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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19화 (976/2,000)
  • 1219화. 앞길을 가로막다

    *

    몇 시진 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산 위에 검은 배가 멈춰 섰다. 그 앞에 짙은 눈썹 거한과 중년 도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립과 엽 수사가 배 앞머리에 나타나 무표정하게 그들과 대치했다.

    “두 분께서 갑자기 길을 막아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요?”

    눈을 반짝인 한립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두 분의 기세가 남다른 것을 보고 실력을 겨뤄보고 싶은 마음에 따라왔습니다.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중년 도사는 안색도 변하지 않고 뻔뻔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실력을 겨뤄보기 위해 저희를 막아섰다고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습니까.”

    엽 수사의 맑은 눈에 은은히 노기가 어렸다.

    “맞습니다. 기운을 숨기고는 있지만 선자께서는 정말 연허기 수사도 아니지 않습니까? 부족하지만 빈도와 서로 실력을 겨뤄보면 서로의 수련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침 제 동료도 옆의 수사께 관심을 보이고요.”

    중년 도사가 느긋하게 답했다. 엽 수사가 얼굴을 굳히고 슬쩍 한립의 표정을 살폈다.

    “두 분이 마을에서부터 저희를 주시하고 계셨군요.”

    그는 전광석화처럼 등 뒤에서 무언가를 낚아챘다. 녹색 빛 속에서 콩알 크기의 반투명한 영충이 깜빡깜빡 거렸다. 그걸 본 중년 도사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여유를 잃지는 않았다.

    “역시 신통이 뛰어나십니다. 혹시 두 분을 놓칠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흥, 언제까지 헛소리를 하실 생각입니까. 당신들의 도발에 우리가 먼저 공격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순간 눈빛이 흉흉해진 한립은 붉은 화염을 일으켜 영충을 재로 만들었다.

    “크크큭, 그게 당신들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을 주시하던 짙은 눈썹 거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엽 수사가 뭐라 쏘아붙이려는데 한립이 팔을 들어 말렸다.

    “실력을 겨뤄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진다면 시비를 건 진짜 이유를 말해야 할 것입니다. 억지로 힘을 쓰게 하고 그 이유도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들을 결코 살려 보내지 않을 테니까요.”

    냉랭한 한립의 경고에 중년 도사와 거한의 얼굴도 굳었다. 상대가 대놓고 발산하는 살기로 보아 농담으로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알겠습니다. 두 분이 저희를 이기면 빈도가 사실대로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중년 도사는 과감히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두 분과 겨뤄볼까요? 엽 선자께서는 잠시 물러나 계셔도 됩니다.”

    한립이 깃털 옷 소녀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한 형! 그러지 말고…….”

    놀란 소녀가 말리려는데 귓가로 그의 전음이 들려왔다.

    “엽 선자께서는 마공을 주 수련 공법으로 익힌 적이 없어 저들과 싸우다가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저들은 제가 쫓아버리지요.”

    “그건…….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한 형께서 수고를 좀 해주세요.”

    깃털 옷 소녀는 걱정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성조 화신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환소사막에서 대단한 실력을 지닌 것을 직접 보았기에 믿음이 갔던 것이다.

    이에 한립은 짧게 한숨을 쉬고 범성진마공을 발동하는 동시에 발끝에서 정순한 마공을 뿜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검은 구름에 몸을 실은 그가 표표히 고공으로 떠올랐다.

    그 모습에 짙은 눈썹 사내가 노란 빛덩이로 변해 고공으로 치솟았다. 순식간에 수천 장 허공에서 적과 대면한 한립은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색 법상을 불러냈다.

    흉악하기 그지없는 금색 법상은 검은 문양으로 뒤덮여 있었다.

    “수사 혼자서는 제 적수가 될 수 없을 테니 동료를 부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우우웅!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의 마기가 진동했다.

    콰콰콰쾅!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폭음이 터진 법상의 여섯 손에 도(刀), 검(劍), 지팡이(杖), 고리(環), 절굿공이(杵), 손잡이가 달린 기다란 사각 봉 형태의 무기인 전권(鐧)이 나타났고 세 개의 머리에 제3의 눈에 나타나 괴이한 검은 빛을 뿜었다.

    합체 후기의 기운을 숨김없이 드러낸 한립은 강력한 기세로 거한을 압도했다. 동급 수사를 월등히 초월하는 수행에 범성진마공의 위력이 더해져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거한이 기겁하며 뒤로 튕겨나가 얼굴색이 달라졌다. 그는 합체 중기의 마존이었는데 기이하게도 검은 기운 속에 은색 실들이 어른거렸다.

