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4화. 만노탑(万奴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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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옥패를 넣자 백 가 수사들은 마차에 올라 길을 따라 우르르 사라졌다. 그는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 다른 골목으로 걸어갔다.
성조급 수사가 없다지만 마존급이 십여 명이나 머문다는 것은 마계에서도 꽤 유명한 성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혈아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건물들이 많았고 재료 상점이나 전문으로 마공을 전수하는 마관(魔館) 등을 드나드는 마족들의 수도 엄청났다.
마관들은 영계에서 기본 도술을 전수하는 도관과 비슷한 기관이었다. 한립은 거탑을 지나다가 그곳에 걸린 편액을 보고 표정이 묘해졌다.
그곳에는 만노탑(万奴塔)이라는 새빨간 마족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한립은 흥미가 일었고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탑의 문을 지나자 바로 화려한 전당이 나왔고 양쪽으로 열댓 명의 은색 궁장 차림의 마족 소녀들이 늘어서서 웃음을 머금고 그를 환대했다.
전당 중심에는 옥을 깎아 만든 반짝이는 탁자와 의자가 보였다. 그곳에는 검은 장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다른 시녀들과 손님으로 보이는 세 명의 마족들을 접대하는 중이었다.
한립이 내부를 자세히 살피기도 전에 중년 사내가 한립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는 다른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얼른 걸어왔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 주셨는지요?”
화신기 수행을 지닌 장궤는 한립의 연허기 기운을 감지하고 아주 예의바른 태도를 취했다.
“만노탑은 무엇을 파는 곳이지? 다른 성에서는 이런 곳을 보지 못했네만.”
“환야성은 처음이신가 봅니다! 만노탑이 일반적인 성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지요. 본 탑은 전문적으로 노예와 마수들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노예와 마수?”
“예, 저분들도 마침 노예들을 보러 오셨으니 관심이 있으시면 선배님도 함께 보시겠습니까? 그러나 마수들은 일반적인 품종 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아 선배님의 눈에 들 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이나 해봐야겠군.”
한립은 잠시 생각하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선배님, 저를 따라 오시지요.”
중년 장궤는 곁에 있는 시녀에게 나머지 마족들을 부탁하고, 한립을 데리고 거탑 구석의 간이 전송진으로 향했다.
미리 와 있던 세 명의 마족들은 젊은 사내들과 여인으로 외모가 번듯했다. 그들은 겨우 원영기 수행을 지니고도 한립을 향해 그다지 경외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립은 그들을 훑다 소매에 수놓아진 은색의 ‘저(宁)’ 자를 발견했다.
‘저 씨 가문 인물들이란 말인가.’
그는 재빨리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중년 장궤를 따라 전송진에 올랐다. 중년 장궤는 한립과 다른 손님들이 전송진에 오른 후에 하얀 법결을 날려 전송진을 발동했다.
웅!
빛이 번득이고 그들은 전당 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거탑의 다른 층 전송진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를 살피자 1층과는 다른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전송진 앞쪽으로 주술문자가 새겨진 협소한 통로가 나있었고 통로 끝에는 여러 개의 금색 문과 그곳을 지키는 거구의 병사들이 서있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병사들을 훑고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병사들은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전부 인형괴뢰였다. 중년 장궤는 곧바로 전송진을 나서 가장 가까운 금색 대문으로 걸어갔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꼭두각시가 고개를 돌려 일행을 쳐다보고 장창을 앞쪽으로 뻗었다. 누구든 가까이 다가가면 공격할 태세였다.
중년 장궤는 당황하지 않고 검은색 쇠로 만든 영패를 꺼내 전방을 비추었다. 그러자 꼭두각시는 즉시 장창을 거두고 다시 석상처럼 돌아가 꼼짝하지 않았다.
나머지 세 마족은 별말이 없었지만 한립은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꼭두각시들의 수행이 제법이라 평범한 원영기 수사들도 상대할 수 있겠군. 제련법이 독특한데 이곳에서 제련된 것인가 아니면 어딘가에서 구입한 것인가?”
그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눈앞의 꼭두각시들은 확실히 마계에서 전해지는 꼭두각시 술법과는 달랐다. 제련법이나 재료가 간단하고 조잡한 느낌도 있었는데 꼭두각시의 수행은 상당했다.
