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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09화 (966/2,000)

1209화. 혈야미(血牙米)

*

십여 일 후, 커다란 모래 언덕 위에서 한립과 그 일행은 녹색 털이 자라난 전갈 떼에 둘러싸여 있었다.

취취췻!

전갈들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녹색 독을 뿜어 일행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난룡천군, 한기장 등 합체급 수사들은 언덕에 서서 움직임이 없었고 백운형 등 여섯 연허기 수사들이 튀어나가 여러 마기들을 이용해 전갈 떼를 물리쳤다.

대부분 법력을 제한 당했어도 겨우 전갈 마수 떼가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 * *

보름 후, 사막의 모래 위를 날 듯이 질주하던 팔족마석들이 돌연 멈추고 낮게 울부짖었다. 이에 팔족마석에 탄 황발 거한이 인상을 찌푸리고 전방의 모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쿵!

폭음이 일고 모래 구덩이가 파이면서 모래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틈을 뚫고 노란 거대 구렁이가 날아들어 거한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백운형 등 연허기 수사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사금망(沙金蟒)은 저 아이들이 상대하기 어려우니 법력을 소비하더라도 제가 나서야겠습니다.”

황발 거한이 미간을 좁히며 검은 고리를 불러내 던졌다.

휘이이잉!

바람소리와 함께 날아간 검은 고리가 순식간에 커다랗게 불어났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거한의 손짓에 거대 구렁이 목에 검은 고리가 괴이하게 나타나 사정없이 마수의 목을 졸랐다.

이에 거대 구렁이는 처량하게 끙끙거리다 바닥에 떨어져 모래 위를 나뒹굴었다. 그것을 보고 황발 거한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웅-

거대 고리가 반짝이는 빛을 뿜으며 손바닥 크기로 줄어들자 거대 구렁이의 목이 검붉은 피를 뿌리며 분리되었다. 그러나 황발 거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입에서 새빨간 화염을 뿜었다.

거대 구렁이의 시체는 물론 혼백까지 화염 속에서 재가 되었다.

“연허 후기로 보이는 사금망을 일격에 제압하시고 솜씨가 대단하십니다.”

팔족마석을 부려 거한 옆에 이른 한립이 모래 구덩이를 보며 말했다.

“사금망이야 별 것 아니지요. 환소사막의 3대 재앙을 만났으면 노부도 달아나기 바빴을 겁니다.”

“3대 재앙이요?”

“아니, 그걸 모르십니까?”

거한은 무척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처음 들어보는 것은 아니지만 마존인 수사께서도 이리 두려워하시니 의아해서 그럽니다.”

한립은 턱을 긁적이며 담담히 대답했다.

“한 형께서는 과장된 이야기라 여기셨을 테지만 3대 재앙은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3대 재앙이 낙혼풍(落魂風), 지인사(地湮沙), 환소마랑(幻嘯魔狼)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시지요? 하지만 이 세 가지는 그 차이가 꽤 큽니다!

성년이 된 환소마랑의 경우 연허기 수행밖에는 되지 않지만 무리 생활을 해서 최소 일고여덟 마리가 몰려다닙니다. 보통 환소마랑 떼를 만나면 그것들을 해치우느라 법력을 크게 소모하거나 부상을 당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수사에게는 가장 위협이 되지 않는 재앙일 겁니다.

환소마랑이 사막에서 바람처럼 움직이기는 하지만 팔족마석에 비하면 속도가 느린 편이거든요. 미리 발견만 하면 싸우지 않고 피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 형께서 팔족마석을 타고 사막을 건너지 않으시면 완전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요. 지인사는 환소사막에서 낙혼풍 다음으로 위험한…….”

황발 거한은 줄줄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는 내용 중 일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한립은 신중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 * *

보름 후 한립은 도마뱀 마수 위에서 모래 바람 너머에 희미하게 보이는 옅은 초록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자색(紫色) 머리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천녹주(銀川綠州)에 곧 당도합니다! 작지만 백가의 거점이 있는 곳이니 여기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마수를 쫓으러 가면 될 것입니다. 광맥은 이곳에서 반나절 거리고요.”

“한 달이나 마수를 타고 이동하느라 온몸이 다 찌뿌둥하던 차인데 잘 됐습니다! 도착하면 푹 쉬는 김에 배불리 먹어야겠어요. 백 형, 약속한 물건도 여기서 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난룡천군이 불룩 나온 배를 두드리며 눈을 반짝였다.

