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217화 (974/2,000)

1217화. 수존전(獸尊殿)

*

며칠 후, 환소사막 변두리의 모래 언덕에 팔족마석 두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도마뱀 마수 위로 푸른 장포의 한립과 늙은 유생 장형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들은 조용히 앉아 뭔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야성 방향에서 빛줄기들이 날아들었다.

한립과 노인 유생은 빛줄기를 주시했다.

“일을 잘 마치셨나 봅니다.”

모래 언덕에 내려온 엽 수사, 천추성녀 등을 확인한 한립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존이 자리를 비운 마당에 겨우 금제로 우리를 막을 수는 없지요. 총 여덟 마리를 확보해 한 사람당 한 마리씩 나누고도 예비로 한 마리 남겨두었습니다.”

엽 수사는 마음이 한결 편해 보였다.

“잘 되었군요. 이제 농 형과 백척 수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합체 후기의 신통을 지닌 두 분이니 마존 두 명을 따돌리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고 무의식적으로 지수라는 영족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족 성령의 음한(陰寒)한 기운이 한층 깊어져 있었다.

“허허, 진작 따돌리고 오는 길입니다!”

고공에서 홀연히 농 가 노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공간에 파동이 일고 농 가 노조와 하얀빛 그림자가 등장했다.

“농 수사가 도착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조 가의 두 마존들은 어찌 처리하셨는지요?”

“안심하셔도 됩니다, 한 형! 진법으로 유인해 가둬놓았으니 꼬박 하루는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하얀빛 속 백척이 답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다들 모였으니 팔족마석을 방출해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천추 수사의 말씀대로 하지요.”

천추성녀의 말에 엽 수사가 동의하고 팔족마석들을 풀어놓았다. 도마뱀 마수를 탄 일행은 곧장 환소사막으로 진입해 모래 바람 속을 질주했다.

* * *

하루 뒤, 파공음이 들리고 두 개의 검은 빛이 날아들었다. 마른 금포 노인 두 명이 살기 어린 표정으로 한립 일행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기운으로 보아 이곳에서 머물다 환소사막으로 들어갔구나!”

그들 중 한 명이 모래 언덕을 살피고 난색을 표했다.

“한두 명의 기운이 아닙니다. 팔족마석을 훔쳐간 무리와 한패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 다른 노인이 대노해 소리쳤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환소사막으로 향한 것을 보면 누군가 우리 조 가의 팔족마석들을 노리고 꾸민 짓이 확실하다.”

“도적놈들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감히 우리 가문을 약탈하다니 반드시 보복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환야성에서 앞으로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보복? 내 보기엔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게다. 우리를 유인한 수사들만 해도 정말 연허기 수준의 수사는 아니었을 게야.”

연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형님 말씀은 그 둘이 마존급 수사이고 조 가에 침입한 이들도 그럴 거란 뜻입니까? 하긴 그러니 조 가의 금제를 아무렇지 않게 무력화시키고 팔족마석들을 데려갔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많은 노괴들이 환야성에 들어온 것을 어찌 아무도 몰랐단 말입니까?”

“그건 확실치 않다. 도적질을 한 것은 두 녀석의 수하들일 수도 있고 말이야. 어찌 됐든 그들이 이미 환소사막 깊은 곳까지 달아나 버렸으니 원수를 갚을 일이 막막해졌다. 저들에 관해 소문이 돌지 않은 것은 상대가 정체를 숨기고 다녔거나 성 밖에서 머물렀다면 이상한 일도 아니고 말이다.”

“이대로 손 놓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형님!”

“도적들은 가문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고 저계 제자들 몇만 죽이고 조용히 빠져나갔다. 잃어버린 마수들이 귀하기는 해도 가문이 흔들릴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은 아니란 것이지! 가문의 명성이야 돌아가서 눈에 거슬리던 녀석들을 몇 명을 잡아 죽이고 그들이 도적들과 한패였다고 공표하면 될 것이야.”

“그래봐야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이 울분을 어디에다 풀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우 노인이 발을 동동 굴러냈다.

“참아야 한다! 우리는 조 가의 단 둘 뿐인 마존이다. 너와 나 누구에게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날로 가문의 쇠락이 시작될 것이야. 정 분풀이를 하고 싶다면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 훨씬 안전할 테지.”