“허허, 마정괴뢰(魔晶傀儡)가 흥미롭기는 하지요! 다른 괴뢰들과는 제련법이 달라 원신을 깃들여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해둔 법기와 법결을 통해서만 간단한 행동을 하도록 조작할 수 있습니다. 저희의 독문비술로 제련된 마정괴뢰는 다른 곳에서는 구입하실 수 없지요. 선배님께서 원하신다면 가격을 맞춰드리겠습니다.”
“마정괴뢰라 재미있군. 이따가 따로 이야기 나누세.”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한립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그는 조금 실망했지만 서둘러 앞으로 걸어 나가 금색 대문에 철패(鐵牌)를 가져다대었다.
끼익!
금색 대문이 스르륵 열리고 문틈에서 우윳빛이 새어 나왔다.
중년 장궤가 옆으로 비켜서 한립에게 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다른 마족들도 저 가 출신이지만 수행이 그보다 한참 밑이었기에 경거망동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먼저 금색 문 안으로 들어갔다. 크기가 제각각인 진법 몇 개가 발동되어 원기둥 형태의 우윳빛 빛의 장막을 만들었고 그 안에 수십 명의 마족 남녀들이 갇혀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도 없이 얼굴에 희미하게 마문(魔紋)이 반짝이는 것이 금제가 걸려 있는 듯했다. 빛의 장막 안의 남녀 수사들의 수행은 연기기에서 결단기 사이였다.
“가서 일 보게. 난 알아서 둘러보지.”
중년 장궤가 소개를 하려하자 한립이 손을 저었다.
“예, 선배님! 저는 그럼 다른 손님들을 안내해드리고 있겠습니다. 자, 수사분들 이쪽을 보시지요. 말을 잘 듣는 노예를 구하신다면 이들이 제격일 겁니다. 환소사막의 토음족(土陰族)으로 흙 속성 공법에 정통하고 성년이 되면 외모가 빼어나지요. 더욱이 다들 자질이 나쁘지 않아 잘만 양성하면 원영기에 이르는 것은 물론이고 화신기에 이를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한립을 향해 공손히 답한 장궤가 빛의 장막 중 하나로 다가가 나머지 저 씨 마족들을 향해 설명을 시작했다. 환소사막이라는 말에 한립의 시선도 자연히 빛의 장막 안에 갇힌 토인족 마인들로 향했다.
녹색 가죽 장포를 입은 여덟 명의 소년 소녀들이 산발을 하고 있었다. 열서너 살 정도의 그들은 축기기 수행을 지녔고 조금 수척해 보였다.
“토음족이면 흔히 구할 수 없는 노예이기는 하지만 자질이 그렇게 뛰어나단 말입니까?”
뺨에 붉은 비늘이 난 저 가 청년이 소년 소녀들을 향해 의심스런 시선을 보냈다.
“하하, 그리 물어보실 게 아니라 직접 저들의 실제 나이를 확인해 보시지요. 이리 어린 나이에 이미 축기에 성공했다면 자질이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중년 장궤가 자신 있게 답했다.
“아닐 수도 있지요. 단약을 복용시켜 수행을 강제로 늘려 놓은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고운 얼굴의 저 가 여인이 빙긋 웃음 지었다.
“그런 비싼 단약을 어찌 노예들에게 복용시키겠습니까? 또 그런 짓을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티가 날 텐데 겨우 노예 몇을 비싸게 팔려고 하필 저 가의 수사들을 속이다니요.”
그 말에 중년 장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 가 수사들도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더는 소년 소녀들의 자질을 문제 삼지 않고 가격을 흥정했다.
일다경 후 저 가 여인은 대량의 마석을 지불하고 토음족 노예들을 데리고 시녀의 안내를 받아 문을 나섰다.
“선배님께서는 어느 노예가 마음이 드시는지요? 만족스러운 노예가 없다면 다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때까지도 한립이 아무 말도 없자 장궤가 다가가 예의바르게 물었다.
“노예는 되었네. 이곳에서 판매하는 마정괴뢰를 보여주게!”
“그러시다면 바로 다른 층으로 모시겠습니다.”
중년 장궤는 대문을 나서 철패로 문단속을 하고 전송진으로 걸어갔다. 한립은 조용히 그를 따랐다.
그들이 막 전송진에 오르려는데 웅! 하고 전송진이 울리고 하얀빛 속에서 몇 명의 인영들이 나타났다.
“…….”
