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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99화 (956/2,000)
  • 1199화. 마조(魔潮)와 충조(蟲潮)

    *

    “수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따르겠습니다.”

    한립이 느긋하게 대답하며 성큼 한 발을 내디뎠고 그의 신형이 괴이하게 사라져 혈아성 성주 근처에서 나타났다.

    깜짝 놀란 은목 노인은 두 소매를 동시에 펄럭이고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도처의 핏빛 기운들이 치솟아 한립을 덮치려 들었다.

    “겨우 이런 살기(煞氣)로 나를 공격하는 겁니까.”

    한립이 헛웃음을 지으며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색 법상을 불러냈다. 한립과 똑같이 생긴 얼굴로 여섯 눈을 부릅뜬 범상이 여섯 개의 팔을 휘둘러 금색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쿠르릉!

    소용돌이 속에서 흘러나온 금은색 주술문자들이 저항할 수 없는 괴력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한립에게 몰려들던 핏빛 기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부쩍 줄어들어 있었다.

    “말도 안 돼!”

    혈아성 성주가 안색이 급변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금색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핏빛이 바르르 떨고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흡입력에서 벗어나려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본 한립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가 법력을 끌어올리자 금색 소용돌이가 몇 배로 커져 더욱 강한 힘을 발휘했다.

    휘이잉!

    핏빛 기운들은 끌려가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져 소용돌이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혈아성 성주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아무리 법결을 쏘아 보내도 소용이 없었다.

    “감히 내 칠살혈살을 빼앗아 가? 네 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더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는지 성주는 두 팔을 펼쳐 무수히 많은 푸른 뇌화를 불러냈다.

    가만히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곤충 떼도 노인의 조종에 양노이와 금호 마존을 버려두고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혈골충은 한 마리 한 마리가 강철처럼 단단한 몸과 괴력을 지닌 마충(魔蟲)이었다. 은목 노인은 괴상한 소용돌이가 혈골충 떼마저 어찌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동시에 한립 머리 위에서 희미한 검은 빛이 나타났다. 혈아성 성주의 제2화신이 기습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강대한 의식을 지닌 한립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등 뒤의 법상을 이용해 여섯 손에서 뇌전 구슬들을 뿜어 검은 빛을 공격했다.

    콰르릉 콰쾅!

    경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뇌전 구슬이 폭발해 금색 뇌전 진법을 만들어 검은 기운 속 제2화신을 가두었다. 진법 속에서 무수히 많은 뇌전들이 독사처럼 달려들어 검은 화신에게 내리꽂혔다.

    겨우 합체 초기의 화신은 그의 벽사신뢰를 이겨내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결국 성주의 화신은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이어서 푸른 뇌화와 곤충 떼를 본 한립이 금색 소용돌이를 가리켰다.

    콰릉!

    금색 소용돌이가 급격히 수축했다 폭발해 광풍과 함께 금빛을 비처럼 쏟아냈다. 이에 밀려들던 푸른 뇌화는 금빛에 벌집처럼 뚫려 사라졌지만 곤충 떼는 잠시 주춤했을 뿐 여전히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도 피식 웃음을 흘리고 검은 고리를 방출했다. 고리가 회전하며 금빛 꽃잎들이 웽! 하고 날아올라 금색의 딱정벌레 천여 마리로 변했다. 성체 서금충들이었다.

    “가라.”

    한립의 한 마디에 서금충들이 날개를 펄럭여 검은 곤충 떼와 격돌했다.

    사각 사각 사각.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셀 수 없이 많은 검은 곤충들의 잔해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흑골충이 아무리 단단해도 서금충을 당할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곤충 떼는 크게 줄어 이제 겨우 수백 마리 밖에는 남지 않았다. 그리고 바닥에는 마충들의 잔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한립은 멍한 얼굴의 은목 노인을 쳐다보았다.

    웽웽!

    금색 곤충 떼가 방향을 틀어 남은 흑골충 떼를 놔두고 노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제2화신이 목숨을 잃어 타격을 입은 혈아성 성주는 믿고 있던 마충 마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자 혼비백산해 달아나려 했다.