“하하, 알겠습니다! 난룡 형께서 특수한 마공을 익혀 그걸 먹어야 마공을 극성으로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데 어찌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자발(紫髮) 여인 대신 황발 거한이 나서서 답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걸 먹으면 최소 법력이 3할은 불어날 테니 마수를 물리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게다가 맛도 좋아 예전에 딱 한 번 먹어봤는데도 지금까지 그 맛을 잊지 못했어요.”

“저희도 고생해서 겨우 구할 수 있었답니다.”

난룡천문의 말에 여인이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립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몰랐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은 도마뱀 마수를 타고 사막 안의 샘으로 들어섰다. 무형의 힘이 은천녹주 안과 밖을 분리해놓아 몰아치던 모래바람이 뚝 끊겼다.

그곳에는 짙은 녹색의 호수를 중심으로 낮은 관목들이 자라고 있었고 모래를 응결해 만들어진 잿빛 건물이 굳건히 서있었다.

한립은 호수를 훑다 건물들 사이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반원형의 건물들은 성에서 보던 다른 건물들보다 높이가 낮았다.

그때 황발 거한이 도마뱀 마수에서 뛰어내려 용울음 소리 같은 포효를 내뱉었다.

우르릉!

굉음이 이어졌지만 건물 안에서는 아무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에 황발 거한은 안색이 변해 뒤쪽을 향해 손짓을 했고, 그의 손짓에 백운형을 포함한 백 가 자제들이 서둘러 도마뱀 마수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건물로 다가갔다.

백운형은 건물이 가까워지자 새까만 철패를 꺼내 허공을 비추었다. 그러자 지면에서 검은 기운이 꿀렁꿀렁 새어나와 그들의 모습을 감춰주었다.

자색 머리 여인과 난룡천군의 표정은 심각해졌지만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남색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는 검은 안개를 뚫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또렷하게 보고 있었다.

그동안의 수련으로 명청령안은 이미 불가사의한 경지에 올라 있었고 웬만한 금제는 손쉽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일다경 후, 건물 주변을 맴돌던 검은 기운이 사라지고 백운형 등 백 가 자제들이 나타났다.

“노조께 아룁니다! 금제는 멀쩡한데 이곳을 지키던 제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멀리서 백운형이 황발 거한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인근에 녹주(綠州)라고는 이곳뿐인데 어딜 갔단 말이더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거처에 전투의 흔적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황발 거한의 굳은 표정을 보고 백운형이 당황해 대답했다. 이에 거한이 사나운 표정으로 뭐라 말하려는데 한립이 끼어들었다.

“백 수사, 어찌 되었든 안에 들어가 이야기하시지요. 마냥 밖에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제가 잠시 경황이 없었습니다. 저를 따라 모두 안으로 드시지요.”

거한은 움찔하며 다른 수사들을 향해 얼굴을 풀었다.

“그럼 본 천군이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난룡천군이 웃음을 흘리며 도마뱀 마수 위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백운형 등 백 가 제자들 뒤에서 나타났다. 그는 거침없이 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을 보고 황발 거한이 빙긋 웃으며 다른 수사들을 데리고 건물로 향했다. 잠시 후 한립과 다른 합체기 수사들은 대청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백 가 제자들은 거한의 명을 받아 바깥에서 경계 임무를 섰다.

“의식으로 살펴보았는데 운형의 말대로 전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바깥의 금제도 상한 곳이 없고요. 제자들 스스로 이곳을 떠난 것이 분명합니다.”

자색 머리 여인이 가부좌를 하고 앉으며 미간을 좁혔다.

“제자들에게 돌아가며 마수를 감시하라 일러두었는데 전부 잡아먹히기라도 했단 말이더냐? 아무리 그래도 이곳을 지키기 위해 일부는 남아 있었을 텐데…….”

황발 거한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계 제자들 몇인데 그리 신경 쓸 것 있습니까? 어서 그거나 내주시지요. 그래야 먹고 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난룡천군이 작은 눈을 깜빡거리며 황발 거한을 재촉했다.

“허허,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저희 남매가 약속한 것을 어긴 일이 있습니까? 다섯째 누이, 그걸 꺼내 난룡 형께 주지.”

