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8화. 광음보경(廣陰寶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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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이 사라지고 대청으로 돌아온 자발 여인의 얼굴에 차차 미소가 사라졌다.
“오라버니가 보기에는 저 자가 어떤 것 같습니까? 오라버니의 실력에 광음보경(廣陰寶鏡)을 사용했으면 상대의 수행을 파악하셨겠지요.”
여인은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다섯째 누이가 내 실력을 너무 높게 쳐주는구나! 확실한 것은 한 가 녀석의 실력이 네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다.”
대청 벽에서 하얀빛이 반짝이고 새까만 마름모꼴 형태의 거울을 들고 있는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한립이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는데 구불구불한 머리에 용맹하게 생긴 거한이었다. 그의 이마에는 작은 뿔이 박혀 있었고 자발 여인과 이목구비가 약간 닮아 있었다.
“오라버니도 저 자의 수행을 파악하지 못하셨다고요?”
“광한보경이 천지빙령(天地氷靈)을 연화해 만들어진 것이라지만 똑같이 극도의 음기를 지닌 보물을 지니고 있거나 극한(劇寒)의 공법을 수련한 사람에게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지 않더냐. 게다가 상대는 의식의 힘도 강대해 아마 내 존재도 들켰을 것이다. 그런데 술법을 펼쳐 뭐하겠느냐?”
한숨을 쉰 거한의 표정이 어두웠다.
“오라버니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거라고요? 골치 아프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해명을 해야겠어요. 그런데 광한보경으로도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하신 건가요?”
“하하, 해명은 무슨! 어차피 상대도 모른 척하고 넘어 갔으니 우리도 가만있으면 될 것이다. 다시 그를 염탐하려 들지만 않으면 문제 삼지 않을 것이야. 어차피 환야성을 거쳐 가는 떠돌이인데 회유할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무슨 발견을 했는지는 거울을 직접 보거라.”
거한이 웃음을 흘리고 거울을 튕겨 허공에 띄웠다. 검은 빛덩이로 변한 거울 속에서 오색 기운이 반짝 빛나며 무언가를 비춰주었다.
새까만 거울에는 대청에 앉아 있던 한립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 진짜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비춰준 듯했다.
“잘 보거라.”
거한이 자발 여인에게 당부하고 거울로 검은 빛을 쏘아 보냈다.
거울 속 한립이 돌연 겹겹이 쌓인 화염으로 변했다. 마장 겉 부분은 칠흑같이 새까맣고 그 안쪽은 자금색(紫金色) 그리고 더 깊은 곳은 잿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그것을 본 자발 여인도 놀란 눈치였다.
“하하, 광음보경의 비술은 너도 처음 보았겠구나! 보다시피 한 가 녀석의 주 수련 공법이 특수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부분이 성계의 정순한 진마기로 이루어져 새까맣지 않았다면 성계의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 의심했을 것이야. 그 안쪽의 자금색은 그 자가 대단한 연체 마공을 익혀 이미 자수금골(紫髓金骨)의 경지에 가까워졌다는 뜻인데 믿기지가 않는다. 성조급 선배님들을 제외하고 이런 경지에 이른 마존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거한은 한립의 몸에 둘러진 화염들을 짚으며 설명했다.
“그 자의 육신이 자수금골의 경지에 이렀다고요! 광음보경에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아마 아닐 거다. 광음보경이 상대에게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해도 착오가 있을 리가 있겠느냐. 게다가 상대는 그런 경지에 가까워졌을 뿐이지 온전히 자수금골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랬으면 진마기가 거울에 또렷하게 비치지 않고 경맥 안에서 전혀 새어나오지 않았을 것이야.”
“그렇다고 해도 이미 마존급을 벗어난 육체라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 안쪽의 회색은 또 뭔가요? 설마 또 다른 강력한 신통이라도 있다는 뜻인가요?”
자발 여인이 허공의 거울을 보고 물었다.
“잿빛은 광음보경도 살필 수 없는 영역이라는 뜻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법력을 더 불어 넣어 강제로 엿보려 했다면 상대가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득보다 실이 더 컸을 것이다!”
“……강력한 육신에 이 거울로도 알아낼 수 없는 괴이한 신통을 가진 자라니, 환야성 내에서 적수가 없겠네요. 이곳에 오래 머물 맘이 없어 보이고 백 가가 먼저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 다행입니다.”
