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7화. 한밤중의 추격전
*
여인이 한립을 향해 빙긋 웃음 짓고 전음을 보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저와 차나 한잔하시지요. 제가 수사께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진령의 뼈 때문입니까?”
“하하,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것만 내주시면 귀한 보물을 내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결코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닐 겁니다.”
“됐습니다. 저는 거래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한립은 마족 미부인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하고 두 마족 사이를 지나쳐 가려했다. 그러자 미부인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열을 받았는지 입술을 달싹여 두 마족에게 무어라 분부를 내렸다.
전음을 들은 마족 사내들은 시선을 마주치고 동시에 팔을 뻗었다. 겉보기에는 느려보였지만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빠른 속도로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상반된 기운은 바로 앞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합쳐서 두 배로 커지더니 한립에게 몰려들었다. 평범한 연허기 수사였으면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을 쳤겠지만 한립은 아무런 표정 없이 몸에서 흐릿한 금빛을 일으켰다.
콰릉!
폭음이 터지고 무서운 기운이 퍼져나갔다. 이에 두 마족은 서둘러 보호막을 펼쳤다.
“큭!”
마족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고 비틀거리며 물러나 쿨럭쿨럭 피를 토했다. 그들은 연달아 일곱 번이나 피를 토해냈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에 마족 부인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 사이 한립은 두 마족을 지나 유유히 멀어져 갔다.
골목을 지나던 마족들이 그것을 보고 웅성거렸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의 혈아성은 외지인들이 몰려들어 사소한 다툼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희가 무능하여 저 자를 붙들어 두지 못했습니다.”
두 마족 사내가 겨우 내상을 억누르고 파리한 얼굴로 마족 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협공하면 연허 후기에 맞먹는 두 분이 순식간에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존이 수행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마족 부인이 놀란 표정을 감추고 분석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이틀 전 마주친 남 가(家) 삼형제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힘을 합치면 초계 마존과도 일전을 벌일 수 있다 들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혈아성에 숨어든 것이 기이합니다. 무슨 큰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요?”
마족 사내 중 하나가 의문을 제기했다.
“혈아성이 규모는 작지만 이 근방에 유일한 성입니다. 마존이 주변을 지나다 우연히 들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요! 또한 누군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해도 감히 해 씨 가문 수사들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 발견한 진령의 뼈가 마침 해 씨 가문에서 제련 중인 보물에 꼭 필요하니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면 엄청난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마존을 상대로 어찌 진령의 뼈를 빼앗아 오겠습니까?”
마족 부인의 말에 또 다른 사내가 난색을 표했다.
“해 씨 가문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대는 떠돌이 마존일 겁니다. 그가 우리는 몰라도 다른 인물들까지 무시할 수는 없을 거예요.”
“부인의 말씀은…….”
“남 가 삼형제의 행방을 알아봐 주세요. 저는 혈아성 성주를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남 씨 가문은 해 가에 여러 번 신세진 일도 있고, 병천인도 천망곡(天芒谷) 출신이니 쉽게 우리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도움을 준다면 진령의 뼈를 차지할 수도 있겠지요.”
“묘책입니다! 남 가 삼형제와 병천인이 나서서 그 자를 압박하면 진령 유골을 얻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그것을 거저 얻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마족 사내의 말에 다른 마족 사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각, 한립은 거대한 상점 안에서 마족 장궤가 건네는 광택이 나는 광석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한 채 광석들을 전부 돌려주고 그곳을 떠났다.
그가 내놓은 이마금들은 예상대로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는 다른 혈아성 상점들을 돌아보고는 거처로 돌아갔다.
반나절 후, 하늘이 어둑해지고 혈아성에 밤이 찾아왔다. 길에는 순찰을 도는 병사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혈아성도 경비 태세에 돌입했다.
‘흠?’
몇 시진 후, 방 안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립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푸른빛을 번득이고 사라졌다. 한립의 거처 위에 파동이 일고 녹색 빛덩이가 나타나 귀신처럼 날아갔다.