    그 순간 서늘한 코웃음 소리가 성주의 두 귀를 파고들었다.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극통을 느낀 그는 경련을 일으키고 추락했다. 그러자 금색 곤충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서금충 떼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고 결국 핏빛에 휩싸인 원영만 남게 되었다. 성주의 원영은 검은 영패 8개를 조종해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한립은 일부러 서금충들이 전력을 다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는 손을 뻗어 쉭! 하고 핏빛 고리를 불러들였다. 서금충들에게 갉아 먹힌 성주의 육신이 지니고 있던 저물탁이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그 안을 살피다 미간을 좁혔다. 나머지 성전 3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저를 그냥 보내주면 성전을 드리겠습니다.”

    성주 원영이 그것을 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내가 직접 찾아도 될 것 같은데?”

    원영을 훑은 한립의 두 눈이 남색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금충들이 달려들어 노인의 검은 영패 8개를 마구 갉아댔다. 영패가 쪼개지고 원영이 애달픈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금충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손바닥 크기의 벽돌 3개가 남아 있었다.

    “원영 안에 보물을 숨기고 있어 영목 신통으로 살피지 않았으면 찾지 못할 뻔했구나.”

    한립은 웃음을 머금고 푸른 기운으로 벽돌들을 불러들였다. 4개의 성전에는 마계의 실력자가 남긴 공법 뿐 아니라 비밀 창고 지도까지 담겨 있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콰쾅!

    그의 뒤쪽에서는 폭음이 들려왔다. 양노이와 금호 마존은 보라색 거대 솥이 방출한 고대 문자에 갇혀 있었는데 금은색 주술문자들과 보라색 기운이 겹겹이 그들을 둘러쌌다.

    바로 한립이 혈아성 성주를 상대하며 슬쩍 불러낸 자언정이었다. 그가 은목 노인과 싸우는 동안 달아나려던 양노이와 금호 마전은 자언정에 붙들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중이었다.

    양노이는 녹색 화염 교룡을 조종했고, 금호 마존은 금색 호리병박에서 금색 기운을 불러냈지만 자언정이 내뿜은 고대 문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언정은 현천잔보를 제련한 보물답게 두 명의 합체기 마존을 가둬두는 것도 가능했다. 그가 직접 보물을 조종하면 그 위력은 배가 될 것이다.

    양노이와 금호 마존은 혈아성 원영을 죽인 한립이 자신들을 쳐다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금 형,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 나겠습니다. 어서 피하시지요!”

    양노이가 핏기없는 얼굴로 열댓 개의 최상급 마기들을 불러내 폭파했다.

    콰콰콰쾅!

    마기들의 자폭에 주변의 금제에 구멍이 뚫렸고 양노이는 녹색 빛덩이로 변해 달아났다. 금호 마존도 이를 악물고 비술을 펼쳐 호리병박에서 금빛 기린 허상을 불러냈다. 기린 허상은 크게 입을 벌려 무시무시한 화염을 뿜어냈다.

    화염이 닿는 곳은 자언정의 금제로 효력을 잃었다. 금호 마존은 기린 허상에 둘러싸여 하늘을 갈랐다.

    “오, 기린의 기운에다 불 속성이라니!”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수결을 맺었다. 금색 곤충 떼는 커다란 칼날로 변해 양노이를 쫓았다. 그리고 소매 속에서 푸른 검빛이 튀어나가 기린 허상으로 둘러싸인 금호 마존을 갈랐다.

    그러나 금호 마존도 꽤나 실력이 있는지 신음을 흘리고 피를 뱉어 기린 허상에 흡수시켰다. 그러자 잘려나갔던 기린 허상이 원래대로 회복되어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나오거라!”

    한립의 명에 작은 짐승이 나타났다.

    “저 자가 지닌 보물이 네게 유용해 보이니 가져오너라.”

    “감사합니다, 주인님! 제가 보기에도 화기린(火麒麟)의 뼈를 넣은 보물 같았습니다.”