“마수를 함께 처리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희소식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절대 상대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되겠지만 어차피 우리가 회유할 수 없는 인물이니 괜히 노력할 것도 없다. 다섯째 누이도 이 자와 접촉할 때는 앞으로 더욱 신경을 써야할 것이야.”
“알겠어요, 오라버니.”
거한의 충고에 자발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각 마차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립은 하얀 수정 구슬을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파앗.
검은 기운을 불러낸 그가 주변을 새까만 빛의 장막으로 가리고 미간을 짚은 채 구슬을 던졌다.
쉭!
미간에서 제3의 요목이 나타나 금색 빛기둥으로 하얀 수정 구슬을 공격했다. 그러자 하얀 수정구슬이 찬란하게 빛나며 거울을 쥔 거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백 가의 또 다른 마존급 수사인 거한이었다. 조용히 구슬을 주시하던 한립은 냉소하고 법결을 거두었다. 이에 거한의 모습과 제3의 요목이 사라졌다.
백 가의 거한이 금제 속에 숨어 비술로 그를 염탐할 때 그도 강대한 의식을 퍼트려 역으로 상대를 관찰했다. 상대가 같은 마존 그것도 중기 수사라는 것을 확인하고 한립은 안심했다.
범성진마공의 마기와 위마주의 능력이면 성조가 면전에 있지 않고는 들킬 염려는 없었다. 한립은 눈을 감고 무표정하게 명상에 잠겼다.
이어 며칠간 한립은 거대 마차를 타고 백 가를 오갔다.
자발 여인과 그는 연체술 그리고 마공에 관한 깨달음 외에 이런저런 비술과 기이한 공법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 얻는 것도 상당했다.
그동안 그는 따로 성 안을 뒤져 농 가 노조 등과 영족 성령들이 아직 환야성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가 가장 먼저 환야성에 도착한 것이다.
나머지 수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로 시간이 지체되는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답답하기는 했으나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농가 노조를 비롯한 세가의 인물들이나 성령들 모두 평범한 자들이 아니었다. 신분이 폭로되어 여러 마존들이 덮쳐도 달아날 능력은 충분했다.
팔족마석을 구하는 일이 까다롭다는 것을 알았으니 미리 백 가에서 한 마리를 구해놓고 나중에 다른 이들이 탈 마수는 다른 경로로 구하면 될 일이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을지 모를 노괴들이 팔족마석을 구할 방법 하나 내놓지 못하겠는가!
그간 환야성의 나머지 두 가문도 ‘마존’인 한립을 향해 초청장을 보내왔다. 한립은 그들의 청을 완곡히 거절했지만 보름 후에 열리는 조 가의 제사 의식에는 참석했다.
그곳에서 한립은 조 가의 마존급 태상 장로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소한 몸의 노인은 한립이 그저 이곳을 지나는 길이고 결코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듣자 대놓고 안심하며 그를 아주 살갑게 대했다.
이에 한립도 대충 상대해주고 안전하게 조 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로 며칠 뒤 자발 여인이 직접 찾아와 기다리던 벗이 도착했다며 며칠 내로 환소사막으로 출발할 것이라 전했다.
이에 한립은 며칠간 누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고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가다듬었다. 마수 한 마리가 위협적으로 느껴져서가 아니라 방심했다가 무슨 음모에 당할지 몰라서였다.
얼마 뒤 한립은 주과아에게 당부를 남기고 마차를 타고 환야성의 성문 중 한곳으로 향했다. 몇 시진 후 성문 밖의 언덕에 이른 그는 드디어 백 가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자발 여인과 거한 외에 낯선 얼굴의 마족 존자와 여섯 명의 연허기 마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운형도 연허기 마족들 틈에 끼어 있었다.
자발 여인이 밝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고 나서서 다른 수사들을 소개했다.
그녀가 오라버니라 부르는 황발의 거한은 이름이 ‘백석교’였고 본명을 알 수 없는 온몸이 둥그런 뚱보는 스스로를 ‘난룡천군’이라 칭했다. 살이 하도 겹겹이 붙어 있어 두 눈이 가느다란 틈새로 겨우 보일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녹색 악귀 얼굴 가면을 쓴 중년인인 ‘한기자’는 평범한 체격에 전신에서 하얀 한기를 발산해 가까이 가기만해도 뼈가 시린 느낌을 주었다.
황발 거한 백석교는 한립을 아주 정중하게 대했지만 뚱보 난룡천군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고 한기자는 아예 싸늘한 얼굴로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한립은 그들을 일관된 태도로 대하며 말을 아꼈다.
