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8화. 칠살혈살과 흑골충
*
“흥, 그때 일을 이용해 경매회에 가짜 성전을 출품해 나를 유인한 것이군요.”
혈아성 성주가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물었다.
“경매 전 감정을 통과한 성전이 어찌 가짜일 수 있겠습니까. 일부러 구결 일부를 훼손했을 뿐 진품입니다. 수사께서 여기까지 저를 쫓아온 것도 4번째 성전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양노이가 소매 속에서 비취색 목함을 꺼내 들고 의미심장하게 성주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든 내게 성전이 꼭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거래인지 말해보시지요.”
“서로 잘 알다시피 4개의 성전은 전설 속의 ‘읍령밀도(泣靈蜜圖)’와 연관이 있습니다. 읍령 성조의 4개의 성전을 모으면 그분의 모든 신통과 유산을 숨겨 둔 비밀창고 지도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그 안의 보물 중에는 성계 비행 보물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묵령성주(墨靈聖舟)도 포함되어 있고요. 그것을 지니면 성조가 죽이려 들어도 달아날 수 있을 겁니다. 서로 힘을 합쳐 비밀 지도를 구한 다음 보물창고를 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게는 성전이 3개나 있습니다. 겨우 성전 하나를 지닌 수사와 힘을 합쳐 보물 창고를 털고 그 안의 보물을 똑같이 나누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듯싶은데요.”
혈아성 성주도 진작부터 용건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고 말했다.
“성전을 몇 개를 지니든 4개를 전부 모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전 3개로 비밀창고 지도를 찾았으면 성주께서 오랜 세월 혈아성에 몸을 숨기고 있었을 리도 없을 테지요.”
양노이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전에 당신이 지닌 성전이 진짜인지도 확인해야 하고요.”
“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것입니까? 설마 제가 그 말을 믿고 성전을 그냥 내드릴 거라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아닙니다. 수사가 영력을 이용해 성전을 발동하면 제가 비술로 진위를 감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알겠습니다. 수사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군요.”
“호쾌한 대답을 들으니 벌써부터 저와 진심으로 협력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년 사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은목 노인이 희색을 드러냈다. 상대와 얼마간 실랑이를 더 할 줄 알았는데 선선히 제안을 수락한 것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자, 잘 보십시오.”
양노이가 목함을 쳐서 뚜껑을 열고 투명한 벽돌 모양의 성전을 불러냈다. 손을 뻗은 그는 서서히 성전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약속한 대로 성주도 수결을 맺고 은색 눈을 반짝이며 성전을 관찰했다. 강력한 의식의 힘이 노인의 미간에서 빠져나와 성전을 감싸고 샅샅이 훑었다.
펑!
그런데 갑자기 은빛을 터트린 성전이 은빛의 점들로 쪼개져 터져나갔고 은빛 기운이 노인의 의식의 힘을 빨아들였다.
“역시!”
혈아성 성주가 고함을 치며 몸에서 핏빛이 새어나와 보호막을 만들었다. 지척에서 기다란 금빛이 날아들어 노인의 목을 휘감고 지나갔다.
이상한 것은 동시에 양노이 등 뒤에서도 파동이 일고 창백한 악귀 손이 나타나 손톱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뜻밖에도 양노이와 성주 모두 습격을 받았다.
혈아성 성주가 금빛을 피하려 했지만 의식의 힘이 은색 기운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 상태라 민첩한 대응이 어려웠다.
탱!
금빛은 성주의 목을 자르려다 핏빛 덩이의 폭발에 튕겨나갔다. 빛덩이 안에서 핏빛 옥패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방어용 마기가 저절로 발동되어 치명적인 일격을 막은 것이다.
성주가 식은땀을 흘리며 핏빛 돌풍을 일으켜 의식의 힘을 강제로 회수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멀리 다른 바위 위에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이 빠르게 그 뒤를 쫓고 있었다. 안정을 되찾은 성주가 입에서 새까만 악귀 머리를 뿜었고, 악귀 머리가 핏빛을 토해내 금빛을 공격했다.
쾅!
다른 쪽에서도 굉음이 들려왔다. 양노이가 악귀 손에 맞아 휘청거렸다. 은색 보호막을 두른 그는 8개의 허상으로 흩어져 달아나려 했다.