녹색 빛덩이는 금공 금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잠시 후 회색빛이 또 다른 방향에서 날아들어 한립의 거처를 스쳐 지나갔다. 녹색 빛덩이 보다 약간 빠른 속도였다.
두 둔광은 모두 빛과 소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까이서 마주치지 않는 한 병사들도 발견할 수 없었다.
녹색 빛덩이와 회색빛이 번개처럼 하늘 끝으로 사라지고 세 번째 인영이 흐릿하게 나타나 냉랭히 그쪽을 주시했다. 두 둔광을 감지하고 나온 한립이었다.
두 둔광은 은신술을 펼쳤지만 강대한 의식을 수시로 방출해 주변을 감시하는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는데 어디 뭐하려는 것인지 한번 보자.”
한립이 흐릿한 푸른빛으로 변해 쏘아져 나갔다. 한밤중에 은밀하게 추격전을 펼치는 자들이 그의 흥미를 끈 것이다.
의식으로 그들의 위치를 감지한 그는 순간 이동을 하지 않고 멀리서 천천히 따라갔다. 혈아성은 그리 크지 않아 멀리 못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앞서 날아간 두 둔광은 제3자가 쫓는 것도 모르고 미친 듯이 날아가는 중이었다.
성벽 인근에 이른 그들 앞에 소규모의 마족 부대가 순찰을 돌고 있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붉은 창을 들고 있었고, 대장으로 보이는 마족은 머리가 둘 달린 산양을 닮은 마수를 타고 있었다.
앞쪽의 녹색 빛덩이는 그들을 보고 움찔했지만 피해가지 않고 고명한 은신술을 펼쳐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 뒤쫓는 은빛도 마찬가지였다.
저계 마족 병사들은 눈치 채지 못하는 움직임이었지만 녹색 빛덩이가 순찰 부대를 지나는 순간 우두머리 마족의 몸에서 웅!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리고 은색 실이 튀어나갔다.
우두머리 마족이 뜻밖에도 스스로 적을 감지하는 최상급 마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은색 실에 기습당한 녹색 빛이 잠시 흐릿하게 인영을 드러내자 마족병사들이 들고 있던 창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우두머리 마족은 손바닥에서 검은 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휘익!
그때 뒤에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이런!”
녹색 빛덩이 속 인영이 화들짝 놀라 번득이며 사라지자 마족 병사들의 창들은 녹색 빛덩이의 잔영만 가르고 말았다.
우두머리 마족은 기민하게 마수를 부려 녹색 빛덩이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들과 멀리 떨어진 허공에 파동이 일고 녹색 빛덩이가 나타나 성벽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쫓아라!”
우두머리 마족이 분노해 타고 있던 마수의 머리를 내리쳤다.
쉭! 쉭!
마수가 두 머리를 흔들며 남색 뇌전 두 줄기를 뿜어 녹색 인영의 등을 공격했다. 이에 녹색 인영도 뒤쪽으로 손을 뻗어 푸른 기운을 내뿜었고 남색 뇌전은 그 안으로 스며들어 아무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온몸에 밝은 빛을 일으킨 녹색 인영이 푸른 빛줄기로 변해 종적을 감추었다.
웅!
우두머리 마족이 얼른 마수를 부려 따라가려는데 다시 몸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리고 은색 실이 튀어 나갔다. 이번에는 누군가 코웃음을 치고 핏빛이 나타나 은색 실을 튕겨내고 자취를 감추었다.
“아니, 이 신통은…….”
뭔가를 떠올린 우두머리 마족이 말끝을 흐리고 허공에 멈춰 섰다.
“통령 대인, 저들을 쫓아야 할까요?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만으로는 금공 금제를 어긴 저들을 막지 못할 텐데요.”
“됐다. 실력이 강한 자들이라 우리가 쫓아가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병사의 질문에 고민하던 우두머리 마족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말에 다른 병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오만한 성격의 ‘통령 대인’이 다른 수사에게 이런 평가를 하는 적은 거의 없었다.
마족 병사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앞 다퉈 날아간 두 둔광은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놀라게 하고 혈아성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성의 금제들도 그들을 전혀 막지 못했다.
“…….”
