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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14화 (971/2,000)

1214화. 금경주(金鯨珠)

*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던 한립은 마지막으로 두 개의 선반을 남겨 놓고 검은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서늘한 광택이 있는 광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립이 혈아성에서 본 것보다 족히 열 배 이상 큰 이마금(異魔金)이었다! 우두커니 한참을 서있던 그가 푸른 기운을 뿜어 광석을 가져갔다.

그것을 본 자발 여인은 의아했다. 저만한 크기의 이마금이 드물기는 했지만 보물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축에 속하는 재료였다.

자발(紫髮)의 여인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조용해 주시했다. 결국 한립이 마지막 선반에서 나침반 형태의 마기를 집어 문으로 걸어오자 자발 여인이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음라반(陰羅盤)을 고르신 건 현명한 판단입니다! 그게 있으면 환소사막에서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이마금을 택하신 것은 의외였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특이한 마기를 제련 중인데 마침 커다란 이마금이 필요해서요.”

“그러셨군요. 그럼 축하드려야겠네요! 자, 이제 밖으로 나가실까요? 금제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펼쳐지게 되어 있어서요.”

여인은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 눈치 있게 캐묻지 않았다.

“그러시죠.”

한립이 문가로 걸어 나오고 여인이 손을 뻗어 사라졌던 옥패를 회수했다.

백 가의 보물 창고 중 가장 하급 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수만 년에 걸쳐 수집한 보물들이 쌓여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철저한 관리는 당연했다.

“그런데 선자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녀를 따라 누각을 나서던 한립이 입을 열었다.

“말씀해 보세요. 한 형과는 이번 일로 나름 인연을 쌓았다 할 수 있으니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알려드리겠습니다.”

의외라 생각했지만 자발 여인은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보물 창고에 있던 이마금을 어디서 난 것인지, 또 어떻게 구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마금이요? 하하, 다른 재료나 마기에 대해 물어보셨으면 제자들을 불러 알아봐야 했겠지만 그건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 그러십니까?”

“몇 해 전에 구한 것인데, 어떻게 보면 한 형께서는 이미 어떻게 구한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제가요?”

여인의 장난스런 말에 한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예, 혈아미에 대해 들으셨으니까요. 사실 이마금도 같은 경로로 저희 수중에 들어온 것입니다. 거래에서 주요 물품은 혈아미였고 이마금은 딸려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마금의 출처가 혈아미가 생산되는 곳과 일치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립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턱을 쓸었다.

“장담은 못하지만 저와 오라버니가 거래한 수사가 남폭호 출신인 것은 맞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세를 졌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을 향해 포권을 했다.

“아닙니다. 덕분에 화운석 광산 일을 잘 마무리 지었는데 제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자발 여인은 빙긋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녀의 호의적인 태도에 한립도 마주 웃었고 곧 누각을 빠져나왔다. 그는 대청으로 돌아가 황발 거한과 이야기를 나누다 백 가를 떠났다.

백 가의 두 노조는 직접 그를 배웅하고 대청에 마주 앉았다.

“어떤 보물을 골라갔는지 말해 보아라.”

“금경주가 든 옥함과 이마금 그리고 음라반을 가져갔어요!”

황발 거한의 질문에 여인이 사실대로 답했다.

“음? 다른 값나가는 보물들을 두고?”

“그러게요. 금경주와 음라반은 그렇다 치고 이마금은 저도 정말 이상했어요.”

“다른 말은 없었고?”

“대충 이유를 말하기는 했는데 사실이 아닌 듯했고, 나중에는 이마금을 어디서 났는지 묻던데요.”

“그건 그가 이마금에 정말 관심이 많고 상당한 수량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어째서 환야성 상점에서 이마금을 구매하지 않았지? 대량으로 구매했다는 소문은 들려오지 않았으니 말이야.”

황발 거한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우리 창고에 있던 이마금에 무언가 특별한 점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특별한 점은 무슨! 내가 직접 살펴보았지만 그냥 커다란 이마금이었다.”

“에이, 됐어요! 어차피 우리 가문과는 상관도 없는 일인데요. 이번 일로 오라버니께서도 원기를 상하셨으니 쉬시는 동안 가문의 일은 제가 맡을게요. 괜히 다른 가문들 쪽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요.”

