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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02화 (959/2,000)

1202화. 백운형

*

퍽! 우두둑 우두둑!

몇 시진 후 한립의 몸에서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음이 들려왔다. 그는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는 금빛을 일으켜 부풀었던 몸을 원래대로 돌렸다. 그제야 동굴 안이 조용해졌다.

한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쓴웃음을 지었다.

백맥련보결을 익히면서 그가 느낀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가 최선이었다. 무리해서 수련을 계속하면 경맥이 터져 중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파앗!

그는 진법은 나두고 손을 저어 삼두육비 금신법상만 흩어버렸다. 그리고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조용히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러자 금빛 대신 일곱 빛깔의 기운이 떠올라 어느 때보다 밝은 빛으로 그를 감싸 안았다.

그의 얼굴에 반짝이는 기운이 흘렀고 미간의 검은 요목(妖目) 역시 가볍게 반짝였다. 백맥련보결 수련을 마치자마자 또 다른 선계 신통인 연신술(煉神術) 수련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합체 후기에 이르러 연신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연신술 2성 수련을 마치면 의식이 몇 배로 불어날 테니 이번 마계행에서 세령지와 정령련을 찾아가지 못해도 대승기에 이를 또 다른 길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연신술의 중요성을 잘 알기에 천연성에서 마족들과의 전쟁을 마치고 매일 틈나는 대로 수련을 해왔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고 2성은 1성에 비해 더욱 어려워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 * *

이튿날 아침 푸른 빛줄기가 섬을 날아올랐고, 또다시 이틀이 지난 후에는 바다를 벗어나 어두운 녹색 산맥지대로 진입했다.

기이할 정도로 습한 산맥은 다양한 색의 안개가 땅에서 피어올라 대지의 표면이 흐릿하게 가려져 있었다.

그는 안개 속에서 정체 모를 마수와 마주칠까봐 일부러 고공에서 날아가며 수시로 산맥을 훑었다. 만 장 이상의 고공은 오히려 강력한 거대 괴조들과 마주칠 수 있었기에 적당한 고도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의 예상보다 산맥 지대가 넓어 사나흘을 쉬지 않고 날아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흠…….’

그 후로도 연달아 열흘 넘게 비행했지만 산맥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그는 더욱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간 몇몇 마수 떼의 습격을 받았고 흡마의들 보다 백배는 더 큰 거대 마수들도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마수들은 그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고 서령천화로 재로 만들어 버리고 이동했다. 며칠이 지나 눈앞의 산봉우리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립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법력을 끌어올려 속도를 높였다.

‘어쩐다.’

바위산에 도달한 그는 그대로 그곳을 지나치려다 순간 눈빛이 달라져 허공에 멈춰 섰다. 한립은 잠시 주저하다 방향을 틀어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에는 열댓 명의 남녀 마족들이 날개 달린 새빨간 박쥐들과 격렬히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화신기 수행을 지녔고 그 틈에 연허기 수사 셋이 진법을 펼쳐 각양각색의 마기를 발동해 새빨간 박쥐들을 막고 있었다.

30마리가 넘는 새빨간 박쥐들은 피부에 검은 무늬가 있었고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잿빛의 마풍(魔風)을 뿜고 입에서는 청록색 화염을 분출했다. 바람과 불이 서로를 북돋아 더욱 치명적인 공격이 되었다.

녹색 화염이 바람을 타고 녹색 불바다를 이루어 거목 위의 남녀 마족들을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게 가두었다.

마족들은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세 연허기 마족들이 발동하는 강력한 신통과 진법의 힘에 기대 활활 타오르는 불바다 속에서도 잘 버티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족들 아래에서 그윽한 향기가 풍겼다. 가지와 잎이 무성한 거목에 엄지손가락 크기의 비취색 과실 몇 개가 열려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광수(紫光樹)에 자령과(紫靈果)가 열렸구나! 이렇게 거대한 자광수는 정말 보기 드문 것인데.”

한립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자령과는 진귀한 영과였고 이렇게 거대한 나무에서 열린 과실이라면 특수한 효과를 낼 수도 있겠지만 합체기에 이른 그에게는 그다지 필요치 않았다.

그는 과실을 살피고 나서야 마족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법력이 거의 바닥났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화신기 수행의 마족들이 버티지 못하면 연허급 마족 세 명만으로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연허급 마족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거기 수사 분! 저희는 환야 백 가 사람들입니다! 저희를 도와주시면 백 가에서 반드시 후한 답례를 할 것입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복사꽃처럼 화사한 얼굴을 지닌 미인이었다. 그녀는 녹색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높게 올려 묵고 있었다. 그녀는 진작 한립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참다못해 도움을 청한 것이다.