황발 거한은 상대가 침을 꼴딱 삼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자색 머리 여인도 미소를 짓고 하얀 기운을 방출해 탁자 위에 옥함을 올려놓았다.

난룡천군은 눈을 번쩍 뜨고 두툼한 손을 뻗어 휙! 하고 옥함을 끌어왔다. 한립과 한기자의 시선이 옥함 안을 훑었고 한립은 동공을 수축하고 한기자는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옥함 속에는 쌀알 모양의 과실이 담겨 있었는데 크기가 애기 팔뚝만하고 피처럼 붉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기이한 향기는 대청 안에 모인 이들의 식욕을 돋우었다.

“이건 혈야미(血牙米)군요.”

커다란 쌀알을 보고 한립이 놀라 중얼거렸다.

“한 형의 견문이 이리 넓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보기 드문 천년(千年) 혈야미로 이걸 먹으면 정혈이 늘고 체질을 개선할 수 있지요. 난룡 수사처럼 혈계(血系) 마공을 익힌 분은 정혈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일시적으로 법력이 2, 3할 정도 늘어나는 효과를 볼 수도 있고요.

이것이 백 가에서 난룡 수사께 드리는 보수 중 일부입니다. 게다가 혈야미는 천상의 맛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어 한 입이라도 맛을 보면 몇 달을 입가에 그 향이 맴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도 이름만 들어 보았습니다. 혈야미는 성장 조건이 까다로워 백 년 된 것도 무척 구하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천 년된 혈야미를 구하시고 대단하십니다.”

자발(紫髮) 여인의 말에 한립이 복잡한 표정으로 답했다. 마계에 오기 전 관련 상고경전을 연구하다 우연히 알아낸 것이었다.

혈야미는 마계에서만 나는 영약으로 강력한 그의 육신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약이어서 그도 찾고 있었다.

혈야미는 마계의 남폭호(藍瀑湖)라는 곳에서만 나는데 환야성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곳의 마족들도 사용하기에 부족해 외부로는 유출되지 않는데 백 가에서 상품(上品)의 혈야미를 구한 것이 신기했다.

“한 형과 한 수사도 혈야미에 흥미가 있으신 눈치입니다만 이건 제가 먼저 점찍어 놓은 물건입니다. 필요하시면 백 형에게 부탁드려보세요.”

난룡천군이 한립과 한기자를 힐끗 보고는 혈야미를 집어 단번에 3분의 1을 뜯어냈다. 그가 우물우물 혈야미를 씹어대는 통에 짙은 향기가 대청 안을 가득 채웠다.

“오, 백 형께 혈야미가 더 있단 말씀입니까?”

한립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한기자도 홱 하고 고개를 돌려 거한과 자발 여인을 쳐다보았다.

“난룡 수사께서 농을 하신 겁니다. 저것도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남겨 놓은 것이 있겠습니까.”

황발 거한은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믿기 어렵군요. 혈야미는 먹으면 먹을수록 체질 개선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알고 있습니다. 백 형께서 혈야미를 구할 방도를 아신다면 어찌 단 하나만 구하셨겠습니까.”

한립의 말에 한기자도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백 가에서 약간의 혈야미를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머지는 저와 누이가 이미 복용하였고 난룡 수사께 드린 것은 종자로 쓰려고 남겨둔 것이었습니다.”

황발 거한이 서둘러 해명했다.

“백 가에서 귀한 혈야미를 구할 방도를 알고 계시니 앞으로 더 구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혈야미를 얻게 도와주신다면 아무리 높은 가격이라도 지불할 생각이 있습니다.”

“저 역시 똑같은 품질의 혈야미를 내주신다면 백 가가 이번처럼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무조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침음하던 한립이 차분히 제안했고, 한기자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의 말에 자발 여인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그러나 거한은 주저하지 않고 거절 의사를 표했다.

“저번에도 아주 우연히 혈야미를 구한 것이라 어렵습니다. 저와 누이가 몇 년 전 운 좋게 남폭호 출신의 수사를 만나 서로 물물거래를 한 것인데 어찌 또 그런 일이 생기겠습니까.”

황발 거한의 단호한 대답에 한립과 한기자는 시선을 마주치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난룡 천군도 계속해서 혈야미를 씹어 먹으며 실망스런 눈빛을 보냈다.

그 후로 그들은 대청 안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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