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3화. 환야성(幻夜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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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후, 황원 변두리의 상공에서 7명의 연허기 마족들이 둘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노란 비단 장포를 입은 세 명은 똑같이 생긴 새까만 비도를 이용해 검은 마염(魔炎)을 분출했고, 나머지 하얀 장포를 입은 네 명은 하얀 비검을 발동해 눈꽃을 날리며 싸웠다.
마염과 한기가 격돌할 때마다 폭음이 펑펑 터져 나왔다.
그들은 쉽게 결판이 나지 않자 대치 상태에 들어갔는데 마족들 아래에 거대 쥐 마수가 쓰러져 있었다. 털에서 금빛 윤기가 좌르륵 흐르는 거대 쥐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일곱 마족들은 그 마수 시체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듯했다.
하얀 장포 청년 하나가 서늘하게 웃고는 허리춤의 가죽을 건드렸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자욱하게 퍼지고 머리 둘 달린 사자가 나타났다.
크앙!
새까만 사자 마수가 입을 벌려 새까만 바람의 칼날들을 날리자 상대편 비도 세 자루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황포 마족 셋이 사자 마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야염사(夜魘獅)! 이 비열한 저 가 놈아, 감히 가문을 지키는 영수를 불러내? 영수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벌로 화형(火刑)을 당할까 두렵지도 않더냐!”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소리쳤다.
“으하하, 너희같이 쓸모없는 백 가 녀석들이 우리 저 씨 가문의 호법 영수를 어찌할 수 있단 말이냐. 이제 저 금희서(金曦鼠)는 내 것이다!”
사자 마수를 방출한 백포 청년이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큰 형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일단 자리를 피하시죠.”
머리를 묶은 황포 사내가 긴 수염 노인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수련에 진전이 없어 원영 후기에 이른 지 수백 년이 넘었네. 희귀한 금희서의 내단이면 고비를 뚫을 수 있는데 어찌 포기할 수 있겠나. 아우님들께서 이번만 도와주면 결코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일세.”
긴 수염 노인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설마 가문의 비술을 쓰려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내단을 얻어도 후환이 무궁무진할 텐데요!”
야윈 뺨의 황포 사내가 놀라 끼어들었다.
“화신기에 이르지 못하면 노부는 곧 죽은 목숨인데 그런 것을 따질 여력이 있겠나.”
긴 수염 노인은 정말 다른 선택이 없어 보였다.
“큰 형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제가 최대한 버텨보겠습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시간을 끌 테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머지 황포 마족 사내들이 시선을 마주치고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이에 긴 수염 노인도 감격한 얼굴로 고마움을 표했다.
두 황포 마족은 약속한 대로 앞으로 나서서 검은 기운을 일으켜 두 개의 비도를 사나운 구렁이로 바꾸어 비검과 사자 마수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냈다. 그때 긴 수염 노인이 자신의 비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휙!
검은 빛으로 변한 비도는 그의 몸속으로 돌아갔고 노인은 열손가락에서 버들잎 같은 칼날들을 불러내 길게 심호흡을 했다.
노인이 막 버들잎 칼날들을 자신의 단전을 향해 꽂으려는 찰나 하늘 끝에서 거대한 빛구슬이 나타나 쾌속으로 다가왔다.
놀란 노인이 움직임을 멈추고 살피니 노란 빛덩이 속에 거대 선박이 보였다. 평범한 마족들은 지닐 수 없는 비행 법기였는데 그 위에 여러 명의 수사들이 서서 이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팔황황목주(八荒黃木舟)다! 가문 어른들이 만황에서 돌아오고 계시구나!”
한눈에 선박을 알아본 노인은 기쁨에 차 소리쳤다. 그 소리에 다른 마조들도 분분히 싸움을 멈추었다.
그들의 등장에 황포 사내들은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기뻐했지만 상대편 백포 마족들은 얼굴이 어두워져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곧 선박에서 여인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희는 아홉째 숙부네 3형제가 아니더냐? 어째서 저 가 수사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더냐?”
여인 곁에는 낯선 푸른 장포 청년과 두 명의 연허기 마족이 서있었다. 백운형 등 백 가 마족들과 한립이었다.