한립이 연허 후기로 기운을 갈무리하고 굳이 은신술을 펼치지 않은 때문이었다.

“환야성(幻夜城)의 전향(荃香)으로 유명한 백 씨 가문을 말하는 것입니까?”

“저희 가문을 들어보셨다면 제가 허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심마에 맹세하지요. 목숨을 구해주시면 그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여인은 한립의 얼굴에 어린 망설임을 보고 급히 맹세했다. 그 말에 침음하던 한립이 담담히 답했다.

“모두 백 가의 분들이라니 도와드리겠습니다. 방금 한 약속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몸이 커다랗게 불어나 빼곡하게 검은 비늘로 뒤덮였다. 특히 검은 기운이 흐른 그의 손은 칼날처럼 기다란 손톱이 자라있었다.

그는 변신을 마치고 마풍으로 변해 새빨간 박쥐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마풍이 다가오자 박쥐 떼 중 절반이 한립을 향해 녹색 화염을 분출했다. 그러나 화염이 밀어닥치기 전에 지독한 썩은 냄새가 먼저 불어왔다.

한립은 웃음을 흘리며 소매 속에서 푸른 기운을 불러내 녹색 화염을 밀어내고는 펄쩍 뛰어올라 허공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는 새빨간 박쥐 옆에 나타나 두 손을 휘저었다. 백여 개의 검은 손톱 그림자가 박쥐를 덮쳐 핏물로 만들었다. 주변의 박쥐들이 기겁해 서둘러 달아나려 했지만 한립은 이미 다른 박쥐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역시 손톱 그림자들이 박쥐를 수많은 파편으로 조각냈다. 이때부터 그가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질 때마다 박쥐가 한 마리씩 죽어나갔다.

신출귀몰한 움직임에 새빨간 박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가끔 민첩한 박쥐 한두 마리가 그의 신형을 조준해 녹색 화염을 날렸지만 검은 갑옷에 막혀 흩어졌다.

순식간에 열댓 마리의 박쥐들이 그의 손에 죽어나가자 녹색 불바다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던 마족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움을 청한 여인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박쥐들은 피부가 강철처럼 강했고, 평범한 마기로는 죽일 수도 없었다. 최상급 마기를 사용해야 흠집이 날 정도였다. 그런 박쥐들을 한립은 맨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으니 경악할 만했다.

‘도대체 어떤 마공을 수련했기에 몸이 저렇게 단단하단 말인가? 설마 전설 속의 상고 마공 중 하나를 수련한 자인가!’

여인이 놀라고 있을 때 남은 박쥐 마수들도 한립의 사나운 공격에 겁을 먹었다.

끽끽!

박쥐 떼 속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다른 박쥐들보다 두 배는 큰 거대 박쥐가 튀어나왔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 기운도 강하고 머리에 뇌전을 치직거리는 보라색 뿔이 솟은 녀석이었다.

거대 박쥐는 다짜고짜 입에서 녹색 화염을 뿜어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립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검은 갑옷에서 불러낸 주술문자로 새까만 보호막을 펼쳤다.

치지지직!

녹색 불바다가 새까만 보호막과 충돌해 둘로 갈라졌다. 한립 근처로는 가지 못한 것이다.

콰릉!

그것을 본 거대 박쥐가 분노해 끽끽! 거리며 머리의 보라색 뿔에서 사발 굵기의 은색 뇌전 두 줄기를 뿜었다. 이에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두 손가락을 펼쳤다.

콰르릉 콰쾅!

천둥소리와 함께 청백색 뇌전이 손끝을 빠져나가 은색 뇌전을 없앴다. 그 틈을 타 그는 허공에서 한 걸음을 내디뎌 거대 박쥐의 위로 이동해 새까만 손톱을 휘둘렀다.

팔뚝 길이의 새까만 손톱 허상 다섯 개가 날아들고 거대 박쥐가 화살처럼 뒤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한립은 헛웃음을 흘리며 기운을 증폭해 새까만 손톱을 몇 배로 늘여 달아나려는 마물의 날개 중 하나를 조각냈다.

끼끼끽!

대량의 피가 솟구치고 거대 박쥐가 비명을 질러댔다. 거대 박쥐는 드디어 두려움에 떨며 날개를 마구 펄럭여 사방팔방으로 가느다란 핏빛 실을 내뿜었다. 피처럼 붉은 실들은 폭발해 핏빛 안개를 만들어 박쥐를 숨겨 주었다.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진 한립은 검은 손톱 허상으로 핏빛 안개에 수많은 구멍을 뚫었지만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핏빛 실 한 줄기가 달아나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저건 혈영둔!’

