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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15화 (972/2,000)
  • 1215화. 계획

    *

    농 가 노조가 반가운 얼굴로 안개 통로를 열어주었다. 갈라진 안개 틈으로 오색 깃털 옷을 걸친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여전히 새하얀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엽 선자, 오셨습니까. 시간이 걸린 것을 보면 환야성에 머물고 있지 않으셨나 봅니다.”

    “보름 전에 도착했는데 마공을 수련한 적이 없어 위마주만으로는 정체를 들킬까봐 성 밖에 머물렀습니다. 며칠 더 상황을 지켜보다 성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고요. 농 형과 휘 수사도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이런, 휘 수사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농 가 노조의 물음에 답하던 엽 수사가 검은 장포 사내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민망하게도 오는 동안 곡절이 많아 저와 휘 장로는 어제야 도착했습니다. 한 수사는 미리 와서 한동안 지낸 듯하고요. 휘 수사가 흡마의 마조 속에서 독에 당하는 바람에 제가 운공을 통해 회복을 돕느라 일정이 상당히 지체되었습니다. 다행히 휘 수사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어 지금은 괜찮습니다.”

    농 가 노조가 한숨을 내쉬며 사정을 설명했다.

    “흡마의의 독에 당해 이렇게 되셨군요. 저는 만황에서 이상한 곳에 잘못 들어 한동안 갇혀 있다 이제야 빠져나왔습니다. 운이 좋아 겨우 벗어났지요!”

    엽 수사는 아직도 간담이 서늘하다는 표정이었다.

    “저는 별다른 일 없이 몇 달 전에 환야성에 도착했습니다. 내내 성 안에서 머물렀고요. 그런데 영족 수사들과 임 수사가 아직 도착하지 못한 것이 의문입니다. 무슨 일을 당한 것은 아닐지…….”

    “아닐 겁니다. 임 수사는 여러 둔술에 능하니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충분히 달아날 수 있을 것이고 영족들은 무리지어 출발하지 않았습니까.”

    한립의 말에 농 가 노조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저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마계의 만황은 영계보다 훨씬 위험하던걸요. 저처럼 다른 분들도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엽 수사가 정색하고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직 약속한 기일이 남아 있으니 일단 기다려 보지요! 그리고 한 수사께서는 이미 성 안의 사정을 대충 파악하셨겠습니다. 대략적인 상황을 알려주시면 앞으로 팔족마석을 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농 가 노조가 화제를 바꿔 한립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환야성은 4대 가문과 만노탑 등의 세력들이 공존합니다. 팔족마석은 4대 가문만 소유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평범한 방법으로 구매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운 좋게 도착하기 전 백 가 인물들과 인연을 맺은 덕에 그들을 도와 성가신 일을 해결해 주고 팔족마석 두 마리를 구해놓았습니다.

    아무래도 백 가에서 더 많은 팔족마석들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고, 세 분들은 다른 가문에 접촉해보셔야 합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그중 저 가와 방 가가…….”

    한립은 거절하지 않고 아는 정보를 전부 말해주었다.

    한식경 후 환야성에 관한 정보와 그간 있었던 일을 들은 수사들은 한립이 팔족마석을 구했다는 대목에서 기뻐하다 각자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팔족마석을 구하셨다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팔족마석이 4대 가문의 기반이 된다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또 구체적으로 어느 가문에 몇 마리나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각 가문에 수십 마리밖에는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팔족마석을 중시하는 까닭은 마수를 이용해 환소사막을 자유롭게 오가기 위해서고요! 환소사막 깊은 곳에 진귀한 재료 산지들이 있어 운반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막 안에 막대한 이익이 될 재료가 쌓여 있는데 팔족마석은 몇 마리 되지 않으니 그들도 한 마리가 아쉬운 상황이지요.”

    농 가 노조의 질문에 한립이 차분히 답해 주었다.

    “한 형께서는 백 가를 위해 무슨 일을 해주셨기에 귀한 팔족마석을 두 마리나 얻으셨습니까?”

    말이 없던 엽 수사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부탁을 받아 사막에서 마수 한 마리를 해결해 주었을 뿐입니다. 아마 그런 상황이 다시 벌어지지는 않을 듯합니다.”