몇 달 만에 황무지를 벗어난 그들은 우연히 전투중인 마족들을 발견했다. 백운형이 백 가의 복색을 한 삼형제를 알아보고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질손 백명이 열셋째 고조(姑祖)님과 열다섯째 열일곱째 숙조(叔祖)님들을 뵙습니다! 저 가의 자제들이 저희에게서 금희서를 빼앗아가려 하여 싸우던 중이었습니다.”
긴 수염 노인이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하고 서둘러 예를 올렸다.
“오, 쉽게 마주치기 어려운 마수이지. 이곳에서 금희서를 찾았다니 너희가 운이 좋았구나. 너희는 저 가의 자제들이라고? 아직까지 우두커니 서서 뭐하는 것이냐, 어서 물러나지 못할까!”
백운형은 땅 바닥의 금색 거대 쥐를 보고는 네 명의 백포 마족들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이에 막 사자 마수를 방출한 청년이 무어라 해명하려는데 옆의 두 동료가 동시에 그의 입을 틀어막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백운형이 어깨를 으쓱하고 한립을 향해 빙긋 웃음 지었다.
“가문의 사소한 일로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이제 만황을 거의 벗어났으니 환야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네요! 원래 환소사막과 황무지 중간에 건립된 성이라 한 달만 더 가면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달이면 금방 가겠습니다! 환야성은 물론이고 환소사막도 가보지 못해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성계에서 유명한 금지 중 하나라 사막 안에서 괴이한 일도 많이 생긴다고요?”
“하하, 한 형께서 환소사막에 관심이 있으실 줄은 몰랐는걸요? 환야성 현지 수사들도 사막은 너무 위험하여 잘 드나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형께서 궁금하시면 제가 가는 동안 상세히 설명을 드리지요.”
“그래주신다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거대 선박이 다시 출발하고 한립과 백운형은 자연스럽게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옆에서 백은과 백영이 시선을 마주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긴 수염 노인은 멀어지는 선박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형제들과 함께 얼른 바닥으로 내려가 금희서 시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 * *
엿새 후, 선박은 만황 너머 구릉지대로 들어갔다. 수풀로 뒤덮인 언덕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 달 후에는 언덕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노란 바위산을 깎아 만든 성이 나타났다. 절반쯤 산에 기대 만들어진 성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솥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초대형 금제가 펼쳐져 있었다.
“이곳이 백 가가 있는 환야성입니다. 성계의 다른 초대형 성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외진 지역에 세워진 성 치고는 제법 규모가 있는 편이지요. 마존급 수사들도 십여 분 넘게 계시고요. 저희 가문이 이곳의 4대 가문 중 하나라 필요한 것이 있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저희 가문의 이름을 대면 대부분 해결이 될 것입니다.”
백운형이 한립 옆에 서서 설명했다.
“선자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안 그래도 환야성 안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려 했는데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리하겠습니다.”
“따로 일행이 없으신 듯한데 괜찮으시면 저희 가문의 객경루(客卿樓)에서 머무시지요. 한 형을 보시면 가문 어르신들도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객경루라……. 아직도 저를 회유하려는 마음을 거두지 않으셨나 봅니다.”
말하면서 한립이 빙긋 미소 지었다.
“한 번에 그 많은 혈선복들을 처리하신 것을 보면 한 형께서 연허 후기를 대성해 합체기에 이를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 놀라운 실력의 산수를 만나면 어느 세력이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저도 예외는 아니고 말입니다.”
백운형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숨김없이 답했다.
“허나 제 대답은 이전과 같습니다. 수련의 고비를 넘지 못해 도처를 떠돌며 경험을 쌓고 있는 처지라 앞으로 몇 백 년 내로는 어느 세력에도 가담할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만일 이후 사정이 달라지면 백 가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하아, 그 말씀 제가 꼭 기억하고 있지요! 백 가의 문은 언제든 한 형에게 열려 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아, 복천 노조님에 관한 일은 돌아가는 대로 집안 어르신들께 아뢸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립의 두루뭉술한 답에 백운형이 아쉽다는 듯 작게 탄식했다.