“출발하시지요!”
잠시 후, 백석교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 둔광을 일으켜 환소사막으로 날아갔다.
* * *
한참을 날아가자 저 멀리 잿빛 모래로 이루어진 광활한 사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둔광 속에서 한립은 명청령안으로 그곳을 살폈다. 잿빛 모래 속에는 드문드문 보이는 말라붙은 관목을 제외하면 풀 한포기도 없었다.
사막의 고공은 어두침침하게 노란 구름이 끼어 있어 사막 외부의 하늘과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사막을 십여 리 앞두고 황발 거한이 먼저 둔광을 거두고 인근에 내려섰고 다른 이들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더 가면 둔술이 효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팔족마석을 타고 가야 합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백 가 전체가 겨우 삼십 여 마리 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아 한 마리 한 마리가 매우 소중합니다.
이번 여정에는 모두 11마리를 데리고 왔으니 저희도 엄청난 모험을 하는 셈이지요. 도중에 혹시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다들 팔족마석을 영수환에 담아 다치거나 죽는 일이 없게 잘 보살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황발 거한이 한립 등 세 명의 마존을 향해 포권을 했다.
“허허, 걱정 마십시오! 팔족마석이 이곳의 가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우리가 모르겠습니까. 절대 한 마리도 상하는 일 없게 잘 챙기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가문의 어린 자제들까지 데려가는 것입니까?”
“저 여섯 명이 힘을 합쳐 진법을 펼치면 초기 마존에 상당하는 위력을 낼 수 있답니다. 아마 방해는 되지 않을 겁니다.”
뚱뚱한 난룡천군의 물음에 자발 여인이 미소를 머금고 설명했다.
“그랬군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여인의 말에 난룡천군은 고개를 끄덕였고, 한기자는 눈을 반짝였을 뿐 별 말이 없었다. 한립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시종일관 여기서 팔족마석을 몇 마리 더 구할 방법은 없을지 궁리 중이었다.
하지만 강탈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실력에 자신이 있어도 정확한 신통을 모르는 네 명의 마족 존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뒤따랐다. 그들을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도중에 한 명이라도 놓치면 이후 환야성의 거대 세력과 척을 지게 될 뿐만 아니라 더 강한 적의 주의를 끌 수도 있었다.
자발 여인이 손목을 털어 푸른 고리를 날려 보냈다.
우웅!
오색 광채가 고리에서 흘러나와 11마리의 커다란 마수로 변했다. 대충 보면 커다란 도마뱀 같았지만 전신에 새까만 비늘이 돋아있고 배에는 8개의 굵은 다리가 달려있었다.
도마뱀 마수들 등 뒤로 은색의 안장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어 길들여진 마수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것들이 팔족마석이란 말이지. 결단 정도의 기운을 발산할 뿐 특별해 보이지 않는 걸?’
한립이 마수를 관찰하고 있을 때 황발 거한이 모두를 모아 각자에게 팔족마석 한 마리와 마수를 부릴 수 있는 영패를 나눠주었다.
한립은 도마뱀 마수에 올라타 간단한 마문이 새겨진 안장을 내려다보고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굉장히 편안하게 제작된 안장이었다.
파앗!
그의 영패가 은빛을 뿜어내자 도마뱀 마수가 낮게 으르렁 거리며 앞으로 뛰어갔다. 그다지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다리가 상당히 안정적으로 움직여 휘청거리는 느낌이 거의 없었다.
황발 거한 등 다른 이들도 진작 앞으로 뛰어나가 11마리 마수들이 일직선을 그리며 사막으로 향했다.
우웅!
황발 거한이 부리는 마수가 사막으로 뛰어들자 은색 안장에서 하얀 보호막에 펼쳐져 타고 있는 수사를 보호했다. 이에 모래 바람은 보호막 양옆으로 소리 없이 미끄러져 지나갔다.
그러나 한립의 주의를 끈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팔족마석은 사막에 진입한 순간 속도가 몇 배로 빨라져 엄청난 속도로 초원을 내달렸다. 놀랍게도 커다란 몸에서 이상한 파동을 발산해 서서히 사막의 열기까지 흡수했다.
한립은 회색 사막으로 진입하자 알 수 없는 이상한 힘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허공의 혼잡한 천지의 힘 때문에 체내의 법력이 9할 정도 억제되어 제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환소사막이 괜히 마계의 금지 중 하나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립이 낯선 변화에 놀라고 있을 때 다른 수사들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사막 깊은 곳을 향해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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