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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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해 속의 섬 안, 비취색 연못가. 백의 여인이 미간에서 분홍색 꽃문양을 반짝이고 눈을 떴다.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머금자 온 세상에 꽃이 만발한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여인 뒤에 서있던 흑갑 거한도 그것을 보고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때 이미 여인의 신형은 사라진 후였다.
“흐흐, 드디어 그 녀석들이 도착했나 보구나!”
흑갑 거한의 얼굴에 사나운 기색이 스쳤다.
* * *
뇌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거대 섬.
거대한 산봉우리 정상에 흑포 청년이 약초 밭 옆에 쪼그려 앉아 윤기가 나는 자홍색 영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밭 주위에 둘러놓은 울타리는 놀랍게도 자금색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밭을 이루는 토양은 하나하나가 향기를 풍기는 백옥 알갱이였다.
밭 가까이에 도검처럼 꼿꼿한 식물들이 사람 키만큼 자라나 있었는데 그 위로 피처럼 붉은 기다란 과실이 맺혀 있었다. 바로 한립이 딱 한 번 본 적 있는 혈아미(血牙米)였다.
그가 본 것이 팔뚝 반절만한 크기였다면 이곳의 혈아미들은 크기가 그 두 배는 되었고 향기도 훨씬 진했다.
그밖에도 평범한 마족들에게는 진귀하기 짝이 없는 영약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지만 흑포 청년 앞의 밭에는 오직 자홍색 영약 한 그루가 전부였다.
손바닥만 한 식물은 꽃과 과실도 없었고 이파리 대여섯 개가 전부라 도무지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자홍색 영약을 살피던 그의 손목에 검은빛이 반짝이고 주술문자가 떠올랐지만 청년의 손목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파앗-!
한참 후 자홍색 영약은 돌연 황금 기운을 뿜어냈고 이파리들은 은색으로 물들어갔다.
그것을 본 흑포 청년이 희색을 드러냈지만 그 순간 영약은 부르르 몸을 떨며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져 잿빛으로 변해 흩어졌다.
“익, 또 실패라니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이야! 재배 기간이 너무 짧았나? 아니면 사용한 은하천진(銀河天塵)의 순도가 부족했던 것인가?”
그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서 검은빛 구슬을 날렸다.
콰쾅!
산봉우리 전체가 진동하고 정성을 다해 마련해 놓은 밭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엄청나게 깊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흑포 청년은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뒤늦게 손목에 떠오른 검은 문자를 쳐다보았다.
“흥, 또 누가 고령도(苦靈島)에 침입했구나. 주제도 모르는 영계 놈들일 테지! 본 시조가 마침 화풀이 할 곳이 필요했는데 잘 되었어.”
청년은 서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소매를 펄럭여 허공에 검은 교룡을 불러냈다. 눈과 발톱은 새빨갛고 입에서 검은 화염이 새어나오는 머리 셋 달린 교룡이었다.
“가자, 고령도로!”
모호하게 신형을 날려 삼두(三頭) 교룡 위에 탄 청년이 냉랭히 명을 내렸다.
* * *
끝없이 펼쳐진 산맥 아래의 지하 궁전.
투명한 수정관 속에 금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누워있었다. 금포인의 목에서 금색 주술문자가 반짝이는 것을 제외하면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뇌해 속에서 암녹색 전함은 뇌전에 치여 이리저리 나풀거렸지만 열댓 개의 보물과 몇 겹의 보호막 덕에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뇌해는 그들의 예상을 초월해서 밖에서 보던 것보다 두세 배는 더 많은 벼락이 내리 꽂혔고, 그 속에 정체모를 힘이 실려 있어 선박에 엄청난 압력을 가했다.
전함 앞머리와 말미를 두 청석괴뢰가 지키고 서서 수시로 푸른빛으로 뇌전들을 와해시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한 자리에 붙들려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느려서야 어느 세월에 섬에 도착하겠습니까! 천추 수사, 이 선박은 수사의 것이니 더 빠르게 나아갈 방법은 모르십니까?”
농 가 노조가 답답한 지 곁의 영족 여인을 다그쳤다.
“비술을 이용해 한수서의 정혈을 태우면 그들의 힘을 일시적으로 끌어올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여덟 마리 모두 이곳에서 숨이 끊길 겁니다.”