“남의 손을요?”

“그래, 수존전(獸尊殿)에 연락을 해라. 우릴 대신에 나서주는 대가로 그간 모아둔 대량의 마석을 내준다고 하고! 미리 당부해둘 것은 수존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다른 세력을 고용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의뢰할 때 우리의 신분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노인은 정색하고 경고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수존전 무리가 나서면 저들을 죽이지는 못해도 껍데기는 벗겨 놓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마석을 그렇게 많이 주고 나면 한동안 가문의 사정이 어려워지겠습니다.”

“그곳 노괴들의 수행은 하나같이 너와 나를 웃돈다. 그러니 그들을 고용하는 대가치고 높다고 볼 수는 없지. 그러나 환소사막까지 추격해달라고 하는 것은 어려우니 저들이 돌아 나올 때를 기다리자꾸나.”

“그것도 좋겠습니다! 수존전에서 사람을 파견해 환소사막 인근의 몇몇 성들을 감시하면 될 겁니다. 그나저나 도적놈들이 뭐 하러 환소사막으로 들어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어차피 마석을 들이기로 한 것 조금 더 지출해도 크게 상관없다. 기한은 백 년 정도면 충분할 것이야. 백 년이 지나도록 놈들이 나오지 않으면 수존전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일 테지만 말이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당장 돌아가 계획대로 움직이자.”

노인이 마지막으로 사막을 훑으며 말했고 즉시 마기를 일으켜 환야성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그 뒤를 노인의 아우가 뒤따랐다.

조 가의 두 마존들은 조사 끝에 이 일이 한립의 실종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증거가 없어 대놓고 떠들지는 못했다.

시간이 흘러 몇 해가 지나갔고 환야성은 여전히 네 개의 가문이 명성을 떨쳤기에 더 이상 조 가 약탈 사건을 언급하는 이는 없었다.

* * *

40년의 세월이 지났다.

환소사막의 황량한 변두리에 모래 바람을 뚫고 마수 몇 마리가 튀어나왔다. 복부에 여덟 개의 짧은 다리가 자라난 거대 도마뱀은 총 아홉 사람을 태우고 있었다.

수십 년 전 환야성을 출발해 환소사막으로 들어온 한립 일행이었다.

처음 열 마리였던 도마뱀 마수들은 다섯 마리로 줄어 수사들은 마수를 함께 타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일행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아, 드디어 이 빌어먹을 사막을 벗어납니다! 수십 년 동안 똑같은 풍경만 보고 있자니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이었어요. 백년 넘게 폐관수련을 해도 이것보다 답답한 적이 없었습니다.”

엽 수사의 거친 말투에서 고단함이 느껴졌다.

“사막을 수십 년이나 내달리는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기는 했습니다. 환소사막 3대 재앙이라는 것들도 수차례 마주쳐 팔족마수도 절반이나 잃었고요.”

엽 수사의 뒤에 앉은 천추성녀가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합체 후기의 사영수(沙影獸)가 끈질기게 몇 년을 추적하던 때가 가장 위험했습니다. 한 수사께서 마지막에 마수를 죽이지 않았으면 사막을 벗어나지도 못했을 것이에요.”

천추성녀는 갑자기 한립을 슬쩍 보고 덧붙였다.

“아닙니다! 지수 수사께서 강력한 신통으로 사영수를 붙들어 주지 않았으면 저도 죽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한립은 오히려 영족의 청년을 보고 눈을 빛냈다.

“허허, 신출귀몰한 사영수를 죽인 데는 한 형과 지수 수사의 공로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환소사막도 빠져나왔으니 예정대로 흩어져 움직이시지요.”

농 가 노조가 팔족마석들을 회수한 후 웃으며 말했다.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모래 바람으로 가득한 왔던 길을 되돌아본 한립이 미소지었다.

환소사막은 평범한 마족들에게는 극히 위험했지만 합체기 수사 무리에게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저 사막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무렵 은신술이 비상한 마수를 죽이느라 숨겨왔던 신통 일부를 노출한 것이 달갑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 후 농 가 노조 등 세가 수사들은 물론이고 천추성녀와 다른 성령들도 그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조심스러워졌고 은근히 경계하는 기색도 보였다.

