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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05화 (962/2,000)
  • 1205화. 소녀륜회공(素女輪回功)

    *

    한립은 노인이 무어라 떠들던 개의치 않고 체내의 법력을 움직여 황삼 소녀의 팔로 흘려보냈다. 곧 법력을 회수한 그의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격동이 느껴졌다.

    “과연 맞았어! 내 눈이 틀릴 리 없지! 넌 그 입 다물고 네가 결정할 수 없는 거래라면 윗사람을 불러 오거라.”

    한립이 돌연 폭발적인 기운을 드러내자 화신기 마족들은 광풍에 휩쓸려 튕겨나갔다.

    쿵! 쿵!

    탑 벽에 등을 부딪치고 떨어진 그들은 간신히 몸을 추스렸지만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네 명의 마족 병사들은 강대한 기운 때문에 바닥에 꽉 눌려 아예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한립의 비호를 받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황삼 소녀만이 불가사의한 현상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웅웅웅웅!

    그의 기운은 지속적으로 퍼져나가 거대한 탑을 휩쓸었다. 탑에 펼쳐진 각종 금제가 무시무시한 기운에 반응해 크고 작은 경고음을 방출했다. 이렇게 소란을 떠는 데 만노탑 고계 마족이 모를 리 없었다.

    “헛!”

    거탑 최상층 밀실에 앉아 있던 두 명의 마족 노인들이 갑작스런 기운을 감지하고는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튀어 올라 밀실을 나섰다.

    잠시 후, 한립 앞에 연허급 마족 존자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의 등장에 황 장궤와 방 장궤가 연신 고개를 숙이고 그들을 마존 선배님이라 칭했다.

    그제야 기운을 거둔 한립은 새로 나타난 연허 마족들을 향해 냉랭히 물었다.

    “이 아이가 마음에 들어 데려가야겠다. 이견이 있는가?”

    “그럴 리가요. 선배님의 눈에 들다니 복이 많은 아이입니다! 본 탑이 선배님께 드리는 약소한 선물이라 생각하시고 그냥 데려가시지요.”

    머리에 외뿔이 난 연허급 노인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또 다른 노인도 동의를 표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만노탑을 운영하며 많은 마족 존자들을 만나보아 합체급 노괴들은 하나 같이 성격이 괴팍하고 어디로 튈지 몰라 조금이라도 밉보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하, 내가 마석이 부족해 보이는가? 나중에 딴소리 말고 잘 받아두게. 이 일 말고 따로 상의할 문제도 있으니까.”

    한립이 가볍게 미소 짓고는 소매 속에서 마석이 가득 담긴 저물탁을 날려 보냈다.

    “마존 대인의 분부라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독각 노인이 저물탁을 받아 들고는 곧바로 품에 넣었다.

    “그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세. 우선 처리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나중에 다시 찾아오지.”

    말을 마친 한립은 검은 안개에 휩싸여 황삼 소녀와 함께 탑의 벽으로 뛰어들었다.

    쾅!

    탑을 보호하는 금제가 몇 번 반짝이다 쉽게 뚫려 나갔고 검은 둔광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남은 연허기 마족 노인들은 씁쓸하게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만노탑도 상당한 내력이 있는 곳이라 고위층에는 마존급 장로도 있었다. 문제는 환야성 만노탑에 그만한 실력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연허기 마족 노인들은 아무리 불합리한 일이라도 정체 모를 ‘마존’ 선배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어찌 보면 현지 세력인 사대 가문의 노조들보다 무슨 짓을 벌릴지 모르는 외지인이 더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분 호법께 아룁니다! 조금 전 소녀는 조 가 가주께서 점찍어둔 노예입니다. 조 씨 가문에 어찌 해명을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금의 노인이 다급히 두 연허급 마족들을 향해 고충을 털어놓았다.

    “조문호가 원하던 노예라고? 조 가는 함부로 대할 수 없기는 하다만 선금을 받았더냐?”

