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3화. 뇌해(雷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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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선박 아래에 있는 밀실 안에서 한립은 뱃머리에 숨겨 놓은 한 줄기 의식으로 농 가 노조와 깃털 옷 소녀의 대화를 들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곧 의식을 회수하고 생각에 잠겼다.
1년 전, 능원 성조 화신이 청란진혈을 얻은 그와 엽 수사를 철사령 외곽에서 막아섰다.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지만 한립은 엽 수사가 준비한 보물의 보조를 받아 강력한 신통을 발휘해 성조 화신을 가두고 중상을 입혔다. 이게 능원 성조 화신이 중상을 입은 채 철사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한립과 엽 수사는 추격하는 자가 없었기에 순조롭게 이동했고 보름 전 약속대로 마원해 인근의 항구에서 농 가 노조 일행 및 영족 수사들과 합류했다.
그런데 그들과 합류한 날 한립은 깜짝 놀랐다. 농 가 노조와 휘 장로는 무탈했지만 영족 무리 중 ‘금고 장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농 가 노조가 물었지만 영족 수사들은 대충 ‘금 장로’가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고만 답했고 세부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한립과 농 가 노조는 의심스러웠지만 대답을 강요할 수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고 한립은 무의식중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지수’라는 영족 청년을 떠올렸다.
줄곧 불편한 느낌을 주던 성령은 다시 만났을 때 나날이 깊어가던 음한한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금 장로의 실종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증거는 없었지만 영족 청년에 대한 그의 경계심은 점점 커져갔다. 한립은 불길한 생각을 접고 하얀 병을 꺼내 들었다. 손끝으로 병을 매만지고 있자니 그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청란진혈이 생겼으니 경칩술의 또 다른 변신술을 쓸 수 있고 다른 변신술의 위력도 한층 높아질 것이다.
게다가 청란은 바람을 통제하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청란 진령 본체는 구천현풍(九天玄風) 속에 탄생해 일단 분노하면 바람으로 천지를 뒤집고 일국을 멸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도 현풍(玄風)의 힘이 무척 궁금했지만 엽 수사처럼 오는 도중 바로 진혈을 복용해 연화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경칩결은 일반적인 공법과 달리 여러 진혈들을 연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시간도 오래 걸렸고 연화 도중 실패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래서 한립은 마계에서의 일을 마치고 영계로 돌아간 후에 정식으로 청란진혈 연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하얀 병을 치우고 잡념을 지워가며 눈을 감고 입정(入靜)에 들었다.
시간이 흘러 암녹색 배는 검은 바다를 세 달이나 항해했다. 일행은 두 명씩 무리를 이루어 배의 조종과 인근 해역 정찰을 맡았고 나머지는 선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 동안 몇몇 주제도 모르는 해수들이 덤벼 처리한 것 외에는 성가신 일은 없었지만 영족에서 말한 해역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날 한립은 공교롭게도 천추 성녀와 번을 서게 되어 뱃머리에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천추 성녀도 방석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들은 방대한 의식의 힘으로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고 눈동자 깊은 곳에 빛이 번득였다.
“한 형, 무언가 발견하신 겁니까?”
천추 성녀가 그의 의식 파동을 감지하고 눈을 번쩍 떴다.
“좌측 3천리 밖을 보십시오.”
한립은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의식으로 그곳을 훑은 여인의 얼굴에 흥분이 어렸다.
“마원초(魔猿礁)! 들었던 것과 똑같이 생긴 암초입니다. 한 형께서 방향을 트시는 동안 제가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요!”
천추 성녀의 말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결을 맺어 해수들을 향해 여러 빛깔의 법결을 날렸다.
촤아악!
고래 해수들은 낮게 울부짖고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동안 천추 성녀는 비술로 농 가 노조 등 다른 수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잠시 후 일행들은 전부 뱃머리에 모여 의식으로 전방을 살피고 있었다. 두 시진이 흘러 멀리 해수면 위로 외딴 산봉우리가 보였다.
거무튀튀한 산은 절반가량 검은 구름에 파묻혀 있었는데 마치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휘두르고 있는 거대 원숭이처럼 보였다. 멀리 있는데도 눈, 코, 입이 분명해서 살아있는 원숭이처럼 생생했다.