“듣자니 환소사막을 지나려면 팔족마석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지요. 혹시 백 가에서도 그런 마수를 키우고 있습니까?”
“팔족마석이요? 환소사막에 들어가려 하십니까?”
“그럴까 생각중인데 걸어서 사막을 건너려면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해서 말입니다. 백 가는 팔족마석을 키우지 않습니까?”
“있기는 한데, 한 형께서 팔족마석을 구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희 가문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들도 외부인에게 팔족마석을 팔지는 않으니까요.”
“오, 어째서입니까? 가격이 문제라면 저도 모아 놓은 마석이 꽤 됩니다.”
“마석을 아무리 많이 지불하셔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팔족마석이 굉장히 희귀하기도 하고 마수가 몇몇 가문에 갖는 의미 때문이기도 하지요. 환야성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근간이 되는 마수를 어찌 쉽게 팔 수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겨우 마수 몇 마리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요.”
“비밀이랄 것은 없지만 가문 어르신들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제가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려운 사안입니다. 복천 노조님을 뵈었을 때 직접 물어보시지요. 어차피 팔족마석에 관해서는 오직 노조님만이 결정을 내리실 수 있으니까요.”
한립의 의아한 표정에 여인이 머뭇거리다 신중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팔족마석을 얻으려면 복천 선배님을 뵙는 수밖에 없겠군요.”
한립은 생각에 잠겼고 백운형도 더는 말이 없었다.
이때 거대 선박이 드디어 환야성 인근에 이르러 성문 앞에서 멈추었다. 성문을 드나들던 마족들은 노란 선박을 멀리 피해가며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 선박의 내력을 알고 있는 듯했다.
한립과 백 가의 마족들이 선박에서 내리고 백운형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자 거대 선박이 작게 줄어들어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를 포함한 일행은 들뜬 얼굴로 성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랜 세월 가문을 떠나있다 무탈하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으니 발걸음이 가벼운 것도 당연했다.
한립은 시종일관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그들 틈에 섞여 있었다. 성문의 갑옷을 걸친 병사들은 백운형 일행을 보고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바로 길을 터주었다.
성 안으로 들어가자 한립 앞에 네모나고 동그란 황토색 건물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누런 흙더미가 셀 수 없이 많이 모여 있는 느낌이었다.
건물들 사이사이로 대로가 나있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성에 비해서는 좁은 편이었고 높은 대형 건물 혹은 탑, 거대 누각이 곳곳에 비죽 치솟아 있었다.
‘금공금제 뿐 아니라 의식을 제한하는 강력한 금제가 펼쳐져 있구나.’
그의 강력한 의식으로도 일정 거리 이상은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전력을 다하면 더 멀리도 탐색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금제를 건드려 정체가 탄로 날 것이다.
백 가 일행은 한 골목으로 접어들어 길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슴과 말을 고루 닮은 괴수들이 끄는 마차 여러 대가 우르르 몰려왔다.
마차 옆에는 크게 ‘백(白)’ 자가 고대 문자로 적혀 있었고, 가죽 장포를 입은 사내들이 마차를 끌고 있었다.
“소인, 어르신의 명을 받들어 부인을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마차에서 새까만 피부의 거한이 내려 공손히 백운형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알았네. 한 형, 바로 백 가로 가보시겠습니까? 저희 가문에서 머물면 오늘 바로 노조를 뵐 수 있을지 모르는데요.”
“괜찮습니다. 선자께서도 오랜만에 가문으로 돌아와 하실 일이 많으실 것 아닙니까. 저는 홀로 성을 좀 돌아보다 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포권을 해보였다.
“그렇다면 더는 권하지 않겠습니다. 이 옥패는 제가 늘 지니고 다니는 것이니 백 가로 오셔서 이걸로 저를 찾으시면 될 것입니다.”
여인은 아쉬운 얼굴로 답하고는 푸른 옥패를 꺼내 던져 주었다. 옥패를 받은 한립은 고개를 숙여 신물을 살폈다.
평범한 옥 속에 핏빛 실 같은 것이 섞여 있었고 선녀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선녀의 모습이 신기하게도 백운형과 조금 닮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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