주저하던 천추 성녀가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연허 중기의 수행을 지닌 한수서 여덟 마리를 키우느라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이곳에서 전부 잃을 수는 없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영수를 아까워하십니까! 어서 이곳을 벗어나 세령지와 정령련만 찾을 수 있다면 모두 보상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술법을 펼칠 테니 수사께서 호법을 서주세요. 절대 중간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농 가 노조의 다급한 어조에 천추 성녀도 과감히 결단을 내렸다.
“허허, 노부가 있는 한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두 청석괴뢰가 있는 방향을 가리킨 농 가 노조는 얼굴이 진한 금빛으로 변해갔다.
고공을 향해 열심히 주먹을 휘두르던 청석괴뢰들이 팔을 내리고 하나 뿐인 눈에서 눈부신 하얀빛을 뿜어냈다. 눈알이 있어야할 자리를 하얀 화염이 대신 했다.
푸확!
청석괴뢰의 눈에서 빠져나간 두 빛기둥이 허공에서 만나 거대한 결정을 이루었다. 은색 주술문자가 빽빽하게 새겨진 결정은 은빛을 반짝이는 거대한 방패였다.
거울은 굉장히 얇고 반들반들 했는데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뇌전을 전부 막아냈다. 이에 휘청거리던 선박도 안정을 되찾았다.
“천추 수사, 꼭두각시들도 오래 버틸 수 없으니 바로 시작하시지요!”
수결을 맺은 농 가 노조가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청석괴뢰의 신통을 발동하느라 법력을 상당히 소비한 듯했다.
사악!
천추성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느다란 팔목을 들어 올려 자신의 손톱으로 살을 갈랐다. 새하얀 피부에서 핏방울이 솟아올라 손바닥 크기의 진법을 형성했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리고 주술소리가 울려 퍼지자 손목 위 혈진(血陣)이 오색 기운과 기이한 향기를 내뿜었다.
잠시 후 여인의 기합 소리와 함께 혈진 속에서 여덟 개의 단약이 빠져나와 한수서들을 향해 날아갔다.
크앙!
코뿔소 해수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쳐들고 단약을 집어삼켰다. 팔목에 난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천추 성녀가 금패 비슷한 법기를 들어 영수들를 가리켰다.
핏빛 주술문자가 떠오른 금패에서 그녀의 팔목에 있던 핏빛 진법이 나타나 각각 한수서들을 향해 쇄도했다.
한수서들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외뿔이 핏물로 물들고 기운이 미친 듯이 증폭되었다. 근육이 울룩불룩 튀어나온 영수들의 등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핏빛 박쥐 날개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를 활짝 핀 한수서들이 흥분해 엄청난 힘으로 파도를 가르고 선박을 끌기 시작했다. 보물을 조종해 뇌전 폭우를 막고 있던 나머지 일행들이 그것을 보고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데 그때 두 청석괴뢰가 눈에서 흰빛을 잃고 뇌전을 막아주던 거대 방패가 소리 없이 흩어져 사라졌다. 이에 벼락들이 곧장 선박의 가장 바깥 보호막을 때렸다.
쩡!
하얀 보호막이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조각났다.
뇌전의 힘이 이전보다 더욱 강해져 선박에 펼쳐 놓은 진법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보호막들도 미친 듯이 쏟아지는 뇌전에 위태롭게 떨고 있었다.
일행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하아…….’
선박에 박아 놓은 백여 개의 깃발을 조종하던 한립은 돌연 얼굴을 굳히고 길게 포효하며 삼두육비 법상을 불러냈다.
굵직한 마기가 법상 위로 치솟았다. 한립이 범성진마공을 극성으로 발동해 체내의 법력을 정순한 마기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의 소매 속에서 마기들이 검은 교룡처럼 날아올라 마번들이 만들어둔 검은 사슬 그물과 하나가 되었다.
이에 상당부분 찢겨져 나갔던 그물망이 완전해지자 다른 이들이 감당해야 할 뇌전의 힘이 상당히 감소했다. 농 가 노조도 힘차게 기합을 넣고 두 청석괴뢰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꼭두각시들이 주먹을 들고 고공을 때리며 푸른 빛구슬을 연달아 쏘아대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그것을 보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체내의 법력을 끌어올려 부리던 보물의 위력을 높이자 선박 주위로 굉음과 눈부신 빛이 펑펑 터져 나왔다.