“하긴 한 수사가 무슨 꿍꿍이든 우리 가문에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는 내일부터 당장 폐관에 들어갈 것이니 앞으로 가문의 대소사는 네가 신경 좀 써줘야겠다.”

여인이 가볍게 화제를 돌리자 거한도 이마금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 * *

한립이 거처로 되돌아갔을 때는 이미 하늘이 어둑해 지고 있었다.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본 주과아는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을 드러냈다. 한립의 비호 없이는 노예 신분의 그녀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한립은 추혼술로 그녀의 기억을 뒤진 것 말고는 아무런 위해를 가한 적이 없었고 소녀 역시 괜히 주인이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립은 소녀를 내보내고 이전에 펼쳐둔 금제를 전부 발동하고 방석에 주저앉았다.

파앗!

그는 바로 옥함을 꺼내 푸른 기운으로 부적들을 떼어내고 뚜껑을 열었다. 그곳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동그란 구슬이 담겨 있었다. 무척 매끄러워 보이는 구슬에는 은은하게 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풍겼다.

한립이 손끝에서 푸른빛을 쏘아 보내 구슬에 흡수시키자 잠시 후 구슬 속에서 파도소리가 들리고 금빛 기운이 빠져나왔다. 기운은 순식간에 초소형 고래 허상으로 응결해 구슬 주위를 헤엄쳐 다녔다.

그가 소매 속에서 새하얀 손바닥을 펼쳐 구슬을 올려두자 손바닥 표면에서 정순한 법력이 새어나와 구슬로 쏟아져 들어갔다.

웅!

구슬의 금빛이 진해지고 팔뚝 크기의 고래 허상도 몇십 배로 불어나 방 안을 꽉 채웠다. 금색의 거대 고래 허상은 머리에 뿔이 솟아 있었고 피부는 손바닥만 한 비늘로 뒤덮여 아주 인상이 험악했다.

만족스럽게 고래 허상을 살핀 한립은 법력 주입을 멈췄다. 이에 고래 허상이 금빛으로 흩어지고 구슬이 원래대로 돌아가자, 그는 구슬을 잘 담아 부적을 붙이고 저물탁에 넣었다.

금경주를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었지만 정말 써먹을 날이 올지는 몰랐다. 게다가 보물창고에서의 최대의 수확은 역시 커다란 이마금이었다. 이마금을 떠올린 그는 들뜬 표정으로 저물탁을 털었다.

팟!

하얀빛 속에서 커다란 광석이 떠올랐다. 한립은 곧바로 손을 들었고 푸른빛이 튀어나가 이마금을 두 동강 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떨어지다 무형의 힘에 의해 휙! 하고 날아가 그의 손에 들어갔다. 회백색 수정 구슬이었다.

잿빛 구슬을 보는 한립의 눈빛이 뜨거웠다.

퍼퍽!

팔이 부풀어 올라 장포가 뜯겨 나가고 금빛 비늘로 뒤덮인 팔뚝이 드러났다. 그는 손바닥을 펼쳐 거대 손을 만들어 무수히 많은 금색 주술문자들을 일으켜 구슬을 감쌌다.

그리고 금색으로 변한 구슬을 향해 주술을 외자 손끝에서 가느다란 수정실이 뿜어져 나와 금색 구슬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실을 타고 보일 듯 말 듯한 회백색 기운이 그에게 빨려 들어왔다.

한립은 눈을 감고 묵묵히 그 힘을 연화시켰다. 금색의 기운이 그의 몸을 타고 약해졌다 강해졌다하며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몇 시진이 흘러 다시 눈을 뜬 그의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몸 안의 법력이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이전처럼 법력이 늘어났어! 앞으로 더 많은 이마금을 찾아 법력을 끌어올리면 대승기에 도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천 년의 고된 수련을 대신할 수 있을 테니 기회가 되면 남폭호에 다녀오긴 해야겠구나.”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돌연 검지를 세웠다. 손끝에서 녹색 기운 한 줄기가 밀려나와 나부꼈다.

“쯧쯧, 이것도 마찬가지고. 계속 마영의 체내에 봉인해 두는 수밖에 없겠어.”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옅어졌다. 오늘 연화한 회백색 기체는 수정이 함유한 힘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만일의 후환을 대비해 매일 일정량만을 연화할 계획이었다.

수행이 급증하면 무슨 현상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부적 열댓 장을 꺼내 금색 구슬을 단단히 봉인하고 옥병을 꺼내 오색 기운으로 구슬을 회수했다.