    “상대가 너무 강해서 저 혼자서는 안 되겠어요. 냉 형, 같이 칩시다!”

    거한이 중년 도사를 향해 외치며 기합을 넣었다. 그러자 땋은 머리들이 꼿꼿이 서고 피부가 은처럼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거한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코가 매의 주둥이처럼 변하고 머리 위로 은색 깃털들이 솟아났다.

    “호오, 화형기 마수 출신의 마존들이셨습니다!”

    그것을 본 한립이 탄성을 내뱉었다. 극악한 마계에서 화형을 한 마수가 마존이 되면 동급 수사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들이 배짱 좋게 그들을 막을 만 했다.

    중년 도사도 그의 무서운 기운을 감지하고 호랑이 머리에 사람 몸을 한 마물로 변해 거한 옆으로 날아올랐다.

    “수사께서 아주 비범한 수행을 지니셨군요. 저희 본체는 마수가 맞지만 수사의 기운이 강력해 어쩔 수 없이 협공해 싸워야 할 듯합니다. 허나 걱정은 마시지요. 승패를 떠나 싸움이 끝나면 빈도가 수사께 진상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년 도사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만, 일단 싸워보고 이야기 하시지요.”

    한립의 등 뒤에서 금색 법상이 여섯 팔을 움직였다. 그러자 여섯 개의 병장기들이 대량의 금빛을 방출했다.

    여섯 덩이의 금빛이 모여 거대한 파도를 만들고 두 마물을 향해 밀려들었다. 금색 파도가 지나는 곳마다 허공이 바르르 떨려 공간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크큭, 갑니다!”

    짙은 눈썹 거한이 금색 파도를 향해 은색 주먹을 날렸다.

    펑! 펑!

    은색 주먹에서 엄청난 기운이 뭉쳐져 금색 파도와 충돌했다. 굉음이 터지고 두 은빛 덩이는 흩어졌지만 금색 파도는 절반 넘게 남아 넘실거렸다.

    이때, 거한 옆의 중년 도사 마물이 입에서 녹색 화염을 뿜었다.

    화르륵!

    화염은 녹색 화염 호랑이로 변해 위풍당당하게 금색 파도를 갈랐다. 금색 파도를 조각낸 호랑이는 펄쩍 뛰어 중년 수사의 머리 위로 돌아갔다.

    “아껴둔 신통이 있으면 마음껏 펼쳐 보시지요! 이런 탐색전은 저희에게 통하지 않을 겁니다. 서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서야 쓰겠습니까!”

    짙은 눈썹 거한이 큰 소리로 외쳤고 중년 도사 마물도 말리지 않았다.

    “옳은 말씀입니다. 두 분께서 본모습까지 보여주셨는데 저도 제대로 싸워드리지요.”

    “크크큭, 그럼 저는 새로 깨우친 만허검(万虛劍) 펼치겠습니다!”

    그 말에 거한은 들뜬 모습으로 열심히 수결을 맺었다. 그의 등 뒤로 펑! 하고 은색 날개 한 쌍이 튀어나와 수많은 깃털들이 검으로 변해 쏘아져나갔다.

    쉬쉬쉬쉬쉭!

    파공음이 들리며 한립 머리 위에서 대량의 검빛이 거대한 산 그림자를 이뤄 떨어져 내렸다.

    중년 도사 역시 머리에 앉은 녹색 화염 호랑이를 날려 보냈다. 처음 공격 때보다 열 배나 불어난 호랑이가 한립을 향해 입을 벌렸다.

    콰르릉!

    굵은 녹색 빛기둥이 화염 호랑이의 입을 빠져나와 쏘아져나갔다. 그때 한립 뒤에서 법상이 제3의 눈으로 새까만 실을 한줄기 분출했다.

    이에 가느다란 검은 실과 굵은 빛기둥이 충돌했는데 아무 소리도 없이 두 기운이 동시에 사라졌다.

    그 모습에 중년 도사가 깜짝 놀라고 있을 때 거한이 쏘아 보낸 수천 개의 검빛이 한립을 덮쳤다. 강한 몸뚱이라도 중상을 면치 못할 공격이었다.

    한립이 눈을 번득인 순간 범성법상이 던진 여섯 병장기들이 빠르게 산 그림자를 갈랐고 법상의 여섯 손이 주먹을 쥐고 천천히 고공을 쳐올렸다.

    후우웅!