    “정말 운도 좋으시군요!”

    미소를 머금은 그를 향해 엽 수사는 부럽다는 얼굴을 했다.

    “하하,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노부도 마공을 주 공법으로 수련한 적이 있어 위마주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정체가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한 수사와 같이 성에 잠입할 것이니 현 수사와 엽 선자는 잠시 성 밖에 남아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기로 하지요.

    다른 수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팔족마석을 더 구할 수 있을지 알아보겠습니다.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으면 4대 가문 중 한 곳을 털어서라도 마수를 구해야겠지만 그럼 강적의 주의를 끌 테니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심사숙고하던 농 가 노조가 결정을 내렸다.

    “좋은 생각입니다. 환야성은 혈야성과 달리 마존들이 꽤 있어 특수한 마공을 수련한 이들에게는 정체를 들킬 수 있을 거예요. 저도 불안하던 참이니 휘 수사와 성 밖에 머물지요. 어쩔 수 없이 팔족마석을 구하는 일은 농 형과 한 형께 맡겨야겠습니다!”

    엽 수사와 휘 수사는 구체적인 계획을 상의하다 둔광을 일으켜 날아올랐고, 한립과 농 가 노조는 시간차를 두고 환야성으로 들어갔다.

    반나절 후, 농 가 노조가 연허 후기의 중년인으로 변해 성령원에 머물기 시작했다. 그는 합체기 수행을 드러내지 않았고 한립과도 멀찍이 떨어진 누각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 이후 한립은 가끔 농 가 노조 등과 법기를 이용해 소식을 주고받을 때 말고는 마정괴뢰 연구에 매진했다.

    그동안 농 가 노조는 환야성을 돌며 다양한 신분으로 가장해 귀한 보물과 4대 가문의 팔족마석을 거래할 방법이 없을지 알아보았다.

    번번이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영계든 마계든 거래를 못 할 물건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충분한 가격을 치르면 세상에 구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결국 농 가 노조는 오랜 노력 끝에 조 씨 가문의 고계 제자와 인연을 맺어 빈번히 왕래를 시작했다. 한립은 소식을 들었지만 끼어들지는 않았다. 그저 농 가 노조의 방법이 통하는지 관망할 따름이었다.

    얼마 뒤 성 밖에서 성령 무리가 드디어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농 가 노조와 한립은 기뻐하며 함께 성을 나서 이전과 다른 곳에서 천추 성녀와 다른 성령들을 만났다.

    영족 수사들은 농 가 노조 등 다른 수사들보다 늦게 왔지만 다들 멀쩡했다.

    ‘뭔가 이상한데.’

    그런데 한립은 어쩐지 ‘지수’라는 성령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못 본 사이에 기령족 성령의 기운이 더욱 음산해져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면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의식으로 수차례 상대를 훑었지만 의식이 바다에 빠진 소금처럼 녹아들어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러나 농 가 노조와 영족들은 순조롭게 상의를 마쳐 천추 성녀와 늙은 유생 ‘장 형’이 성 안으로 진입하고 나머지 영족 수사들은 성 밖에 남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후 두 명의 조력자를 얻은 농 가 노조는 지속적으로 조 가를 공략했다. 점점 거래 조건을 높이는 한편 다양한 경로로 조 가가 팔족마석을 키우는 곳이 어디인지 조 가에는 어떤 금제들이 펼쳐져 있는지 조사했다.

    * * *

    두 달 후, 성 밖의 임시 동부에서 한립, 농 가 노조, 천추성녀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

    그들은 약속한 기일에 간신히 도착한 산발사내를 보며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임 수사의 모습이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백발머리를 휘날리는 주름 가득한 노인이 돼 있었다.

    더욱 치명적인 문제는 그의 눈알이 하나 사라졌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강제로 눈알을 파내기라도 한 것처럼 한쪽 눈이 움푹 파여 있었다.

    당연히 임 수사의 기운도 크게 쇠해 이전과 비교해 수행이 크게 줄어 있었다.

    “임 수사, 어찌 된 일입니까!”