한립은 옥병을 품에 넣고 명상에 잠겼다…….

그는 십여 일간 누각을 떠나지 않고 수정 구슬의 힘을 정순한 법력으로 변화시키는데 집중했다.

그 뒤로는 환야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경전과 특산품을 사 모았고 그 중에는 만노탑에 가서 연허기 장궤들에게 구입한 마정괴뢰 제련 비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여러 최상급 마기를 팔아 치우고 대량의 마석을 지불해야 했지만 아까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마정괴뢰는 영계의 괴뢰와는 아예 달랐기 때문이다.

마정괴뢰는 의식을 깃들여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금제를 펼쳐두고 신물로 조종하는 식이었다. 꼭두각시만 튼튼하게 만들어 놓으면 저계 수사도 손쉽게 부릴 수 있었다. 게다가 의식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서 한 번에 꼭두각시 대군을 이끄는 것도 가능했다.

그것을 알고 한립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무결한 것은 없는 법. 마정괴뢰는 의식을 깃들이지 않아 핵심 금제의 힘을 빌리면 간단한 명령밖에는 수행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동급 꼭두각시와 싸우면 위력이 한참 떨어질 것이다. 다음으로 제련법이 무척 성가시고 필요한 재료도 너무 귀한 것들이라 평범한 수사가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 안타까운 것은 그가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만노탑에서 구해온 괴뢰 제련술이 사실은 중, 저계 괴뢰 제련술이라는 점이었다.

만노탑 장궤들의 말에 따르면 고계 마정괴뢰 제련술은 오직 마존급인 만노탑 최고위층 장로들만 알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고계 마정괴뢰는 제련술은 물론이고 꼭두각시 자체도 외부로 판매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어차피 고계 마정괴뢰라고 해도 그에게 도움이 되려면 꽤 수가 많아야 했다. 비싼 값을 치르고 마정괴뢰 제련술을 구한 것도 주된 목적은 자신의 괴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후로 그는 한참을 누각에 머물며 수련과 연구에 매진했다. 저계 마정괴뢰를 시험 삼아 만들면서 깨닫게 되는 점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정괴뢰를 조정하던 한립의 허리춤에서 하얀빛이 날아올라 비단 손수건으로 변했다. 그는 비단 손수건에 푸른빛을 쏘아 보내 표면에 은색 글자들이 떠오르게 했다.

한립은 글자들을 확인하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1층 대청에는 주과아가 누렇게 변한 마수 가죽 서책을 읽고 있었다. 소녀는 그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 조심스레 물었다.

“주인님, 분부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요 며칠간 나를 찾아온 이가 있더냐?”

“없습니다. 제가 줄곧 1층에 머물렀지만 주인님을 찾는 분은 없었습니다.”

“알겠다. 잠깐 나갔다 올 것이니 너는 그냥 있거라.”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문밖으로 나섰다. 이에 주과아는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거리로 나와 마차를 잡아타고 곧장 성문으로 향했다.

* * *

한립의 둔광이 환야성 수백 리 밖의 한적한 산 위에 떠있었다. 하얀 안개가 끼어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쉭!

그 모습에 한립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불덩이를 쏘아 보냈고, 곧 산 속에서 사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 수사, 아니십니까? 금제를 개방할 테니 들어오시지요.”

상대는 한립을 잘 아는지 금방 안개 속에 통로를 내주었다. 푸른 둔광이 통로를 지나 산 정상의 공터에 내려섰다. 바위 위에는 농 가 노조와 검은 장포를 입은 휘 장로가 앉아 있었다.

‘다들 무슨 일이지…….’

그들을 본 한립은 멈칫했다.

농 가 노조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고 휘 장로는 초췌한 낯으로 팔 한쪽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휘 수사께서는 어쩌다 그러신 것입니까? 오는 길에 강한 마족이라도 마주친 것입니까?”

“말하자면 깁니다. 이후 천천히 말씀드리지요. 그보다 환야성에 한 형만 도착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농 가 노조가 쓴웃음을 짓고는 물었다.

“농 형께서 소환하였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최소한 저는 다른 이들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계속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한립이 온 지도 어느덧 한 시진이 흘렀다.

“아무래도 한 분이 더 오는 것 같은데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농 가 노조가 고개를 들어 안개 밖을 응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엽 가 노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조금 늦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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