한립 역시 신형을 숨기고 우두머리 마족을 지나갔지만 적을 감지하던 은색 실이 가만히 있었다. 그는 아무런 문제없이 금제를 통과해 혈아성을 빠져나갔다.
순찰을 도는 병사들도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도 한립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한립은 두 둔광 속 인물들의 정체가 무척 궁금해졌다.
그가 성벽의 금제를 무시하고 혈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수행 덕이었지만 전방의 인물들은 수행이 높지도 않으면서 금제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금제를 깨는 능력을 지닌 특수한 보물을 지니고 있거나 자유롭게 금제를 드나들 수 있는 혈아성의 고위직이라는 소리였다.
그는 조용히 그들을 쫓아 시커먼 돌무지에 도착했다.
전방의 녹색 빛덩이가 홀연히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어 암석들 틈으로 숨어들었고 그 뒤를 쫓던 회색빛도 주저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암석에 내려선 회색빛 인영이 둔광을 거두자 회색 장포를 입은 은목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혈아성 성주가 아닌가!’
소리 없이 그 위에 나타난 한립이 노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혈아성 성주는 주위를 둘러보다 검은 우산을 불러내 주문을 외웠다.
우산이 커다랗게 변하며 검은 빛을 뿜어내 주변을 뒤덮었다. 그러자 작은 돌들이 쌓여 있는 곳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왔고 녹색 인영이 강한 일격에 얻은 맞은 듯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남색 장포를 입은 평범한 얼굴의 중년인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나자 한립의 눈빛이 달라졌다. 녹색 빛덩이 속 인물은 경매회장에서 성전을 낙찰 받은 연기사 마족 양노이였다.
쾅!
혈아성 성주가 손에서 기다란 핏빛을 뿜어 양노이 앞에 쌓인 돌덩이들을 갈랐다. 중년 사내는 다행히 몸을 피했지만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깊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허허, 겨우 보물 때문에 수사께서 제 무고한 목숨을 거둘 심산인가 봅니다.”
다른 방향에서 나타난 양노이가 팔짱을 끼고 조소했다. 혈아성 성주이자 합체기 마존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네 놈이 나를 일부러 성 밖으로 유인한 것을 알고 있다. 숨겨둔 조력자가 있다면 전부 불러 내거라.”
음산하게 눈을 번득인 혈아성 성주가 침착하게 말했다.
“허허, 조력자요? 이곳에 병 수사와 저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만.”
“겨우 연허기 수사가 뒷배가 있지 않고서야 본 성주의 면전에서 이리 오만방자할 수는 없겠지.”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이번에 수사를 이곳으로 안내한 것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에서 이익이 될 거래를 제안하기 위해서입니다.”
“으하하, 네가 나와 거래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널 죽이면 원하는 모든 것을 취할 수 있을 텐데 거래는 무슨!”
양노이의 말에 혈아성 성주가 광소를 터트리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팟!
핏빛 속에 사라진 성주는 중년 사내의 뒤에서 나타나 거대해진 시뻘건 손으로 상대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단번에 강력한 신통을 발휘해 중년 사내를 죽이려 한 것이다.
이에 양노이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말없이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귀곡성이 일고 시커먼 거대 손이 나타났다.
콰쾅!
돌풍 속에서 은목 노인과 중년인이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합체 중기! 넌 양노이가 아니로구나!”
분노한 혈아성 성주가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중년 사내가 몸을 가누고 합체 중기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제가 양노이인지 아닌지가 중요합니까? 그리고 제가 양노이가 아니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나를 노리다니, 뇌해칠살(雷海七煞)입니까? 아니면 천방산(天房山) 출신?”
“머리가 좋은 분입니다. 저는 뇌해(雷海) 출신은 맞습니다만 칠살 중 한 명은 아닙니다. 수사께서 칠살과 천방산 수사들이 읍령 성조가 죽은 곳을 터는 동안 몰래 4개의 성전 중 3개를 훔쳐 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일로 뇌해칠살과 천방산이 다투는 동안 수사께서는 이렇게 외딴 곳에서 성주를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지면 수사께서는 곤경에 처하게 되겠지요.”
양노이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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