치열한 사투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은색 비도(飛刀) 두 자루로 뇌전들을 막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영족 청년의 팔뚝이 신비한 금색 주술문자로 뒤덮였고 먹구름 속 금색 게의 등딱지에도 비슷한 금색 문자가 반짝인다는 사실이었다.
* * *
반나절 후.
드디어 선박은 뇌전이 가득한 뇌해를 뚫고 나왔다. 선박은 너덜너덜해져 선실 절반이 부서져 있었고 선박을 이끌던 한수서들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그러나 수사들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열기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없었다. 고요한 해수면은 뜻밖에도 짙은 쪽빛으로 빛났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순한 영기로 가득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계로 돌아온 것은 아닌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비취색의 거대 섬이었는데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영계의 최상급 영맥보다 정순한 영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우리가 찾아냈습니다! 이렇게 정순한 영기가 가득한 섬이기에 세령지와 정령련 같은 영물들이 있는 것이겠지요!”
농 가 노조가 두 뺨에 홍조가 떠오른 채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천추 성녀와 백척 역시 흥분한 와중에도 정체모를 눈빛을 교환했다.
“가시죠. 세령지와 정령련이 듣던 대로 뛰어난 효과를 지녔으면 좋겠군요.”
한립도 눈을 반짝이며 한 마디 거들었다.
“허허, 그럽시다. 천지영물이 지척에 있는데 서둘러 가야지요.”
농 가 노조가 웃음을 터트리며 금색 빛줄기로 변해 섬으로 날아갔고 휘 장로가 말없이 그 뒤를 쫓았다.
“우리도 가시죠.”
천추 성녀는 선박을 회수하고 보라색 깃발을 흔들어 영족 수사들을 보랏빛 기운으로 휘감아 출발했다.
영기로 가득한 해역이라 아무런 문제없이 둔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별안간 해수면 위에 한립과 엽 수사만 남았다.
“한 형, 영물이 코앞에 있는데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세령지는 함께 이용하고 정령련은 몇 송이든 간에 균등하게 나누기로 합의를 보지 않았습니까.”
웃음기 어린 소녀의 물음에 한립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다들 합의한 대로만 한다면 저도 좋겠습니다. 허나 만에 하나 그러지 않으면 어쩌시겠습니까?”
“선자, 안심하십시오.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저는 약속대로 선자와 함께 움직이지요.”
“한 형께서 믿을만한 분이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요? 작은 섬은 아니지만 세령지를 찾는데 얼마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엽 수사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들도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전력을 다해 다른 이들을 앞지르기 보다는 영족인들과 농 가 노조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어차피 세령지의 위치를 모르니 이곳저곳 찾아다니는 것보다 뭔가 알고 있는 이들을 따라가는 것이 나았다.
일행들은 잇달아 평원과 밀림을 지나 여러 산봉우리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수려한 풍경이 장관이었고 초목의 맑은 향이 가득했다.
농 가 노조와 영족인들이 둔광을 멈추고 모습을 드러냈고 한립도 순간적으로 속도를 내 농 가 노조 옆에 번득 나타났다.
오색 기운을 반짝인 엽 수사도 소리 없이 그 옆으로 다가왔다. 이때 영족 수사들과 한립 등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보물이 가까워지자 양 종족의 수사들은 자연히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세령지 같은 역천의 보물은 누구라도 욕심을 품게 할 만했는데 그들은 같은 종족도 아니었으니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 없이 농 가 노조와 천추 성녀는 몇 마디 주고받더니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농 가 노조가 금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도끼를 꺼내들었다. 은색 주술문자로 가득한 살기(煞氣)를 품고 있는 도끼였다.
이에 천추 성녀는 주술을 외워 하얀빛을 발산해 핏빛 문양으로 뒤덮인 우윳빛 구슬을 분출했다. 한립은 그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역시 이제까지 말하지 않은 정보가 있었구나.’
여인이 손짓하자 구슬이 산맥으로 튀어나갔고 그 중 한 곳에 이르더니 깜빡거렸다.
“농 수사, 바로 저곳입니다!”
눈을 반짝인 천추 성녀가 서둘러 외쳤다.
그 소리에 농 가 노조가 기합을 넣자 피부 위로 금색 비늘이 반짝이고 신형이 폭발적으로 커져 머리 위로 한 쌍의 금색 뿔이 자라났다. 체내의 진혈을 격발해 반룡체(半龍體)로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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