    농 가 노조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큼, 말하자니 부끄럽습니다. 만황에서 섭혼수(攝魂獸) 떼를 만나 정기의 절반을 빼앗기고 겨우 달아나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지니고 있던 귀한 보물 여러 개를 터트려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지요.”

    임 수사는 수척해진 얼굴처럼 목소리도 탁해져 있었다.

    “섭혼수라면 수행이 그리 높지 않을 텐데 어떻게 임 형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천추 성녀가 놀라 물었다.

    “평범한 섭혼수 떼였으면 당연히 그랬겠지만 합체급의 변이 섭혼수가 불시에 달려드는데 전들 어쩌겠습니까.”

    차분히 답하는 임 가 사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변이 섭혼수!”

    듣고 있던 수사들의 안색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다른 섭혼수 무리에 섞여 있다가 제가 방심한 틈에 수행을 드러내 기습을 가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제가 아무리 부족해도 이 꼴이 나지는 않았겠지요.”

    “임 수사가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도 천만다행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계획이십니까?”

    “정기를 너무 많이 잃어 법력도 평소의 1, 2할밖에는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이 상태로 환소사막을 건너는 것은 무리라 당장 영계로 돌아가 수백 년 동안은 요양해야 할 듯싶습니다. 두 천지영물은 포기한 지 오래고 남아 있는 기력을 북돋아 하루라도 빨리 영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농 가 노조의 물음에 산발사내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답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런 상태로 위험을 무릅쓰고 남아 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다들 이렇게 합시다, 임 수사가 몸조리를 할 수 있게 한 달간은 이곳에 머물지요.”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저희 영족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임 수사는 안심하고 요양을 하세요.”

    농 가 노조의 제안에 천추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 수사와 엽 수사는 서로의 얼굴에서 근심을 읽어냈다. 한 명은 역시 부상을 입었고 다른 한 명도 한립과 농 가 노조에 비하면 수행이 부족해 언제 임 수사처럼 될지 알 수 없었다.

    “제게 수사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단약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가져가 복용하시지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한립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얀 옥병을 꺼내 던져주었다.

    임 수사는 움찔하며 무의식중에 병을 받아들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함께 이곳까지 이동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교류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침음하던 임 수사가 병의 뚜껑을 열자 짙은 약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맡기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드는 좋은 향기였다.

    임 수사는 서둘러 코를 가까이 가져가 단약을 살펴보고 얼른 병을 기울였다. 비취색 문양이 새겨진 단약 하나가 그의 손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건 쉬정단(淬精丹)이 아닙니까!”

    임 수사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쉬정단은 아주 구하기 힘든 것이기도 했지만 만신창이인 그의 몸에 지금 꼭 필요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잃은 정기의 절반을 보충해 부상을 회복하고도 수행이 크게 떨어지지 않게 해줄 것이다.

    농 가 노조와 천추성녀 등도 쉬정단을 보고 눈빛이 달라졌다. 합체기 노괴들도 없어서 못 쓰는 귀한 단약이었다.

    “한 수사, 단약은 받겠습니다만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원하시는 바가 있다면 말해주십시오.”

    사내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립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습니다. 임 형께 부탁드릴 일이 있었거든요.”

    입꼬리를 끌어올린 한립도 전음으로 답했다.

    “쉬정단까지 받은 마당에 제가 부탁을 거절한다면 한 형께서 가만있겠습니까? 어떤 일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주 사소한 부탁이니까요. 최근 성 안에서 인족의 계집아이를 한 명 구출했습니다. 저와는 인연이 있는 아이라 수사께서 영계로 돌아갈 때 같이 데리고 가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제가 데리고 다닐 수는 없어서요. 수사께는 아주 간단한 일이겠지요.”

    “문제없습니다! 제가 무사히 영계로 돌아가는 한 아이도 안전할 것이라 장담하지요.”

    산발 사내는 예상 밖의 부탁에 놀랐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약속했다.

    “수사만 믿고 저는 마음 놓겠습니다.”

    둘의 대화가 끝나자 임 수사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내고 단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쉬정단을 빨리 복용해야 수행이 급감하는 위험이 줄어들 테니 지체할 수 없었다.

    다른 수사들은 그들이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눈치채고 방해하지 않았다. 한립이 귀한 단약을 그냥 내놓을 리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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