움찔한 중년 장궤가 진법 안을 응시하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검은 갑옷을 입은 네 명의 마족 병사들과 비단 옷을 입은 노인 그리고 노란색 의복의 소녀였다.
화신기 수행의 금의(錦衣) 노인은 누런 얼굴에 표정이 음산했고 결단 수행의 황삼(黃衫) 소녀는 동그란 얼굴이 굉장히 수려했다.
검은 마문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소녀는 방금 새로 들어온 노예 같았다.
‘이럴 수가!’
의식으로 소녀를 훑은 한립의 동공이 순간 수축되었다. 금의 노인 역시 중년 사내를 발견하고 표정이 어두워졌다가 곧바로 표정을 바꿔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방 장궤 아니십니까! 손님을 모시고 노예들을 둘러보고 계셨나 본데 제게도 새로 들어온 쓸 만한 아이들이 많으니 손님께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됐습니다! 한 선배님은 마정괴뢰에 관심이 있어 그리로 가는 길이니 황 장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오고 가는 대화로 보아 그들의 관계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귀빈을 모시고 계셨군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선배님, 꼭두각시에 관심이 있으시면 제게도 좋은 꼭두각시가 몇 마리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중년 장궤의 말에 한립을 훑은 노인은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져 예를 취했다.
“거 뭐 하자는 겁니까! 한 선배님은 제가 잘 모시고 있으니까 황 장궤는 새로 들여온 노예나 관리를……. 이, 이 노예에게서 마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설마 성계의 인물이 아니란 말입니까?”
난색을 표하며 쏘아붙이던 중년 장궤가 황삼 소녀를 보고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헤헤, 보면 모르십니까? 저도 고생고생해서 겨우 구한 특별한 아이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차차 나누시지요. 그런데 방 형 수중의 마정괴뢰라면 겨우 원영급의 꼭두각시들일 텐데 한 선배님 눈에 들지 모르겠습니다.”
황 장궤는 서둘러 말을 돌리고 한립을 향해 열정적인 눈빛을 보냈다.
“기어이 한번 해보자는…….”
중년 장궤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려는데 한립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고 황 장궤가 놀랄 만한 말을 했다.
“마정괴뢰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이 아이는 얼마면 되겠느냐? 내가 사겠다.”
한립의 손은 정확히 황삼 소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선배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 노예라면 송구하지만 어렵습니다. 진작 다른 분이 점찍어 놓은 아이라 정말 죄송합니다.”
황 장궤가 입꼬리를 꿈틀하며 서둘러 설명했다.
“만노탑에서는 노예를 예약해 놓을 수도 있는 모양이지?”
한립의 시선이 노인이 아니라 중년 사내에게 가있었다.
“아닙니다! 마석을 지불하는 분이 물건을 가져가는 법이지, 무슨 예약을 하고 말고가 있겠습니까. 황 장궤, 선배님께서 마음에 드신다는데 어찌 그러는가? 설마 한 선배님께서 마석을 충분히 지불하지 못하실까 일부러 그러는 것인가?”
중년 사내가 눈을 깜빡이며 잘 걸렸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만, 조문호 선배님께서 원하는 노예를 제가 어디 아무렇게나 판매할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뒤처리를 어찌 감당하라고요.”
“조 선배님이 이 노예를 원하신단 말입니까?”
황 장궤가 불퉁거리는 소리에 방 장궤가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조문호가 누구지?”
“그것이, 조 선배님은 조 씨 가문의 가주십니다. 겨우 결단기 수행을 지닌 노예 때문에 악연을 맺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닙니다.”
방 장궤가 머뭇거리다 그를 설득했다.
“조 가의 가주? 그래봐야 겨우 연허기 수사일 터. 어찌 되었든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야겠으니 누구든 불만이 있다면 나를 찾아오라 이르게!”
의외이긴 했으나 한립은 냉소를 흘렸다. 그 말에 중년 사내와 노인이 무어라 설명하려는데 한립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순식간에 네 명의 마족 병사 중간에 이르러 황삼 소녀의 팔을 붙들고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만노탑에서 강제로 노예를 데려가기라도 할 작정이 십니까? 연허기 수행을 지닌 선배님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본 탑도 실력자가 머물고 계십니다!”
그것을 본 금의 노인이 놀라 소리쳤고 곁의 병사들도 서둘러 병장기를 들어 올렸다. 한립 옆에 서있던 방 장궤는 기겁해 뒷걸음질 치고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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