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220화 (977/2,000)
  • 1220화. 훈향채(薰香寨)

    *

    “수사의 동료 분들도 마존이라면 그저 실력이나 겨루는 정도일 겁니다.”

    중년 도사가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마존급 수사가 아니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습니다.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마존 장로들을 파견하다니 수존전이 성계에서 명성을 떨칠 만합니다.”

    한립의 칭찬에 중년도사가 무어라 말하려는데 허리춤의 옥패가 하얀빛을 방출하고 울어댔다. 도사가 그것을 보더니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져서 한립을 향해 포권을 하며 이만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곧 둔광을 일으켜 하늘을 갈라 사라졌다.

    “엽 선자, 저들의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까?”

    “9할의 진실에 1할의 거짓을 섞어 놓았을 겁니다! 저들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살심을 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요. 마인들 사이에서 수존전이 그리 좋게만 회자되지는 않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들이 우리를 함부로 건들지 못한 것은 우리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탓이겠지요. 열 명이나 되는 마존급 수사들이 동행하고 있으니 마계의 강력한 세력 출신이라 혼동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이후로는 수존전이 우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더욱 주의를 기울이겠지요.”

    “그럼 그냥 저들을 돌려보내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괜히 변수로 작용하게 두는 것보다는 저와 한 형이 힘을 합쳐 제거하지요.”

    엽 수사의 눈빛이 순간 서늘해졌다.

    “소용없을 겁니다. 화형 마수라 평범한 마존들보다 강해 저도 죽일 자신이 5, 6할 밖에는 되지 않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수존전이 장로들을 파견했다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수존전이면 마계에서도 꽤 큰 세력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이 우리를 조사하기 시작하면 행적을 감추기 어려울 겁니다.”

    “마음대로 하라지요! 마계는 영계보다 거대합니다. 수존전에서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마존이 한둘도 아니니 그저 의심스러운 무리라는 인상을 심어준 것이 전부일 겁니다.

    그들이 뭔가를 눈치 채고 조사에 들어가는 것은 몇 년 후의 일일지도 모르고요. 그때는 우리가 일을 마치고 영계에 돌아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앞으로 더욱 조심해서 상대에게 빌미를 주지 않은 것이 좋겠습니다.”

    여인의 걱정에 한립이 생각한 바를 들려주었다.

    “하아, 그러기를 바라야겠군요. 우리가 하려는 일도 순조롭게 풀려야 할 텐데요.”

    “선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저는 저들이 언급한 거사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거짓처럼은 들리지 않았는데요.”

    “설마 마족들의 영계 침입과 관련된 일은 아니겠죠? 벌써 승패가 갈렸다던가…….”

    한립의 말에 여인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환소사막을 지나느라 오랫동안 영계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야겠지요. 이번 마을에서는 서둘러 떠나느라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으니 다음에 도착하는 성에서는 관련 소식을 수소문해 봅시다.”

    여인과 달리 한립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는 인족, 영족을 비롯한 여러 종족들이 충분히 대비했을 거라 믿었다. 밀리고 있는 것이라면 몰라도 겨우 수십 년 만에 전쟁에서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마계에 진입한 이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영계를 침략한 것은 마계의 일부 세력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세력들은 그 전쟁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한립도 의문이었다. 한립은 엽 수사와 함께 다시 검은 배에 올랐다.

    * * *

    그 시각, 농 가 노조와 휘 장로가 암녹색 호수 위를 쏜살같이 지나 검은 기운 두 덩이와 멀어지고 있었다.

    “수존전 무리에게 걸리다니 피곤하게 되었습니다.”

    농 가 노조가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농 형! 저들도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으니 겨우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겠지요. 어서 갈 길이나 가시지요. 마원해에만 이르면 수존전이라고 우리를 어쩌겠습니까. 만수 성조가 직접 우리를 뒤쫓을 것도 아니고요.”

    휘 장로는 가볍게 냉소했다.

    “만수 성조가 우리를 직접 상대하지는 않아도 화신을 보낼 수는 있는 일입니다.”

    “그럴 리가요! 우리가 의심스럽기는 해도 성조급이 경계할 정도는 아닙니다.”