    표린수가 멀어지는 금색 기린 허상을 향해 눈을 빛냈다. 짐승의 몸이 삽시간에 열 배로 불어나 네 발로 허공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표린수의 속도와 실력에 중상을 입은 마족 존자 하나를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홀로 남은 한립은 지면으로 내려가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일다경 후 눈을 뜬 그는 하늘 끝에서 웽웽거리며 돌아오는 금색 곤충 떼를 보고 웃음을 머금었다. 금색 꽃잎으로 돌아간 서금충들이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가고 또 다른 방향에서 표린수가 돌아왔다.

    표린수는 한립을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대여섯 살 가량의 귀여운 여자 아이로 변했다.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어서 도망 가야해요!”

    “무슨 큰일이 났다는 것이냐? 설마 그자를 놓친 것이냐.”

    “아뇨, 그 자는 벌써 처리했죠. 그런데 마조, 아니 충조(蟲潮)가 몰려옵니다! 마충들이 엄청 많이 몰려오고 있어요!”

    “충조!”

    한립은 흠칫 놀라 표린수가 날아든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은 쪽빛 하늘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러다 잠시 후 하늘 끝이 어둑해지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녹색 구름 같은 것이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놀란 한립은 의식을 퍼트리고 체내의 영력을 눈으로 집중해 명청령안을 발동했다. 모호하던 녹색 구름 속에 황록색의 작은 마수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나비의 몸에 사자의 머리를 한 마수들은 황록색 깃털로 온몸이 북실북실하고 두 눈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접미수! 어찌 접미수 마조가 여기까지……. 네가 말한 충조가 저것들을 일컬은 것이더냐?”

    접미수는 나비의 몸을 지녀 마충으로 불려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다른 합체기 수사들에게는 위협이 되어도 진작 만독불침의 몸이 된 그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저것들이 아니라, 그 뒵니다.”

    하지만 여자 아이는 손으로 녹색 구름 뒤를 가리켰다.

    “그 뒤?”

    움찔한 한립이 녹색 구름 뒤쪽을 살피고 표정이 달라졌다. 언제부터인지 녹색 구름 뒤로 보라색 구름이 따라붙고 있었는데 하늘 절반을 가릴 만큼 양이 엄청났다.

    보라색 구름이 녹색 구름과 겹쳐질 때마다 섬뜩한 소리가 울리고 수만 마리의 접미수들이 사지를 잃고 추락했다.

    보라색 구름에서도 기다란 곤충 다리가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헉, 흡마의(吸魔蟻)!”

    보라색 마충을 발견한 한립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어서 성으로 돌아간다.”

    그가 곧바로 푸른 둔광을 일으켜 혈아성 방향으로 날아갔다. 여자 아이도 빙글 돌아 짐승의 모습을 하고 한립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충조의 속도는 느리지 않았지만 전속력을 낸 한립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보라색 구름이 녹색 구름을 따라잡아 완전히 삼키고 돌연 썰물처럼 뒤쪽으로 물러나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서도 결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머릿속으로 흡마의에 대한 자료를 떠올렸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접미수 같은 극독을 지닌 마수들이 마조를 형성하더니 뒤이어 흡마의 충조까지 나타나다니. 흡마의 충조는 마계에서도 재난으로 불리는 일이 아니던가.”

    흡마의는 연허기 수사와 비슷한 수행을 지녔지만 충조를 이루면 아무리 수행이 심후한 수사도 절망에 빠트릴 수 있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자연재해였다.

    듣기로 협마의 충조가 휩쓴 지역은 풀 한 포기도 남아나지 못한다고 했다. 접미수 마조도 위력이 대단하지만 흡마의 충조와 비교하면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소문에 따르면 성조급 존재도 흡마의 충조에 갇혀 법력이 고갈된 후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실력에 자신 있는 한립이라도 그런 흡마의 충조에는 대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멀리 혈아성의 윤곽이 보일 무렵 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혈아성이 크고 작은 마수들로 물샐틈없이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 수가 족히 수백만 마리는 넘는 듯했다.

    그 중 강력한 기운을 지닌 몇 마리는 마족의 마존 급과도 비슷한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 괴이한 것은 마수들이 혈아성을 공격하는 대신 똘똘 뭉쳐 황야 쪽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혈아성 성벽 위에는 수많은 마족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 중에는 혈아성 병사들도 있었고 그냥 성 내에 머물던 평범한 마족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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