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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16화 (973/2,000)
  • 1216화. 납치

    *

    임 수사의 일이 일단락되고, 농 가 노조는 그동안 조 가와 접촉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수사들의 얼굴이 어두웠다.

    “조 가의 횡포가 너무하군요! 팔족마석의 가격을 그리 높게 부르다니요. 만년 자혈지(紫血芝)와 빙정심(氷晶心)은 하나같이 구하기가 불가능한 재료가 아닙니까. 그들이 거래할 마음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천추성녀의 옥 같은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제가 보기에도 조 가는 애초부터 거래할 마음이 없는 듯합니다.”

    그때 한립이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한 형?”

    엽 수사가 말 속에 뼈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물었지만 한립은 그저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 가에서 노부에게 팔족마석을 팔 마음이 없을 뿐 아니라 제가 지닌 보물들을 노린다는 뜻이겠지요! 제가 앞서 제시한 조건이 조 가의 두 마존들의 마음을 흔들기는 했나 봅니다.”

    이번에는 농 가 노조가 냉소하며 대신 답했다.

    “하하, 농 형께서 생각해두신 바가 있는 것이로군요.”

    천추성녀는 가볍게 웃음 지었다.

    “그렇습니다. 조 가에서 팔족마석을 거래하기를 원치 않으니 다른 가문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래서 상대의 흉계를 역이용해 그들이 노부를 노리는 동안 다른 분들은 조 가를 급습해 팔족마석을 훔쳐 달아나는 것으로 하지요.”

    “마존급이 자리를 비우면 조 가에서 우리를 막을 자가 없겠네요. 그런데 어디서 팔족마석을 키우고 있는지는 알아내셨습니까?”

    엽 수사도 계획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허허, 노부도 그간 성에서 놀고먹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조 가에서 팔족마석을 기르는 장소는 두 곳인데, 그중 한 곳은 금제로 겹겹이 뒤덮인 금지라 건드리기 어렵고 다른 곳은 마수를 임시로 보관하는 곳입니다.

    알아낸 바로는 두 달 후 팔족마석 몇 마리가 가문으로 돌아오는 대로 관례에 따라 임시 우리에 며칠을 둘 거라 합니다. 그때가 적기겠지요! 한 형께서 이미 두 마리를 확보했으니 그것들만 차지하면 충분할 겁니다.

    주의할 것은 최대한 수행을 감추고 살생도 자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괜히 인근 세력의 실력자들이 우리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요. 우리가 환소사막을 가로지르는 동안 마족의 강자들은 거대성의 전송진을 통해 반대편에서 매복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조 가에 마존급이 버티고 있지만 않으면 저희도 합체기 수행을 드러낼 일은 없을 겁니다. 마수만 데려오고 불필요한 일은 최대한 자제하도록 하지요.”

    천추성녀가 자신 있게 답했고 한립과 엽 수사도 이견이 없었다. 그들은 세부사항을 논의하다 몇 시진 후 흩어졌다.

    * * *

    두 달 동안 한립은 누각에서 수련에 집중하며 약속된 날짜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농 가 노조가 보내오는 소식에 따르면 다른 일들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농 가 노조는 조 가의 수사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움직였고 조 가의 마존들이 직접 움직이도록 치밀하게 함정을 팠다.

    이날 누각에 앉아 있던 한립의 허리에서 웅! 하고 낮은 진동이 들리고 하얀빛이 날아올랐다. 그는 내용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각 1층에 이르자 대문 옆 탁자에 주과아가 멍하니 턱을 괴고 있었다. 소녀는 그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예를 올렸다.

    “오늘은 너도 따라나서거라.”

    “예!”

    한립의 명에 소녀는 기뻐하며 그를 따라나섰다. 그동안 누각에만 갇혀 지내느라 무척 답답하던 차였다. 그들은 성을 벗어나 둔광을 일으켜 이름 모를 산으로 날아갔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임 가의 산발사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머리카락이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고 안색도 훨씬 나아져 있었다.

    한립이 준 쉬정단 덕분이었다.

    “과연 시간에 맞춰 오셨습니다. 이 아이가 말씀하시던 후배입니까?”