    농 가 노조의 걱정에 휘 장로의 표정도 달라졌다.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이니 전속력으로 이동합시다.”

    “알겠습니다!”

    휘 장로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 *

    천추성녀와 ‘지수’라는 영족 청년이 무표정하게 공중에 떠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색과 붉은색 피부를 지닌 두 명의 마족 존자가 창백한 얼굴로 그곳에 떠있었다. 영족 청년을 쳐다보는 그들의 눈에 희미하게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 * *

    한립과 엽 수사는 보름 넘게 날아가 작은 마족 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며칠을 머물며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했다.

    수십 년 동안 인족은 다른 종족들과 연합해 마족과 몇 번이나 대규모 전투를 치렀다. 마족 성조가 영계에 강림한 후로는 인근 종족의 대승기 수사가 나섰고 그 후 한동안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소식에 한립과 엽 수사는 크게 안심했다.

    시장에서 떠도는 소문이라 전부 대략적인 것이었고 착오도 있을 테지만 전쟁의 승패까지 잘못 전해질 리는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검은 배를 타고 길을 재촉했다. 청익족(靑翼族)이 거주하는 철사령(鐵沙嶺)을 향해.

    * * *

    이번에는 아무 탈 없이 세 달을 넘게 날아가 새까만 산맥에 도착했다. 수목은 물론 산의 바위까지 전부 암녹색으로 어두침침해서 거대한 마물이 엎드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산맥이었다.

    “여기가 바로 철사령이군요. 다른 곳과 다르기는 합니다. 마기가 농염해 적잖은 마수들이 살고 있겠군요.”

    한립이 배 앞머리에 서서 산맥을 응시했다.

    “청익족은 본래 마수를 부리는데 능한 데다 철사령에서 끊임없이 마수를 조달할 수 있어 이렇게 넓은 영지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라지요.”

    “마수라는 외부적인 힘을 빌려야 한다면 본연의 수행은 그다지 높지 않겠습니다.”

    “평범한 청익족들은 그렇습니다만 저희가 노리는 핵심 족인들은 아마 그리 약하지 않을 겁니다. 청란혈맥을 계승한 자들이니까요!”

    “성조화신까지 상대할 결심을 했는데 핵심 족인들 정도야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산채를 형성해 군집 생활을 하는 풍습은 문제가 되겠습니다. 마땅한 목표를 찾아내려면 수를 써야겠어요.”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니까요. 다른 이들과 맞춰 합류하려면 기껏해야 한 달밖에는 시간이 없는데 말입니다.”

    엽 수사도 머리가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자께서 특별히 제련한 감응 법기를 가져오셨으니 한 달이면 충분할 겁니다. 목표와 10리 이내로 가까워지면 감응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기는 한데 엄중한 보호를 받고 있을 청익족 핵심 족인들에게 접근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무턱대고 몇몇 대형 산채를 수색해야 할지도 모르고요.”

    “능원 성조 화신이 머무는 곳에만 침입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능원 성조 화신이 어디에 머무는 지 알 수 없어 아쉽습니다. 그것만 알아도 멀리 피해갈 텐데요.”

    웃음을 머금은 한립을 보고도 엽 수사는 여전히 우려를 드러냈다.

    “저도 성조 화신에게 들키지 않고 일을 마치기를 기대하지만 결국에는 하늘의 뜻에 따라야겠지요. 뭔가를 얻으려면 마땅히 감수해야할 위험이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공짜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이 아닙니까?”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저 혼자였으면 잔뜩 겁을 먹었겠지만 한 형이 계시니 든든합니다. 이제 철사령으로 들어가실까요? 이제는 마기를 거두고 은신술을 펼쳐야 합니다.”

    “그러시죠.”

    한립이 엽 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배에서 내렸다.

    닷새 후, 한립은 협소한 계곡 중간을 쾌속으로 지나고 있었다. 그의 신형은 흐릿했지만 속도가 무척 빨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엽 수사가 보이지 않았다.

    산맥에 들어선 후에는 각자 행동하기로 정한 것이다.