그는 거대 박쥐가 살아남기 위해 펼친 둔술을 바라보다가 남은 새빨간 박쥐들을 훑었다. 거대 박쥐가 도망가자 적잖은 동족을 잃은 박쥐들의 녹색 불길의 기세가 이전만 못했다.

이에 갇혀 있던 마족들이 연허급 마족들의 지휘하에 강력한 신통을 발휘해 불바다를 밀어냈다. 한립은 팔짱을 끼고 더 이상은 나서지 않았고 감히 그에게 달려드는 박쥐들도 없었다.

일다경이 지나 드디어 불바다를 벗어난 마족들은 나머지 박쥐들을 몰아내고 다가왔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백운형이라 하고 이쪽은 저와 같은 항렬의 오라버니뻘 되는 백은, 백영 수사입니다. 수사의 존함을 여쭈어도 될 지요?”

여인은 예를 취하고 방실방실 웃으며 자신과 다른 연허기 수사들을 소개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백은이라 불린 평범한 외모의 중년 사내와 백영이라 불린 중년 유생도 한립에게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떠도는 산수이니 그냥 한 수사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오래전부터 환야 백 가의 명성은 들어왔습니다. 가문의 비법으로 제련한 전형이 악한 기운을 배척하고 마음을 맑게 해주는데 특별한 효과가 있다더군요.”

한립도 예의 바르게 포권을 해보였다.

“산수요? 홀로 저 많은 혈선복(血線蝠)들을 죽이시고 실력이 대단하신데 오랜 세월 수련만 하셨나 봅니다. 그렇지 않으셨으면 제가 분명 성함을 들어봤을 텐데요.”

“그리 대단한 실력도 아닙니다. 다만 수련만 하며 나돌아다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선자께서는 자령과를 위해 환야성에서 먼 이곳까지 오신 것입니까?”

“예, 저희 가문에서 최근 제련중인 단약에 자령과가 꼭 필요해서 제가 가문의 수사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몇 년간 고생 끝에 겨우 자령수를 찾았지요! 사실 한 형의 도움을 받았으니 응당 과실의 절반을 드려야겠으나 저희 가문에서 쓰임이 많은 과실이라 마석으로 대신 값을 치러도 될 지요?”

그의 말에 흠칫 놀란 백운형이 바로 표정을 추스르고 물었다.

“하하, 그리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자령과가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으니 선자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형! 제가 어서 마석을 모아 오겠습니다!”

백운형은 가문 수사들을 모아 거목에서 자령과를 따게 한 다음 조심스럽게 함에 넣고 마석으로 가득한 저물탁을 꺼내 한립에게 건넸다.

의식으로 마석 수량을 확인한 그가 저물탁을 거두는 것을 보고 백운형이 더욱 밝게 웃었다.

“한 형께서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모르겠으나 괜찮으시면 저희와 같이 잠시 환야성에 들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환야성은 성계에서도 제법 명성이 있는 성이라 몇몇 독특한 영물을 구할 수도 있고, 제가 심마에 맹세를 했다시피 백 가로 가시면 가문 어르신들이 저희를 구해주신 사례를 할 것입니다. 부디 거절 마시고 함께 가시지요.”

백가의 직계 자제인 백운형은 한립의 실력을 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희 가문 어른 중 한 분이 연체술을 수련하셨습니다. 한 형께서도 그 분께 지도를 받으시면 수련에 퍽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신데 가문의 어른으로서 박대하지 않으실 것이고요.”

중년 유생 백영이 나서서 거들었다.

“오, 백 가에 연체술을 익힌 선배님이 계셨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저도 한 번 만나 뵙고 싶군요.”

그 말에 흥미를 느낀 한립이 관심을 보였다.

“노조(老祖)께서는 단천마공(鍛天魔功)을 극성으로 익히셔서 성조에 이르기까지 단 한걸음을 앞두고 있다고 회자되는 분입니다. 복천거사라고 불리시는데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백운형이 미소를 머금었다.

“복천 선배님에 대해서는 처음 듣지만 연체 마공을 그렇게까지 익히셨다면 가르침을 구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차였으니 수사들을 따라 환야성으로 가지요. 백 선배님께 지도받을 수 있다면 기연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언제 성으로 돌아가실 예정이십니까?”

“자령과를 얻었으니 저희도 바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법력을 회복하기 위해 며칠 만 쉬고 바로 돌아가야지요.”

한립의 대답에 백운형이 크게 기뻐했다.

백 가 수사들을 주축으로 인근 산에 임시 동굴을 파고 휴식을 취한 일행은 닷새 후 거대한 배 형태의 마기를 타고 환야성 방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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