“마원초가 맞을 겁니다.”
천추 성녀가 한참을 바라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추 수사의 말씀에 따르면 그 섬은 마원초가 있는 외해로 한 달 가량 가면 갈 수 있다고 하셨죠. 그럼 서남쪽이겠군요.”
엽 수사가 산봉우리를 확인하고 차분히 물었다.
“본족 대인께서 남기신 정보에 따르면 그렇기는 합니다…….”
“여기까지 와서 숨기고 계신 것은 없겠지요?”
천추 성녀가 말끝을 흐리자 농 가 노조가 불쾌한 내색을 했다.
“오해십니다! 그저 대인께서 섬의 위치를 남기며 마지막에 후인들에게 당부한 내용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섬 주변에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기라도 하는지 섬에 접근할 때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아주 애매한 내용이라 이전에는 모두에게 말씀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천추 성녀가 서둘러 해명했다.
“대승기 수사였던 영족의 선배님께서 위협을 느끼실 정도라면 우리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섬에 접근하기 전에 준비를 해둬야겠습니다.”
한립이 깜짝 놀라 나섰다.
“큼, 맞습니다. 다들 아직 아껴놓은 신통이 있다면 언제라도 펼칠 수 있게 준비를 하시지요. 노부는 선박에 진법을 몇 개 펼쳐 위력을 증가시켜 두겠습니다.”
영족 노인 유생이 헛기침을 했다. 그 말에 고민하던 농 가 노조도 신중히 입을 열었다.
“제게도 상고시대 유적에서 구한 석괴뢰(石傀儡) 두 마리가 있습니다. 공격 방법이 몇 개 안 되기는 해도 방어력은 합체기 수사와 비슷합니다. 헌데 그것들을 발동하려면 십여 일 전에는 술법을 펼쳐야 합니다.”
“제가 지닌 마번(魔幡)도 위력이 적지 않으니 배에 설치해 두겠습니다.”
한립이 말한 깃발 형태의 마기는 마족 존자를 죽이고 얻은 것으로 보통의 합체기 수사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저는 한수서(寒水犀:코뿔소)로 지금의 해수(海獸)들을 대신하게 하지요. 살가죽이 두껍고 분출하는 한기도 나름 강력한 영수(靈獸)라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천추 성녀도 생각 끝에 자신이 기르던 코뿔소 영수들에 말했다.
다른 수사들도 연이어 보물들을 내놓았다. 다들 서로가 최상의 신통은 아직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선박의 방어력이 증가한 것에 만족했다.
선박이 방향을 틀어 서남쪽으로 항해하는 동안 수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립은 마번 한 벌을 꺼내 선박의 중요 부위에 꽂아 넣었고, 노인 유생은 선박 표면에 주술문자와 문양을 새겨 넣거나 알맞은 자리에 진법 원반을 박아 넣었다.
고래 해수도 피부에 남색빛이 도는 커다란 코뿔소 해수 여덟 마리로 대체되어 선박의 모습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 * *
한 달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선박은 여전히 마원해를 항해 중이었는데 고요하던 바다가 거세게 출렁여 사방팔방에서 파도가 몰아쳤고 고공의 검은 구름도 고도가 더 낮은 곳까지 드리워있었다. 구름 속에서 광풍이 일고 수시로 선박에 굵은 벼락을 내리쳤다.
그러나 거대 선박은 녹색의 화려한 보호막이 펼쳐져 있어 뇌전을 맞고도 미미하게 반짝이다 말았다.
배 앞머리에서 농 가 노조와 천추 성녀 등이 모여 어두운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 해역을 떠돈 지도 이레가 흘렀습니다. 아직까지 섬을 발견하지 못했고요. 귀 족의 대인께서 언급하신 위험이 겨우 저 파도는 아니겠지요?”
“농 형, 농담도 잘하십니다. 겨우 저 파도를 조심하라 그리 신신당부하셨겠습니까? 관건은 이곳 해역에서 우리의 의식이 너무 제한되어 고작 주변 10리 밖에는 살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섬을 찾는 일이 쉽지 않겠어요.”