    끼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협곡의 끝이 보이고 한숨을 돌리려는데 돌연 양쪽의 절벽의 동굴에서 날카로운 새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열댓 마리의 청록색 깃털을 지닌 거대 마조(魔鳥)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그를 향해 쇄도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섯 손가락을 튕겼다.

    휘휘휙!

    손끝에서 푸른 실들이 뻗어나가 사라졌고 열댓 마리 마조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렸다.

    * * *

    외진 산골짜기 인근.

    엽 수사가 골짜기 밖 수풀에 숨어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골짜기 입구는 낮은 덤불과 잡초로 황량했고 사람이 드나드는 흔적도 없었지만 소녀는 한 시진 넘게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곳을 주시했다.

    파앗!

    갑자기 골짜기 입구 위로 무형의 파동을 가르고 가죽 장포를 입은 마인 둘이 등장했다.

    그들은 신중하게 주위를 살피더니 이상이 없자 날개를 펄럭여 날아올랐고, 순식간에 검은 점으로 변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켜보던 엽 수사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고 그녀도 수결을 맺어 그 자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 * *

    한식경 후, 산골짜기와 멀리 떨어진 동굴 안에서 엽 수사는 날개 달린 마인의 머리를 쥐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하게 오색 기운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강력한 추혼술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옆에는 다른 마인이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엎어져 꼼짝 않고 있었다.

    털썩!

    그녀의 얼굴에 오색 기운이 가시고 손에 들려 있던 마인도 바닥으로 쓰러졌다.

    “거긴 청익족의 외부 산채에 불과해서 핵심 족인이 거주 하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대형 산채를 위주로 탐색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 전에 한 수사에게도 소식을 알려야겠군.”

    그녀는 하얀 원반을 꺼내 손끝으로 그 위를 두드렸다.

    펑!

    원반 표면에 하얀빛이 폭발해 은색 글자 몇 개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두 마인을 서늘하게 훑었다.

    * * *

    저공비행을 하던 한립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하얀 원반을 꺼내 들었다. 그 위로 떠오른 은색 문자를 확인하고는 그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곧바로 방향을 바꿔 다른 곳으로 쇄도했다.

    * * *

    보름 후, 세 개의 산봉우리가 둘러싼 작은 분지에서 한립과 엽 수사가 나란히 거목의 가지 위에 서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산봉우리 사이로 짙게 깔린 안개를 향해 있었고 산바람이 불 때마다 안개 속에서 정체 모를 향기가 풍겼다.

    “이곳이 청익족 4대 거주지 중 한 곳인 훈향채(薰香寨)란 말입니까?”

    “틀림없습니다. 청익족인 두 명에게 추혼술을 써서 알아낸 사실이니까요. 그들은 수행이 높지 않아 훈향채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지만, 이 정도 규모면 반드시 청익족 핵심 족인도 머물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강력한 금제가 펼쳐져 있어 잠입하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한립의 물음에 깃털 옷 소녀가 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안개 속에서 풍기는 향기로 보아 이곳이 맞기는 한 것 같습니다. 제게 잠입할 방법이 있기는 한데 적당한 때에 사용해야 하니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어떤 방법일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고민하던 엽 수사는 크게 기뻐했다.

    반나절 후, 하늘 밖에서 파공음이 들리고 커다란 날개 달린 뱀이 날아들었다.

    거대 뱀의 등에는 일고여덟 명의 청익족 마인들이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노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젊은 남녀 수사들이었다.

    “때가 됐습니다. 가시지요.”

    거목의 가지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립이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깃털 옷 소녀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무언가를 방출했다. 엽 수사가 움찔하며 손을 뻗어 보라색 부적을 받아들었다.

    “부적을 발동해 저들 뒤를 따라가면 산채 안으로 잠입할 수 있을 겁니다. 훈향채에 특수한 금제가 펼쳐져 있지만 않으면 절대 들킬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적을 발동한 뒤에는 다른 특수한 신통을 금해야 하니 유의해 주십시오.”

    한립은 설명을 마치고 똑같은 보라색 부적을 꺼내 자신의 몸에 붙였다. 그러자 보라색 빛이 터져 나와 무수히 많은 주술문자로 변하더니 한립의 신형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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