    독각 노인이 인상을 찡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그건 아닙니다. 그저 몇 달 전 직접 탑으로 찾아와 결단기 이상의 어린 인족 여수사를 구입하고 싶다며 대량의 마석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밝혔지요. 저희에게 찾아와 필요한 노예를 구해달라고 의뢰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런 선례가 있기는 했지만 선금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저 인족 노예를 꼭 조 가에게 팔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시간을 좀 더 들여 다른 조건에 부합하는 노예를 구해주면 될 것이야.”

    또 다른 연허기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조 가와의 거래는 처음부터 네 담당이었으니 마무리도 맡기겠다. 조 가가 본 탑에 불만을 갖게 해서도, 한 선배님의 심기를 건드려서도 안 될 것이야! 우리는 돌아가 수련을 계속해야 하니 탑의 실무는 너희에게 맡기겠다.”

    독각 노인은 당부의 말을 남기고 전송진으로 걸어갔다.

    “존명!”

    두 호법 수사의 말에 황 장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방 장궤는 내심 키득거렸다.

    “아, 한 선배라는 분이 다시 찾아오시면 바로 우리에게 알리고 소홀함 없이 접대해야 할 것이다.”

    “예!”

    전송진이 발동되기 직전 독각 노인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두 장궤들은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웅!

    전송진이 하얀 빛을 머금었다.

    “하하, 이번에 특수한 노예를 구하느라 꽤 고생을 하셨을 텐데 마무리도 잘하셔야겠습니다. 하긴 황 형이야 늘 조 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셨으니 아무 문제도 없겠지만요.”

    호법들이 돌아가고 몸을 일으킨 방 장궤는 피식 웃고 전송진에 올랐다. 홀로 남은 황 장궤는 부들부들 몸을 떨며 열 받아 발만 동동 굴렀다.

    “제길,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 오늘 이상한 노괴를 마주쳐서는! 아무래도 직접 조 가로 가서 해명하고 새로운 노예를 구해봐야겠구나. 또 어디 가서 그런 인족 여수사를 찾는단 말인가!”

    * * *

    그 시각 한립은 황삼 소녀와 마부가 끄는 소형 마수 마차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는 마차 가운데에서 눈을 감고 좌선을 하는 중이었고 황삼 소녀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만노탑의 일로 상대가 마존급 수사라는 것을 알았지만 겉보기에는 너무 평범해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평소 만나기도 어려운 합체급 노괴의 손에 떨어졌으니 달아날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은 사라진 셈이었다.

    황삼 소녀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한립은 비술로 상대의 마음을 읽지 않아도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새하얀 장포를 입은 여인의 웃고, 화내고, 즐거워하던 여러 표정들이 쉼 없이 스쳐지나가는 중이었다. 어떤 장면은 더없이 또렷했고 또 어떤 장면은 꿈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오래전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져 그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한립은 그녀의 모습을 강제로 지우지 않고 마음속 깊이 새겨두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 밖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말씀하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내려서 살펴보시겠습니까?”

    “그러지.”

    그는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고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킨 그가 마차에서 내리자 황삼 소녀도 주저하다 따라나섰다. 영리하게도 칼자루를 남이 쥐고 있을 때는 몸을 사릴 줄을 아는 소녀였다.

    한립은 마부에게 마석 하나를 던져주고 전방의 높다란 산을 보고 흡족한 얼굴을 했다. 산의 벽을 따라 대량의 누각과 동부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앞쪽의 거대 누각에는 성령원(聖靈院)이라는 은색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 아래에 나무 탁자를 놓고 회백발의 노인이 졸고 있었다.

    한립은 노인을 보고 입술을 조용히 달싹였다. 다음 순간, 꾸벅꾸벅 졸던 노인이 벌떡 일어나 다급히 외쳤다.

    “어느 분께서 성령원에 찾아주셨는지요? 미리 마중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노인은 입버릇처럼 인사치레를 하고 한립과 황삼 소녀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 * *

    한식경 후, 한립은 황삼 소녀를 데리고 누각 중 하나에 들어섰다. 절반이 절벽에 박혀 있고 나머지만 외부로 드러나 금제 진법을 펼치면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는 공간이었다.