농 가 노조가 검은 파도를 내려다보았고 천추 성녀는 미간을 좁혔다.
“한 형과 백 형께서 영목 신통을 지니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야말로 해변에서 모래알 찾기가 될 뻔했습니다.”
한숨을 내쉰 농가 노조의 시선이 한립과 하얀 빛 속 성령에게 향했다.
두 눈에 남색빛을 일렁이는 한립이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고 백척은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마에서 하얀빛이 새어나와 거대한 파도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제 명청령안에는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 영목 신통은 백 형의 천부적인 능력과는 달리 후천적으로 수련한 것이라 법력 소모가 막대한 탓에 빈번히 사용할 수 없으니까요.”
한립이 눈에서 남색빛을 거두고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요. 영목 신통으로 가끔이나마 백 수사를 보조해 수색을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섬을 찾을 확률이 크게 높아질 겁니다.”
천추 성녀가 미소를 머금고 예의를 차렸다. 이에 한립은 더는 답하지 않고 다시 체내의 법력을 이용해 영목 신통을 발동했다.
농 가 노조와 천추 성녀는 영목 신통이 없음에도 바로 선실로 돌아가지 않고 곁에 서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흘러 잠시 휴식을 취하던 한립이 별 기대 없이 명청령안을 이용해 바다를 살피다 안색이 달라졌다. 그가 법력을 맹렬히 일으키자 두 눈에서 남색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의 변화에 농 가 노조와 천추 성녀가 놀라 주의를 기울였지만 방해하지 않고 서로 기쁨의 눈빛만 교환했다.
“백 형, 이쪽으로 5천 리 밖을 한 번 확인해 주시지요. 제가 정확히 본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이 길게 숨을 내쉬고 백척을 향해 말했다.
“5천 리요? 한 형께서는 그렇게 멀리까지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저도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백척이 놀라 고개를 끄덕이고 이마에서 분출되던 하얀빛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몸에 흐르는 하얀 빛이 점점 더 밝아져갔다.
“과연 무언가 있습니다. 너무 멀어 정확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섬으로 보입니다.”
한참이 지나 분출하던 하얀 빛이 어둑해지자 백척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두 분께서 보신 것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농 가 노조가 재빨리 물었고 천추 성녀도 귀를 기울였다.
“저쪽에 뇌전으로 둘러싸여 있는 해역이 있습니다. 그 안에 검은 그림자가 보이기는 하는데 뇌전의 영향으로 가려져 있어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립은 숨김없이 답해주었다.
“뇌전이요? 저희도 뇌전의 영향권에 있는데요. 뭐가 다른 거죠?”
“세부적인 것은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 가까이 가시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천추 성녀의 질문에 한립이 묘한 얼굴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당장 뱃머리를 돌리지요!”
농 가 노조는 머뭇거리지 않고 서둘러 선박을 끌고 있는 한수서들을 향해 손짓했다.
웅!
선박이 진동하며 살짝 방향을 틀어 한립이 말한 쪽으로 질주했다. 이때 농 가 노조의 전음을 들은 다른 수사들은 기쁜 얼굴로 선실을 빠져나왔다.
* * *
반나절이 지날 무렵, 수천 리를 이동한 선박에서 한립이 말한 해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까만 바다 위로 은색 뇌전이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리며 연달아 폭발해 뇌전 바다를 형성하고 있었다.
뇌전의 폭우를 뚫고 뇌해(雷海) 속에 모호한 검은 그림자가 보이기는 했는데 맨 눈으로는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목 신통을 지닌 한립과 백척은 곧바로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뇌해 속에 거대한 섬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섬 주위의 뇌해 때문에 어디로 가든 뇌전 폭우를 피해 섬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을 뿐이었다.
“이 뇌전들을 조심하라는 뜻이었으면 조금 성가시기는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전방의 뇌해를 살피던 농 가 노조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천추 성녀는 눈썹을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반박을 하지 못했다.
“농 형께서 무언가 착각을 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런데 한립이 눈을 반짝이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모르는 무언가를 발견하신 겝니까?”
흠칫 놀란 농 가 노조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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