할 것도 없다. 어차피 모조품에 불과한데 흑마비(黑魔匕)를 막을 수는 없겠지.”

    흑포 청년은 보라색 솥을 알아보고 냉랭히 중얼거렸다. 말이 끝나자마자 한립 주변에 검은 실들이 빼곡하게 나타나 달려들었다.

    이에 한립이 보라색 솥에 법결을 던져 넣었다.

    “막아라.”

    그의 손끝에서 푸른 빛기둥이 뿜어져 나와 정순한 영력을 물밀듯이 작은 솥으로 불어 넣었고 보광을 번뜩인 솥은 ‘금(禁)’ 자를 토해냈다. 주술문자는 백 배로 불어나 어렴풋한 보랏빛 허상으로 변해 그를 보호했다. 그 위로 검은 실들이 사방팔방에서 쇄도했다.

    퍼퍼퍼펑!

    검은 실과 보랏빛이 교전하는 곳마다 머리통만한 빛 구슬이 생겨났다. 검은 실은 날카롭기 그지없었지만 자언정이 모방한 현천의 보물 역시 다른 보물들보다 위력이 강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