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1화. 진입
*
안개가 가시고 한립이 서있던 자리가 텅 비었다. 엽 수사가 의식으로 주변을 훑었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청익인들이 곧 당도할 것입니다. 어서 부적을 발동하시지요.”
그녀의 귓가에 차분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소녀는 곧바로 부적을 발동했고 똑같이 보라색 안개가 나타나 그녀의 신형을 뒤덮었다.
태일화청부는 사용하는 자의 수행에 따라 효과가 달라졌다. 그녀는 합체기 수행을 지녔으니 동급 마존이 의식으로 주변을 샅샅이 뒤지지 않는 한 들키지 않을 것이다.
이때 거대 뱀이 산봉우리 중간의 안개로 하강해 멈춰 서자 우두머리 노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수결을 맺고 있었다.
쉬익!
푸른빛이 안개 속으로 쏘아져 들어가고 향기가 몇 배로 진해졌다. 파동과 함께 안개가 갈라지며 통로가 나타났고, 통로 끝으로 모호하게 건물 같은 것이 보였다.
노인은 지체 없이 거대 뱀 위에서 발을 굴렀다.
쉭쉭!
마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작게 줄어들어 노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젊은 마인들을 향해 웃으며 먼저 통로로 들어가고 나머지 마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마인들이 전부 들어가자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통로가 서서히 닫혔다. 그 순간 두 개의 허상이 소리 없이 따라붙었지만 금제를 관리하는 마족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 * *
한 시진 후, 새까만 목재로 지어진 높다란 탑 위에서 한립이 산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채는 세 산봉우리에 기대 세워져 있었고 높이 솟은 거목들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바로 그 보라색 거목들이 안개에서 느껴지던 농염한 향기의 근원지였다.
산채 중간에는 크고 작은 목제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고 대략 십만 명 이상의 마인들이 거주했다.
인구가 많지 않은 청익족의 산채 중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였다. 산채 안에도 커다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몇몇 작은 건물들을 가려주었지만 명청령안을 발동한 한립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한 건물에 닿았다. 금제 파동이 느껴지는 곳으로 청익족 병사들이 순찰하고 있었고 평범한 청익인들은 멀리 피해 다녔다.
‘그렇다면…….’
한립은 남색빛을 거둬들이고 허공에서 내려와 아무도 없는 골목에 내려섰고, 그 자리에 한립과 똑같이 생긴 청익족 마인이 나타났다.
환술은 태일화청부 보다는 효과가 약해도 평범한 마인들의 이목을 속이기에는 충분했다. 한립은 태연하게 골목을 나서 미소를 머금고 경계가 삼엄한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산채의 다른 골목, 엽 수사도 은신술을 거두고 젊은 마족 여인으로 변해 걸어가고 있었다.
거대 누각 방향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혈홍색의 삼각 철패가 들려있었다.
* * *
훈향채(薰香寨)의 작은 목재 건물 안.
오색 보호막 내부에 두 개의 인영이 마주 앉아 있었다.
이틀간 산채 탐색을 마친 한립과 엽 수사였다.
“선자께서 그 전당 안에 청익족 제자가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하셨다고요?”
“법기가 강렬한 반응을 보였으니 확실합니다. 그곳에 머무는 핵심 제자가 한둘이 아닌 것 같은데 저희에게는 희소식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핵심 제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곳이니까 금제가 겹겹이 쳐있는 것은 물론 청익족 마인이 상주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어 더는 기다릴 수 없으니 은밀하게 일을 마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엽 수사가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조용히 해결할 수 없다면 한바탕 소란을 일으켜 봅시다. 제가 마존들을 상대하는 동안 선자께서 제자들을 맡아주시지요.”
한립이 생각을 마치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마존급의 방해가 없으면 저도 금방 핵심 제자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그저 일단 정체를 드러내면 최대한 빨리 산채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훈향채의 규모와 청익족 강자들을 생각하면 이곳에 적어도 일고여덟 명의 마존들과 수많은 연허기 마인들이 살고 있을 테니까요. 게다가 산채를 둘러싼 금제를 뚫고 나가려면 한참 걸릴 테고요.”
“금제에 관해서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며칠 간 살펴본 결과 금제가 약한 곳을 몇 군데 파악해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훈향채를 빨리 벗어날 수 있겠네요. 능원 성조 화신만 나타나지 않으면 마존들도 우리를 쫓지 못할 거예요.”
