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화. 복천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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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법결을 맞은 소녀의 눈이 서서히 떠졌지만 눈동자에는 꼭두각시처럼 총기가 없었다.
“네가 수련한 소녀륜회공 법결은 어디서 난 것이지?”
그녀와 눈을 마주친 한립이 나지막이 물었다.
“소녀륜회공 법결은 어머니께서 전수해 주셨습니다.”
“평소 누가 지도를 해주었느냐. 너의 모친도 소녀륜회공을 익혔더냐?”
“어머니께서 지도를 해주셨습니다. 다만 어머니는 소녀공이 아리나 청기결(淸氣決)을 익히셨습니다.”
“청기결은 도가의 평범한 공법으로 아는데 어느 경지까지 익힌 것이지? 소녀륜회공을 익히지 않고도 너를 지도해 줄 수 있으려면 상당히 수행이 높았겠구나.”
“어머니께서도 아직 원영기까지 밖에는 이르지 못하셨습니다. 다만 수련을 지도해 주실 때는…….”
황삼 소녀가 잘 대답하다가 갑자기 멍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던 게로구나. 자세히 말해 보거라!”
“어머니께서는 제가 원영기에 이른 후에는 이전과는 달리 바로바로 답을 주시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질문하면 보름이 지나서야 답을 주시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에 저도 어머니 뒤에 소녀륜회공에 정통한 또 다른 사부님이 계시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고요.”
“배후의 사부에 대해 네 어미에게 물은 적이 있더냐?”
순간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여러 번 여쭤봤지만 어머니께서는 항상 그런 일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네 어미의 이름은 무엇이고 생김새는 어떠하냐?”
“어머니의 성함은 능비선이옵고, 저와 닮으셨습니다.”
“너와 닮았다…….”
한립이 신중히 소녀를 관찰하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넌 어쩌다 마계로 와서 노예가 된 것이지? 원래는 어디 출신이더냐?”
“누군가에게 쫓기다 우연히 공간균열에 빠져 마계로 오게 되었습니다. 본래 소령천(小靈天) 출신입니다.”
“소령천? 그게 어디지?”
“소령천은, 소령천입니다.”
한립의 물음에 주과아가 멍하니 답했다. 그 말에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되었으니 내가 직접 알아보마.”
그가 수결을 바꾸고 미간에서 수정실을 뿜어 황삼 소녀의 이마에 투입시켰다. 두 눈에 더욱 강력한 빛을 머금은 그는 묵묵히 소녀의 기억을 더듬었다.
주과아라는 소녀의 수행은 원영기 밖에 되지 않아 강제로 기억을 읽어도 조심만 하면 원신에 손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일다경 후 원하는 기억을 찾은 한립이 수정실을 거두었다. 수정실이 사라지자 풀썩 쓰러진 소녀는 단잠에 빠져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광한계처럼 깨져나간 계면에 불과한 소령천에 1억 명이 넘는 인족들이 생활하고 있다고? 상상도 못한 일이로구나.”
소령천은 어느 세계에서 떨어져 나간 작은 공간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 이미 독립성을 갖춘 초소형 계면이 되었다. 주과아의 기억에 따르면 광한계와 비슷한 크기였지만 영기는 매우 희박했다.
또한 소령천에는 일고여덟 개의 이종족과 인족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곳을 처음 발견한 것이 어느 종족인지는 모르겠으나 놀랍게도 인계와 같은 여러 하계에서 영계로 비승하려다 실패한 자들이 그곳으로 우연히 흘러들었다는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면 남궁완이 소령천에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면 그가 줄곧 영계에서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 설명이 되었다.
한립은 아름다운 남궁완의 얼굴을 떠올리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당장이라도 그녀 곁으로 날아가 오랜 세월의 그리움을 달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는 시시각각 표정이 달라졌지만 겨우 혼란스런 마음을 억누르고 소령천에 대해 생각했다.
소령천은 광한계와는 달리 허공에서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천천히 이동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완전히 운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모든 정보는 주과아의 기억에서 얻은 것이니 사실인지는 따로 알아봐야 했다.