그런데 검은 빛 8개가 허공에서 나타나 거머리처럼 양노이의 허상들을 쫓았다. 이어 검은빛 속에서 잿빛 장포를 입은 인영이 나타났는데 얼굴이 아주 창백한 것을 제외하면 혈아성 성주와 똑같이 생긴 노인이었다.
쿠쿵!
달아나던 중년 사내의 허상들은 대부분 검은빛에 뚫려 터져버렸고 유일하게 하나의 허상만이 녹색 빛덩이를 뿜어 검은빛을 제거했다. 중년 사내가 멈춰서 모습을 되찾고는 검은 인영을 돌아보았다.
“신외화신(身外化身)! 몇 해 동안 수행이 늘지 않는다 했더니 병 수사께서 분신을 제련하느라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노부가 이 정도 대비도 없이 당신을 따라 나섰겠습니까? 기왕 이렇게 된 것 숨어 있는 동료나 불러내시지요. 읍령의 비밀 창고를 공동으로 찾아보자는 헛소리는 그만두시고요.”
혈아성 성주가 금빛을 주시하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아 형, 이제 그만 나오셔야겠습니다. 상대가 제2화신을 불러냈으니 협공합시다.”
사나운 표정을 한 양노이가 거리낌 없이 외쳤다.
“그러게 속이기 쉽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뇌해칠살과 천방산 인물들을 속여 성전을 갖고 달아난 병 수사가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겠습니까.”
허공에서 금빛이 반짝이고 체구가 큰 못생긴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등에 커다란 금색 호리병박을 메고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혈아성 성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호 마존.”
상대의 얼굴과 금색 호리병박을 보고 혈아성 성주는 바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제 이름을 다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병 수사의 위명을 흠모해 온 지 오래인데 실력을 겨루게 되어 영광입니다.”
금호 마존이 미소를 머금고 포권을 했다. 생김새와 다르게 품위가 느껴지는 언행이었다.
“하하, 이것도 나름 잘되었습니다. 오늘 당신들을 죽이면 읍령의 비밀 창고 지도가 드디어 노부의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혈아성 성주가 양노이와 금호 마존을 번갈아 쳐다보며 냉소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흠칫 놀란 양노이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추한 사내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혈아성 성주는 말없이 허리춤을 두 번 내리쳤다.
휘릭!
검은색과 붉은 색의 가죽 주머니가 날아올라 핏빛 기운과 검은 곤충 떼를 풀어놓았다. 언뜻 보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지만 핏빛 기운은 7개의 층으로 나뉘었고 안에서는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곤충 떼 속의 새까만 벌레들은 흐릿하게 해골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헉, 칠살혈살(七殺血煞)과 흑골충(黑骨蟲)입니다. 달아나야 합니다, 양 수사!”
태연하던 금호 마존이 곤충 떼와 핏빛 기운의 정체를 파악하고 등 뒤의 금색 호리병박을 내리쳤다. 호리병박에서 금빛이 나와 그를 휘감고 빠르게 날아갔다.
양노이도 가슴이 철렁해 녹색 화염을 일으키며 서둘러 달아났다. 그들은 핏빛 기운과 검은 곤충 떼를 엄청 두려워하고 있었다.
“으하하, 이제와 달아나려 하다니 꿈도 크십니다. 노부가 오랜 세월 혈아성에 머물며 겨우 제련한 신통들인데 위력이 어떤지 확인은 하고 가셔야지요.”
혈아성 성주가 광소하며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핏빛 기운과 곤충 떼가 달아난 두 마족보다 더 빨리 날아갔다. 그것을 본 양노이와 금호 마존은 경악해 입에서 정혈을 뱉어 둔광의 속도를 끌어올렸다.
이에 성주는 제2화신과 동시에 잿빛으로 변해 전방의 칠살혈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몸이 흐릿하게 변해 놀랍게도 핏빛 기운과 합쳐졌다.
안 그래도 빠르던 칠살혈살이 쿠르릉! 진동하고 둘로 갈라진 다음 배로 빨라져 두 마족의 앞쪽과 뒤쪽을 가로막았다.
핏빛이 갈라지고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낸 혈아성 성주와 그의 신외화신이 섬뜩하게 웃고 있었다.
양노이와 금호 마존은 서둘러 둔광을 멈추고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우릴 놓아준다면 나머지 성전을 넘겨주겠습니다.”
양노이가 과감히 결단을 내리고 외쳤다.