한립의 말에 엽 수사가 희색을 드러냈다.
“그러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만일 성조 화신을 마주쳐도 보물의 힘으로 잠시 가둬둘 수는 있을 겁니다.”
“하긴 굳이 최악의 상황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요! 그럼 휴식을 취하다 오늘 저녁에 움직일까요?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것 없으니까요.”
“선자의 뜻대로 하지요!”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엽 수사도 머릿속으로 수차례 계획을 검토해 보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 * *
훈향채 거대 전당의 편전에 새까만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늘어뜨린 마족 사내가 푸른 옥침상 위에서 공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마족 사내의 진짜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묵직한 영기의 압력으로 보아 강력한 마족 존자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침상 앞쪽에는 이상하게 생긴 작은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표면에 가득 주술문자가 새겨진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웅!
돌연 제단이 검은 광채를 분출했다. 이에 마족 사내가 눈을 뜨고 청록색 눈을 형형하게 번뜩였다.
“뭐지? 또 그 못난 녀석들이 실수록 금제를 건드린 것인가!”
마족 사내는 재빨리 수결을 맺고 정체모를 광풍 속으로 사라졌다.
휘잉!
다음 순간, 편전이 아닌 전당의 대청 안에 광풍이 일고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족 사내는 대청을 훑고 동공을 수축했다. 대청 구석에 푸른 장포를 입은 인영이 그를 등지고 벽에 걸린 새까만 거대 칼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새까만 칼날은 평범한 재질로 제련된 장식용이었지만 청포인은 무척 흥미롭게 그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족 사내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누구기에 야밤에 본 전에 침입한 것입니까?”
“침입은요.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수사와 한담이나 나눌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청포인(靑袍人)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여유롭게 답했다.
“저와 한담을요? 그게 무슨…….”
마족 사내는 눈을 굴리며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는데 갑자기 벽을 타고 쿵! 하는 울림이 퍼졌다. 엄청난 진동에 대청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마족 사내는 안색이 확 달라져 잔영을 남기고 대청 문 쪽으로 튀어나갔다. 그때 청포인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콰릉!
청백색 뇌전을 일으킨 청포인이 순식간에 마족 사내 앞에 나타나 열손가락을 튕겼다.
쉬쉬쉬쉭!
손끝에서 푸른 실들이 뻗어나가 거대한 검기의 그물을 이루었다.
청포인은 푸른빛으로 얼굴을 가린 한립이었다. 푸른 검실들은 아주 가늘었지만 청죽봉운검들의 검기가 응결해 형성된 것이라 무척 날카로웠다.
그러나 청익족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 선발된 마족 사내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기에 재빨리 푸른 광풍을 불며 두 손바닥을 번쩍 들어올렸다.
평범해 보이던 두 손바닥에서 노란 기운이 응결해 교룡과 호랑이의 모습으로 검기의 그물을 찢어발겼다. 한립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손끝을 뻗었다.
휘익-
푸른 그물을 엮은 실 하나하나가 검기로 변해 거세게 떨어져 내렸고 교룡과 호랑이 허상은 수많은 검기에 구멍이 숭숭 뚫려 흩어졌다.
남은 검기가 사정없이 마족 사내를 노렸다.
이에 마족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주변 광풍을 불러들여 그 속에 신형을 감춘 순간 검기들이 그곳을 꿰뚫었다. 광풍이 검기에 갈가리 찢긴 후에도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콰쾅!
한립은 눈을 반짝이며 먹처럼 검은 손으로 뒤쪽의 허공을 내리쳤고 무형의 힘이 손바닥에서 빠져나와 커다란 폭음을 냈다.
그러자 허공에서 잿빛이 반짝이더니 은신술을 펼쳐 기습할 기회를 노리던 마족 사내가 비틀거리며 튕겨 나왔다.
“극성으로 익힌 마풍둔(魔風遁)이 발각 당하다니!”
사내가 겨우 몸을 가누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한립은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그 모습에 사내가 살벌하게 소리쳤다.
“좋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목숨을 걸고 상대해 주마!”
그런데 한립이 피식 웃더니 소매를 펄럭여 은색 화염을 날렸다. 이상하게도 싸우고 있던 그가 아니라 대청 구석을 향해 날아갔다.