    “맞습니다! 저와는 약간의 인연이 있는 아이라 수사께서 무사히 영계로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사께 단약까지 받았으니 무사히 영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며칠 내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괜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떠나는 것도 좋겠지요.”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다 고개를 돌려 주과아를 보았다.

    “이곳에서 나를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다. 여기 임 수사께서는 인족의 거대 세가 중 한 곳의 태상 노조로 너를 영계로 데려가 주실 분이시다!”

    “예? 그게 무슨…….”

    한립의 말에 주과아가 화들짝 놀라 무어라 물어보려는데 한립이 소매를 털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별안간 산 위에는 산발사내와 주과아만이 남고 말았다.

    “그리 넋 놓고 볼 것 없다! 한 수사에게 약속한 대로 내가 너를 영계로 데려다줄 것이다.”

    “여, 영계라면 선배님께서는 정말 인족이란 말씀이십니까? 한 선배님께서도 그럼…….”

    “하하, 나와 한 형의 신분에 너 같은 결단기 꼬마 계집을 속일 이유가 있더냐?”

    어리둥절한 소녀의 표정에 산발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 선배님께서 저와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는 또 무엇인지요?”

    “그건 나도 들은 바가 없다. 한 형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이 없더냐?”

    주과아의 질문에 산발수사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반문했다.

    “한 선배님께서 마족이 아니라는 것도 방금 알았는데 무슨 인연이 있는지 제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주과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한립이 처음 만났을 때 소녀륜회공에 관해 묻던 것을 떠올렸지만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산발사내는 그들의 관계가 내심 궁금했지만 꼭두각시가 끄는 새까만 비차를 불러내 소녀를 태우고 만황 방향으로 질주했다.

    * * *

    농 가 노조의 계획이 틀어지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기에 서둘러 환야성에서 멀리 벗어날 계획이었다.

    반나절 후, 비차는 높고 낮은 언덕들이 가득한 지역을 날고 있었다. 그때 임 수사의 귓가에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까지 왔으면 그만 내려오거라.”

    말이 끝나자마자 비차 위 허공에 파동이 일고 분홍색 꽃잎이 흩날렸다. 꽃잎들은 거대 손으로 응결해 비차를 잡아채려 했다.

    향긋한 냄새가 풍기고 하늘이 내려앉은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이 느껴졌다.

    “큰일이다!”

    임 수사가 대경실색해 다급히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다른 손으로 고공을 향해 펼쳤다. 이에 비차를 끌던 꼭두각시들이 일사불란하게 고개를 쳐들어 입에서 빛기둥을 뿜자 하얀 보호막이 펼쳐졌다.

    동시에 검은 기운이 맴도는 뼈칼이 튀어나가 섬뜩한 빛을 머금은 백골 거검으로 변해 분홍 거대 손을 갈랐다. 백골 거검이 지나는 허공은 쪼개지기라도 할 것처럼 쭈글쭈글 왜곡되었다.

    임 수사는 수행이 크게 준 상태로도 엄청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콰콰쾅!

    빛기둥들과 백골 거검이 분홍 거대 손과 충돌해, 굉음에 주변 허공이 웅웅 울어댔다. 빛기둥들은 분홍 기운에 휘말려 소멸했고 백골 거검은 불가사의한 압력에 산산이 갈라졌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임 수사가 더 강력한 신통을 펼쳐 거대 손을 막으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분홍 기운이 비차의 보호막을 찢고 날아들어 산발사내를 덮쳤고 기이한 향기에 그는 곧 정신을 잃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겁에 질린 주과아의 비명이었다.

    산발사내의 입가에 순간적으로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겨우 반나절 만에 한립에게 소녀를 안전히 영계로 데려다주겠다고 장담했건만 이제는 그의 안위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중상을 입어 법력 대부분을 잃지 않았으면 이렇게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 *

    한 시진 후 어둑한 밀림 안에서 임 수사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몸의 이상을 감지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 아래서 기이한 꽃들에 덮여 있는 그의 몸은 무력하기만 했고 단전이 텅 빈 것처럼 법력을 전혀 끌어올릴 수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인족 녀석이 깨어났습니다!”