    성령원은 전문적으로 고계 마족들을 상대하는 임시 거처로 다른 일반적인 누각보다 가격이 비싸 실제 머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누각의 각 층을 의식으로 훑고 마족 노인에게 1년 치 마석을 지불했다. 그는 누각의 금제를 전부 발동하고는 꼭대기 층에 앉아 소녀에게 맞은편에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황삼 소녀는 불안했지만 그의 분부에 따라 행했다.

    휘휙!

    이때 한립이 소매를 털어 수십 개의 깃발들을 사방으로 쏘아 보냈다. 깃발들이 사라지고 푸른 보호막이 펼쳐져 꼭대기 층을 뒤덮었다. 그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비로소 소녀의 몸을 손바닥으로 쳤다.

    후웅!

    손바닥을 타고 그의 강대한 법력이 파도처럼 소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금제 대부분을 제거했다.

    황삼 소녀의 피부에 어른거리던 마문들이 연달아 터지며 검은 연기로 흩어졌다. 소녀는 체내의 영력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기쁨에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어째서 제게…….”

    “이름이 무엇이냐?”

    한립은 그녀의 말을 끊고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저는 주과아라 합니다.”

    “마기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인족인 듯한데 스스로 이곳에 온 것이냐, 아니면 영계에서 납치를 당한 것이더냐?”

    “실수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왔다고 해야겠지요.”

    “스스로? 네 수행에 공간을 넘어 이계로 올 수 없었을 텐데. 이곳으로 넘어올 때 일행이 있었겠구나.”

    의외의 답변에 한립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닙니다. 저 홀로 마계에 떨어진 것입니다.”

    “혼자였다? 그럼 네가 익힌 소녀륜회공(素女輪回功)은 누구에게 전수 받은 것이더냐?”

    “어찌 이 공법을 알아보십니까? 소녀륜회공은 제 어머니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머뭇거리던 황삼 소녀가 솔직히 답했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었다.

    “네 어미의 이름은 무엇이고 어찌 소녀륜회공을 얻게 되었지?”

    “그건…….”

    “넌 지금 윤회(輪回) 기간일 테고 진정한 수행이 결단기도 아닐 것이다.”

    망설이는 소녀를 보고 한립은 상대의 정곡을 찔렀다.

    “그것도 알고 계셨군요! 하긴 소녀륜회공을 알아보셨으니 윤회 기간을 아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네 원래 경지는 원영기더냐? 아니면 화신기?”

    “본래 원영기 수행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윤회 기간만 아니었다면 암습을 받아 납치를 당하는 일도 없었겠지요.”

    주과아가 붉은 입술을 꽉 깨물고 천천히 답했다.

    “네 나이에 소녀륜회공을 이만큼이나 익혔다면 자질이 뛰어난 것은 둘째 치고 확실히 공법이 정통한 이의 지도를 받았을 터! 네 어미의 수행도 낮지 않았겠구나.”

    “선배님께서 저에 대해 물어보신다면 무엇이든 숨김없이 답하겠으나 제 어머니에 대해서는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주과아는 한립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관심을 보이자 표정이 확 달라졌다.

    “보기 드문 효녀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네가 말하지 않는다고 내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추혼술을 쓰시려 한다면 원영을 스스로 폭발시킬 것입니다!”

    놀란 소녀가 얼굴이 창백해져 체내의 진력을 미친 듯이 일으켰다. 정말 원영을 폭발해 자결이라도 할 모양이었다.

    “내 앞에서 자폭이라, 어린 계집아이가 꿈도 크구나!”

    그의 소매 속에서 회색 기운이 날아가 소녀를 감쌌다. 주과아는 온몸에 힘이 빠지고 체내의 법력이 응결된 것을 알아챘다. 단전으로 미친 듯이 집중되던 법력 또한 봄날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뭘 어쩌려는 것입니까!”

    “네가 얌전히 내 질문에 답하게 하려는 것뿐이다. 이제 내 눈을 보아라.”

    “절대 그럴 수는…….”

    주과아는 절대 한립의 말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안 돼!’

    황삼 소녀는 비명을 지르다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이에 한립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다른 손으로는 소녀의 몸에 법결을 넣어 눈동자에서 눈부신 남색빛을 뿜어냈다.

    주과아의 단전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손바닥 크기의 원영이 정신을 잃고 회색 실에 돌돌 말려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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