화염이 빙글 돌아 은색 불새로 변한 다음 날개를 펄럭여 몸집을 불렸다.
콰르릉!
은색 화염이 대청 구석을 뒤덮은 순간, 누군가의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푸른빛이 반짝인 후 머리가 셋 달린 푸른 구렁이 허상이 화염을 뚫고나왔다. 각각의 머리에서 푸른색, 노란색, 남색의 한기(寒氣)를 방출해 일시적으로 은색 화염을 몰아냈다.
그 틈을 노려 푸른 인영이 화염을 빠져나와 마족 사내 옆에 섰다. 비취색 치마를 입은 젊은 부인이었다. 여인의 어깨에는 머리가 셋 달린 작은 뱀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은색 화염을 몰아낸 거대 구렁이 허상은 작은 뱀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청 장로께서 오셨습니다!”
마족 사내가 여인을 보고 한결 편해진 얼굴로 알은체를 했다.
“예, 심오한 수행을 지닌 자입니다. 은신해 몰래 접근하려 했는데 저 자의 눈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푸른 치마 부인은 서늘한 눈빛으로 한립을 쏘아보았다.
“일당이 있는 듯하니 어서 여길 벗어나 장령각(藏靈閣)으로 가야합니다. 제가 저 자를 붙들어 둘 테니 선자께서 먼저 가시지요!”
“수사께서는 마풍둔을 익혀 저보다 둔술이 뛰어나시니 제가 저 자를 막은 것이 나을 겁니다.”
푸른 치마 부인이 답하고는 즉시 한 손을 펼쳐 입을 벌렸다. 그녀의 입에서 은빛이 빠져나가 펼쳐진 손가락 중 하나를 베었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부위에 뼈와 살이 드러났는데 피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어깨에 있던 푸른 뱀이 그것을 보고 신이 나 뛰어올라 냉큼 떨어지는 손가락을 집어 삼켰다.
이때 푸른 치마 부인은 주술을 외며 보라색 정기를 내뱉어 푸른 뱀에 흡수시켰다. 푸른 뱀은 곧바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고 세 개의 머리에 각각 푸른색, 노란색, 남색의 뿔이 솟아났다.
마족 사내가 머뭇거리다 여인의 단호한 행동에 붉은 저물탁을 불러냈다. 저물탁에서 이마에 청록색 제3의 눈이 달리 새하얀 매가 날아올랐다.
머리 셋 달린 거대 구렁이나 새하얀 거대 매 모두 마족 여인과 사내의 기운과 비슷했고 주인과 비슷한 성질의 신통을 부리는 듯했다. 이렇게 되면 마존 네 명이랑 붙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립도 신중을 기하기 위해 소매 속에서 노란 짐승을 불러냈다. 합체기에 이른 표린수였다. 동시에 그의 몸에 검은 기운이 일어 마갑(魔甲)을 형성하고 손바닥 위로 새까만 동산이 떠올랐다.
그리고 대청 구석을 활활 태우고 있던 은색 화염도 맑게 우는 불새로 변해 한립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가세요!”
대청 밖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굉음에 푸른 치마 부인이 지체 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피피피핏!
그녀의 손에서 백여 개의 빛이 쏘아져나가 108개의 청록색 바늘로 변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바늘들에서 미약하게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세 머리 구렁이도 각기 다른 색의 한기를 내뿜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강렬해 허공도 얼려버릴 수 있을 듯했다.
마족 사내는 공격에 합류하지 않고 새하얀 매와 동시에 하얀 돌풍으로 변해 대청의 쪽문으로 몸을 날렸다.
“막거라.”
한립은 표린수에게 명을 내리고 들고 있던 새까만 동산을 투척했다. 동산은 날아가며 커다란 산봉우리로 변해 그의 앞을 막아섰고, 청록색 바늘들이 연달아 충돌해 폭죽처럼 터져도 끄덕하지 않았다.
은색 불새는 삼색 한기로 날아들어 입에서 은색 화염을 뿜었고, 은색 불바다가 펼쳐져 삼색 한기를 차츰차츰 밀어냈다.
파앗!
순식간에 출구에 이른 마족 사내 앞에 파문이 일고 노란 허상이 나타났다. 동시에 무수히 많은 금색 발톱들이 파공음과 함께 날아들어 그와 새하얀 거대 매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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