    흠칫 놀란 사내가 서둘러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니 못생긴 흑갑 거한이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족 존자!”

    사내는 이미 예상한 듯 놀라지 않고 또 다른 거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홍색 꽃나무 허상이 아른거리자 하얀 치마를 입은 절세의 미녀가 번득 나타났다.

    ‘아!’

    눈을 감고 있던 백의 여인이 조용히 눈을 뜨고 시선을 맞춰온 순간 임 수사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경계심이 사르륵 녹고 심지어 상대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임 수사는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혀끝을 깨물어 피를 토해냈다. 통증과 함께 정신이 맑아지자 백의 여인의 시선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대승기 마족 성조!”

    그를 순간적으로 흔들어 놓을 만한 존재는 마족 성조밖에는 없었다.

    “성조라, 대충 그렇다고 치세. 물을 것이 있으니 사실대로 고하면 고통 없이 죽여 윤회할 길을 열어주겠네. 원치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쓴 후 혼백이 완전히 소멸하게 될 것이네.”

    백의 여인은 줄곧 한립 일행의 뒤를 쫓던 보화 성조였다.

    “선배님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괜히 버틸 생각도 없습니다. 묻고 싶은 것을 말씀해 보시지요.”

    임 가 수사는 자포자기해 힘없이 말했다.

    “현명한 판단이다.”

    보화 성조가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파앗.

    분홍색 빛덩이가 날아가 임 수사의 이마 속으로 스며들었다. 사내는 안색이 급변해 잠시 주저하다 결국에는 원신을 개방했다. 마족 성조가 약속을 지켜 윤회해 내생에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눈이 풀려 멍해진 사내의 이마에 분홍색 마문이 퍼져 반짝이기 시작했다. 옆에서 추한 거한이 그런 산발사내를 비웃는 기색으로 보고 있었다.

    일다경 후, 백의 여인이 무표정하게 수결을 맺었다. 임 수사를 구속하던 분홍 꽃나무에서 분홍 화염이 흘러나와 그의 육신을 재로 만들었고, 하얀빛만이 화염 속에서 멀쩡히 빠져나와 처량한 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보화성조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화염 속에서 분홍색 꽃 한 송이를 거둬들였다.

    흑갑 거한이 얼른 다가왔다.

    “쓸 만한 정보를 얻으셨는지요?”

    “저들이 성계로 온 목적은 알아냈네. 세령지와 정령련을 노리고 왔다는군.”

    “세령지와 정령련이요? 그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성계로 잠입할 만한 물건입니까?”

    보화성조의 말에 흑갑 거한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성계에서도 두 영물의 존재를 아는 이는 얼마 없지. 자네가 전혀 들어보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세.”

    “어떤 효과를 지녔기에 영계의 수사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입니까?”

    “영계의 수사들에게는 현묘한 효과를 발휘해도 우리 성족에게는 백해무익한 영물들이니 크게 관심 가질 것 없네.”

    거한의 마음을 꿰뚫어 본 보화성조가 담담히 조언했다.

    “뭐, 그렇다면 소인도 관심 끊겠습니다!”

    거한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목적을 알았으니 앞으로 어찌 움직일지 예상이 되네. 그들을 따라 환소사막으로 갈 것 없이 곧장 그들이 가려는 곳으로 가서 기다리지. 성계로 돌아온 김에 벗들을 몇 찾아가볼 생각이었는데 예정보다 일찍 만나게 되겠구만.”

    먼 하늘을 응시하는 보화성조의 눈이 반짝였다.

    “보화 대인께서 어디로 가시든 믿고 따르겠습니다!”

    “인족 계집아이는 쓸데가 있으니 해치지 말고 자네가 데리고 다니게.”

    “존명!”

    흑갑 거한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냉큼 허리를 숙였다.

    휘이잉!

    백의 여인이 환야성 방향을 힐끗 보더니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분홍 꽃잎들이 날아올라 바람기둥으로 변하자 흑갑거한과 주과아가 바람기둥으로 휙! 빨려 들어갔다.

    콰르릉!

    바람기둥이 폭음과 함께 분홍빛으로 흩어지고 세 사람도 자취를 감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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