    허공에 파문이 일고 금색 주술문자들이 날아올라 거대한 금색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한립의 손끝이 소용돌이로 향하자 저항할 수 없는 괴력이 뿜어져 나왔다.

    콰르르릉!

    산 그림자를 이룬 무형의 은색 검기들과 괴력이 충돌해 엄청난 굉음이 터졌고, 주변 마기가 인근에서 미친 듯이 몰려들어 광풍이 불고 있었다.

    “동선마광(洞漩魔光)!”

    중년 도사가 놀라 소리를 높였고 짙은 눈썹 거한도 그걸 보고 겁에 질렸다. 한립은 그 소리를 듣고도 입 꼬리를 살짝 꿈틀했을 뿐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이제 한립과 두 화형 마물은 더 이상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 콰르릉 거리는 고공만을 쳐다보았다.

    * * *

    일다경 후, 하늘에는 금색 소용돌이와 은색 산 그림자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동선금광의 위력을 2, 3할 밖에 발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평범한 합체 중기 수사가 가볍게 막을 공격이 아니었다.

    한립이 놀라는 동안 거한과 중년 거한은 재빨리 전음으로 상의를 마치고 돌연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중년 도사가 그를 향해 정중히 포권을 했다.

    “동선마광 같은 강력한 신통을 장악하신 수사를 상대로 더 겨뤄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희 실력이 부족함을 인정하겠습니다.”

    “맞습니다. 마공을 극성으로 수행한 수사의 실력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거 참, 천외천(天外天), 산외산(山外山)이라더니 옛말이 틀린 것 하나 없습니다!”

    거한도 한껏 웃음을 머금었다.

    “두 분의 실력도 대단하십니다. 이제 저희를 가로막은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한립이 법상을 거두고 빙긋 웃었다.

    “물론이지요! 수사께서는 수존전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중년 도사가 머뭇거리지 않고 반문했다.

    “명성이 자자한 수존전 같은 거대 세력을 어찌 들어보지 못했겠습니까! 설마 두 분은 수존전에서 나오신 것입니까?”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는 머릿속으로 수존전에 관한 정보를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수존전(獸尊殿)’은 이름 그대로 화형 마수들 위주의 마족 존자들이 모인 초대형 세력이었다. 심지어 만수(萬獸) 성조(聖祖)가 버티고 있는 곳이라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농 가 노조가 신신당부 했었다.

    다른 성조들과도 거의 교류가 없는 만수 성조는 대승기 화형 마수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거한과 도사가 수존전 출신이라니 가슴이 철렁했다.

    “하하, 수사께서 잘 알고 계시다니 본 전에서 객경 장로가 되시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한립은 중년 도사의 제안에 다시 한 번 움찔했다.

    “아……. 제가 수존전에 가담하기를 청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수사의 실력이면 본 전에서 빈도보다 더 높은 지위를 누릴 것이고, 만수 성조께서 친히 지도해주시면 수사의 수련과 앞날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저희를 막아선 것이 회유하기 위해서는 아닐 거라 봅니다. 수존전(獸尊殿)의 위명(威名)을 오래도록 들어왔지만 지금은 그 어떤 세력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뜻이 맞는 수사를 모집해 대사(大事)를 도모하고 있는 중이라 서요. 본 전에 들어오신다면 결코 후회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립의 거절에 중년 수사가 다시 권했다.

    “호의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희는 어느 세력에 들어가 구속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수사가 단호하게 거절을 하시니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수십 년 전 수존전에 누군가 거액을 걸고 일을 맡겼기 때문이지요.

    수사 일행이 환소사막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으셔서 이제야 그 일을 수행중입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수존전이 돈을 받았다고 해도 수사들에게 위해를 끼칠 계획은 아니었으니까요.

    보수에 맞게 급에 맞는 인물들이 나서서 실력이나 겨뤄보는 정도였지요. 심지어 수사처럼 실력이 뛰어난 경우에는 수존전에 들어올 것을 제안하기도 하고요.”

    중년도사가 드디어 진짜 목적을 말해주었다.

    “그랬군요. 수존전도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움직인 것이었군요. 그럼 의뢰인이 누구인지 귀띔해 주실 수도 있습니까?”

    엽 수사가 표표히 날아올라 한립 뒤에서 빙긋 웃었다.

    “그건 빈도의 능력 밖입니다. 첫째로 본 전에는 의뢰인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고, 둘째로 의뢰 자체가 익명으로 들어온 것이라 누가 값을 치른 것인지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제 동료들도 지금 수존전에서 파견한 수사들을 만나고 있겠군요.”

    한립이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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