주과아가 소령천에서 마계로 흘러들었다면 분명 또 다른 누군가도 영계로 가는데 성공했거나 관련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한립은 심호흡을 하며 조급함을 가라앉히고 잠들어 있는 황삼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주과아에게 소녀륜회공을 전수해 준 이가 반드시 남궁완이라는 법은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영계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단 한 번도 관련 공법이 전수되었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침울한 심정으로 생각을 마치고 주과아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푸른 빛덩이가 소녀의 몸속으로 스며들고 주과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소녀는 자신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추혼술을 쓰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원하는 답을 구했겠느냐? 내가 찾고자 하는 것만 보았으니 안심하거라. 네 원신에 해를 끼치지도 않았고. 네가 영계 출신이 아니라 소령천에서 왔다는 것은 매우 의외였다.”
“…….”
한립이 ‘소령천’을 언급하자 주과아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네 몸에 금제를 심어 놓았으니 환야성에 머무는 동안은 내 시녀 노릇을 하거라! 얌전히 내 뜻을 따른다면 성을 떠나는 대로 자유를 되찾게 해줄 수도 있다. 아래층에서 적당한 방을 찾아 휴식을 취하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이곳에 올라오지 말거라. 물론 앞으로는 나를 주인님이라 불러야 한다.”
“예, 주인님. 물러가겠습니다.”
황삼 소녀는 어쩔 수 없이 답을 하고 고분고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합체기 마존을 상대로 반항해봤자 고통스러워지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기력한 모습으로 보아 한립의 말에 큰 희망을 거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립은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사흘 동안 한립은 최상층에 앉아 휴식을 취할 뿐 누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흘 째 되는 날 누군가 먼저 그를 찾아왔다.
“조 가의 가주가 사람을 보내왔다고?”
한립은 방석에 앉아 황삼 소녀의 말에 눈썹을 끌어올렸다.
“예, 주인님. 조 가의 장로라는 자가 서한을 전하였습니다.”
주과아는 은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종이를 들고 있었다.
“이리 줘 보거라.”
그의 손으로 은색 종이가 날아들었다.
파앗!
종이가 금색 빛을 방출해 모호하게 중년 유생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눈꼬리에 검은 비늘이 난 금색 눈동자를 번득이는 사내였다.
조 가 가주로 보이는 중년 유생 허상은 포권을 하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은 대충 두 가지였다.
첫째, 만노방의 황 장궤에게서 마존인 한립이 환야성에 온 것을 알게 되었고 이곳의 지주(地主)로서 조 씨 가문은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겨우 노예 한 명 때문에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둘째, 한 달 후에 조 가에서 조상을 기리는 제사가 있을 예정인데 그가 손님으로 조 가에 들려주었으면 하는 이야기였다. 허상은 할 말을 마치자 한립을 향해 인사를 하고 펑! 하고 터져 없어졌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은 마문 사이에 금색으로 ‘조(趙)’ 자가 적혀 있는 종이를 재로 만들었다.
“조 가에서 답을 받으러 오면 요청대로 한 달 후에 찾아가겠다고 전해라!”
“존명!”
소녀가 물러나고 한립은 다시 눈을 감고 수행에 들어갔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지 않아 소녀는 또 그를 찾아갔다. 백 씨 성의 여인이 한립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백운형이 찾아온 것이라 짐작했다. 낯선 마존이 등장했다는 소식이 백 가까지 전해진 것이다.
1층의 대청으로 내려간 한립은 의자에 앉아 있는 백운형의 얼굴을 보고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백 선자 왔는가. 내 너무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니겠지?”
한립은 합체급 기운을 드러낸 채 그녀를 맞이했다. 의식으로 그를 훑은 백운형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예를 올렸다.
“어리석게 마존 대인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하, 일부러 수행을 감춘 것인데 어찌 그대의 행동을 탓하겠는가.”