성령들도 농 가 노조의 말에 반대하지 않아 그들은 몇 개의 무리로 갈라져 다른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누군가 추적할 경우를 대비해 환소사막에서 마원해까지는 따로 행동하기로 한 것이다.

* * *

농 가 노조는 여전히 휘 수사와 함께였고 한립은 엽 수사와 동행했다. 영족은 성녀와 백척을 주축으로 두 무리로 나뉘었다.

파앗!

한동안 한립을 따라 날아가던 엽 수사가 둔광을 멈추고 소매 속에서 검은 선박을 불러냈다. 새까만 선박 형태의 마기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다.

“혈아성에 구한 비행마기, 흑옥주(黑玉舟)입니다! 속도도 느리지 않고 다른 이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을 듯해서요.”

“쓸 만해 보입니다. 선자께서 생각이 깊으십니다.”

선박을 살핀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한 형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요. 배에 올라 잠시 이야기나 나누실까요?”

소녀가 노란빛을 방출해 꼭두각시를 세워 두고 선박 중간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를 대신해 배를 조종하게 할 요량이었다.

한립도 고개를 끄덕이고 배에 올라 선실로 들어갔다. 탁자와 의자 그리고 침상이 갖추어진 공간에는 검은 방석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은 후 소녀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은 다른 수사들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기가 불편했는데 이제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저희가 가야 할 경로에 관한 이야기인데 다른 이들에는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오,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겠습니다.”

한립은 엽 수사가 주동적으로 경로를 고르고 자신을 일행으로 선택한 것을 떠올렸다. 그녀와 관계가 나쁘지 않았고 어떤 경로든 상관없었기에 그도 고민하지 않고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

“천봉진혈을 지니고 계시지요? 천연성에서 마족과 벌인 전투 이야기를 들었으니 아니라 하실 것 없습니다. 수사의 변신술을 본 이들이 한둘도 아니고요. 게다가 엽 가에서 전승되는 비술로 희미하게나마 한 형에게서 천봉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 외에 정확히 구별할 수는 없어도 한 형께서 체내에 다양한 진령의 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엽 수사는 한립이 놀랄만한 말을 거침없이 뱉었다.

“엽 선자께서 알고 계신다니 저도 속이지 않겠습니다. 만황을 돌아다니며 이종족에서 여러 기연을 얻어 진령의 피들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일을 언급하는 까닭을 여쭈어도 될 지요?”

“진혈을 어디서 난 것인지 따지려는 것이 아니니 걱정 마세요. 기왕 여러 진령의 피를 융합할 방법을 찾으셨으면 다른 진령의 피에도 관심이 있으시겠지요.”

“엽 선자께서 다른 진령의 피를 지니고 있기라도 한 것입니까?”

“아직요! 하지만 앞으로 가게 될 곳에 진령의 피가 있습니다.”

“그게 어딥니까?”

“철사령(鐵沙嶺)이란 곳입니다.”

한립의 질문에 소녀가 뜸들이지 않고 답했다.

“철사령은 청익족(靑翼族)의 영지로 알고 있습니다. 진령의 피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닌데요.”

“그리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마계의 청익족에도 특수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진령혈맥을 전승한다는 사실은 외부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요.”

“엽 선자가 말씀하신 ‘특수한 존재’라 함은…….”

“당연히 청익족에서도 핵심 인물들입니다. 청익족도 인족의 진령세가와 마찬가지로 모든 족인이 진령혈맥을 계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소수만이 그런 기연을 누리지요. 진령혈맥을 계승했다는 결과가 나오면 아주 소량이라도 청익족 내의 지위가 급상승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익족이 진령의 피를 지니고 있으면 그들을 노리는 자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핵심 족인들은 엄중한 보호를 받겠지요. 선자께서는 어찌 그들에게서 진령의 피를 얻을 수 있다 확신하십니까? 또한 엽 가는 이미 천봉진혈을 지니고 있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마 다른 진령의 피를 융합할 수 있는 비술을 알고 계신 것입니까?”

침음하던 한립이 연달아 질문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