“좋습니다. 진짜 성전만 내놓는다면 살길을 열어 주지요.”
혈아성 성주도 고민 없이 답했다. 이때 몰려든 검은 곤충 떼가 동그랗게 주위를 둘러쌌다. 그러나 양노이는 상대가 너무 쉽게 대답한 것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우리가 성전을 내주기 전에 먼저 심마를 걸고 맹세를 해주시지요. 혈조 대인께서 제련한 혈계(血契)에도 서약을 해주셔야 하고요.”
“다 좋습니다. 다만 그 전에 당신들이 정말 성전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을 시켜 주시지요. 그것마저 안 된다면 그냥 수사들을 죽이고 추혼술로 성전의 행방을 찾는 것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금 형.”
이번에는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양노이가 어두운 얼굴로 동료 수사를 쳐다보았다.
“병 수사에게 성전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그 후에 칠살혈살과 흑골충으로 우리를 해치려 들면 성전을 부수면 그만이니까요.”
추한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냉랭히 답했다.
“금 형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병 수사, 성전을 보여드릴 것이나 이전처럼 멀리서 보기만 해야 합니다.”
양 노이가 눈을 굴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물론입니다. 성전만 진짜라면 바로 심마에 맹세하고 혈계를 맺겠습니다.”
무표정한 혈아성 성주의 대답에 양노이가 입을 벌려 검은 빛덩이를 분출했다. 그 속에는 녹색 목함이 들어있었다. 그의 손짓에 목함의 뚜껑이 저절로 열리고 벽돌 형태의 보물이 떠올랐다.
“이게 진짜 네 번째 성전입니다. 병 수사, 확인하셨으면…….”
양노이가 막 입을 여는데 파공음이 들리고 금색 거대 손이 날아들어 벽돌을 채갔다.
“이게 무슨!”
“죽고 싶으냐!”
그것을 본 양노이와 금호 마존이 어안이 벙벙해 재빨리 손을 썼다.
양노이는 입에서 새까만 악귀 머리를 불러내 금색 거대 손을 물어뜯으려 했고, 금호 마존은 소매 속에서 눈부신 검빛이 튀어나와 거대 손과 그 주인을 동시에 갈랐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빛나는 벽돌을 쥔 금색 거대 손이 순식간에 더욱 커다랗게 변해 눈부신 빛을 발산했고 압도적인 기세가 주위를 휩쓸었다.
검은 악귀 머리도 기다란 검빛도 금색 파도에 밀려 비틀비틀 거렸다.
보물을 조종하던 양노이와 금호 노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다급히 그것들을 불러들이려 했지만 금빛 파도가 머금은 영기의 압력이 거세 오히려 보물과의 연계가 끊기고 말았다.
그들은 금색 거대 손이 가볍게 주먹을 날려 악귀 머리와 검빛을 때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봐야 했다.
퍼퍼퍽!
양노이와 금호 마존이 동시에 몸을 떨고 피를 뿜었다. 악귀 머리와 검빛이 타격을 입자 그들도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악귀 머리와 금색 검빛이 그들의 본명 법보는 아니라는 것이다.
기겁한 양노이와 금호 마존은 뒤로 물러나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않았고 혈아성 성조는 당황한 눈빛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주변을 그의 칠살혈살과 혈골충이 포위하고 있었기에 그리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파앗.
금빛 거대 손이 흩어진 자리에 푸른 장포를 입은 청년이 등장했다. 평범한 용모의 청년은 담담한 얼굴로 벽돌을 들고 있었다.
“누구시기에 저희 물건을 뺏어 가려는 것입니까?”
양노이가 청년을 향해 물었다. 조금 전 교전으로 상대가 무서운 실력을 지녔다는 것을 눈치챘기에 억지로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어차피 수사도 포기한 물건이 아니었습니까. 누가 가져가든 상관이 있던가요? 아, 병 수사도 성전을 3개나 지니고 있다고요. 어서 꺼내 놓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한립은 양노이를 향해 대답하고 시선을 돌려 은목 노인을 바라보았다.
“담도 크십니다. 성전을 채가고 이제 노부가 지닌 것까지 노린단 말입니까.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가져가 보시지요.”
혈아성 성주가 한립의 수행을 알아낼 수 없자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는 호기롭게 외쳤다. 그는 칠살혈살과 흑골충 떼가 있어 후기 마존이라 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