한립은 손을 뻗어 여인에게 자리를 권하고 상석으로 가 앉았다.
“아닙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도 여러 번 불경을 저질렀는데 어찌 또 그러겠는지요.”
조금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백운형은 여전히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그녀가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을 보고 한립도 재차 권하지 않았다.
“백 수사가 찾아온 이유가 사과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텐데?”
“맞습니다! 선배님의 대해 복천 노조님께 아뢰어 노조님의 명을 받들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문으로 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복천 수사의 요청이었군. 그렇다면 가봐야겠지. 백 수사가 안내하게.”
“예, 알겠습니다!”
한립이 스스럼없이 응하자 백운형이 밝은 얼굴로 답했다. 한립은 주과아를 누각에 놔두고 백운형과 함께 나섰다.
머지않은 곳에 뿔이 달린 말이 이끄는 거대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백 가에서 귀빈을 모시기 위해 가져온 마차였다.
마차 양쪽으로는 쌍두 늑대를 탄 16명의 병사들이 검은 갑옷을 입고 등 뒤에는 거검 두 자루를 교차해 메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은은한 살기(煞氣)를 품고 있었는데 모두 화신급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호살위(虎煞衛)들은 저희 백 가의 정예병들로 만황에서 홀로 백 년 이상씩 생활하며 무수히 많은 마수들을 참살한 병사들입니다. 선배님이 보시기에는 어떠십니까?”
백운형은 한립이 마족 병사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보고 빙긋 웃음 지었다.
“괜찮군. 거대한 성의 정예병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겠어.”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올라 눈을 감았다. 이에 백운형은 눈치 있게 더는 입을 열지 않고 곧바로 출발 명령을 내렸다.
거대 마차가 길을 따라 내달리는 동안 호살위들은 쌍두 늑대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호위를 했다.
길을 가는 동안 마주친 마인들은 거대 마수와 양쪽의 흑갑 병사들을 보고 선망어린 눈길로 얼른 길을 내주었다. 이렇게 거대 마차는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지 않고 몇 시진 만에 성 안의 또 다른 요새 앞에 이르렀다.
거대 마차에서 내린 한립은 요새를 보고 놀란 눈빛을 했다. 거대한 건축물은 전체가 통으로 되어 있어서 틈이라고는 없었고 은은한 녹색 빛을 머금어 무엇을 사용했는지 그의 안목으로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음산한 기운으로 보아 백 가는 강력한 금제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다.
요새의 양쪽으로 열리는 거대한 반달형 문 양측에 커다란 마수 조각상이 서 있는데 새까만 조각이 어찌나 정교한지 진짜 마수가 엎드려 있는 듯했다. 게다가 그 위에도 문을 지키는 황포 병사들이 있었다.
한립은 백운형의 안내를 받아 황포 병사들의 눈빛을 받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일다경 후, 그는 고풍스러운 어느 전당 안에서 보라색 의자에 앉아 은색 찻잔을 들고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백운형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절색의 마족 시녀 네 명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당 밖에서 가벼운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복천거사입니다. 한 수사께서 친히 찾아주시니 백 가의 복입니다!”
“수사께서 복천 노조시라고요?”
상대를 보는 한립은 조금 아연한 얼굴이었다.
전당으로 걸어 들어온 복천거사는 스무 살밖에 돼 보이지 않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었다. 이마에 하얀 뿔이 작게 솟은 여인은 예의 바르게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그를 보고 있었다.
“제가 여인인 줄 모르셨습니까?”
“백운형 수사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녀를 향해 포권을 한 한립은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라 괜찮습니다. 복천거사라는 칭호가 여럿 오해하게 만들었지요! 백 씨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칭호라 마공을 대성하면 어쩔 수 없이 이리 불려야 한답니다.”
여인이 싱긋 웃고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유서 깊은 가문들은 직함이나 칭호가 후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동일한 칭호를 오랜 세월 사용해서 가문 자제들 간의 결속력을 기르는 것이다.
별 것 아니라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한립이 보기에는 꽤 효과가 좋은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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