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6화. 상고 진령 유골
*
녹색으로 반짝이는 물체는 이름 모를 거대 짐승의 유골 같았다. 뼛조각이 하나였지만 모습을 드러낸 순간 광활한 만황의 기운이 물씬 풍겨 미리 대비하고 있던 월련천도 급히 몇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경매장 내의 다른 마족들도 강력한 기운에 밀려 낮게 탄성을 내뱉고 일부는 마기를 일으켜 보호막을 치기도 했다.
“짐승의 뼛조각이 어떻게 이렇게 강력한 기운을 내뿜을 수 있지?”
“설마 전설 속의 고대 짐승의 유골이란 말인가.”
“아닐 겁니다. 고대 짐승의 유골도 이런 기운을 낼 수는 없어요.”
“월 형, 어서 설명을 좀 부탁드립니다.”
놀란 마족들이 빛나는 거대 뼈를 주시하며 분분히 소리쳤다.
“흠흠, 경매에 내놓은 물품인데 당연히 소개해드려야지요. 관심을 보이는 수사 분들이 많으니 시간 끌지 않겠습니다. 이건 상고 짐승 유골이 아니라 상고 진령(眞靈)의 유골입니다.”
월련천은 헛기침을 해 주의를 모으고 씩 미소를 지었다.
“상고 진령 유골!”
“그럴 리가! 성조 대인들도 탐낼 보물이 어찌 이런 작은 성에…….”
이번에는 ‘성전’이 경매품으로 나왔을 때보다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월련천의 소개를 듣고도 열에 아홉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한립도 진령 유골이라는 말에 얼굴색이 달라졌다. 만황의 기운 속에 익숙한 향이 느껴졌던 것이다. 희미하게 풍기는 단내는 어떤 약향과 비슷했다. 아주 독특한 향기라 그도 자주 접하지 않았으면 구별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 한립의 의식 속에서 기쁨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님, 저건 제게 큰 도움이 될 물건 같습니다. 가능하시면 낙찰을 받아 주실 수 있을까요?”
구곡영삼이 변한 곡아의 목소리였다. 한립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의식 한 줄기를 보내 거대한 뼈를 훑었다.
‘저건…….’
그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을 때 월련천이 입을 열었다.
“다들 의심을 거두시지요! 이건 성계의 물건이 아니라 우연히 공간균열을 통해 본 계로 흘러든 뼈입니다. 진령 유골이기는 해도 너무 오래되어서 진령의 진원이 남아 있지 않고 어떤 진령의 것인지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진령의 기운 또한 희미해서 이전에 발견된 다른 진령 유골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이고요.
그러나 뼈 자체는 아주 단단해 보물을 제련하면 평범한 영보 못지않을 것입니다. 이런 물건이 이번 경매에 오르게 된 것은 성전과 마찬가지로 원주인이 크게 이목을 끌지 않고 빨리 처분을 원해서입니다. 마지막 경매품이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직접 무대로 올라와 살펴보셔도 됩니다. 향 하나가 탈 만큼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노인은 말을 마치고 소매를 저어 푸른 향로를 불러내 무대 구석에 두었다. 향로 안에서 팔뚝 반절 길이의 향초가 푸른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다.
이어 월련천의 손에서 은색 부적이 날아가 뼈에 달라붙었고, 엄청난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것을 본 대부분의 마족들은 의문이 해결된 얼굴을 했다. 거대 뼈는 진령 유골이라기보다는 보기 드문 연기 재료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혈아성 경매에 나온 것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고계 마족들이 거대 뼈에 흥미를 보였다. 의식을 방출해 탐색하는 이들도 많았고 신분을 감춘 네다섯 명은 직접 앞으로 나서 거대 뼈를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 조금씩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월련천이 말한 것처럼 제련 재료 말고는 크게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진령 유골의 진정한 가치는 진원의 힘과 골수(骨髓)에 있었는데 그게 없었다.
한립은 가만히 기다리다 다른 마인들이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그것을 본 월련천도 미소를 머금고 말리지 않았다.
한립은 손끝으로 잠시 뼈를 만져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후로는 아무도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향초가 거의 다 타자 월련천의 손짓에 향로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상고 진령 유골의 경매를 시작합니다. 시작가 오천만!”
성전 때와는 달리 경매가 시작됐지만 전당 안은 일순 정적이 흘렀다. 월련천은 잔잔히 웃음 짓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천만 마석.”
잠시 후 한 명이 망설이다 가격을 불렀다.
“오천이백만!”
“오천육백만.”
첫 번째 마족을 시작으로 주저하던 이들이 가격을 부르기 시작했지만 성전 때와는 달리 다들 조심스럽게 가격을 올렸고 경쟁에 참여한 이들도 예닐곱 명밖에는 되지 않았다.
거대 뼈의 가격은 천천히 높아져 열심히 가격을 부르던 경쟁자들이 떨어져 나가고 결국에는 미부인만이 남았다.
“칠천만 나왔습니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분이 없으면 상고 진령 유골은 그대로 낙찰됩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진령 유골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입니다.”
월련천은 현재 가격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마석이 부족하면 다른 물건으로 교환할 수도 있습니까?”
그 순간, 한 사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바로 한립이었다.
“물론 가능합니다. 마기, 재료, 단약, 공법 무엇이든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면 이 자리에서 바로 마석으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다만 시장 가격에 비해 3분의 2정도 밖에는 쳐드릴 수 없고 원하는 물품을 낙찰받지 못하셔도 무를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 주십시오.”
“마석이 부족해 교환을 해야겠으니 잠시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뒤쪽 전각에 마석을 교환해줄 수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월련천이 옆에 선 시녀에게 길안내를 시켰다. 한립은 말없이 그녀를 따라 뒤쪽의 쪽문으로 사라졌다.
일다경 후 자리로 돌아온 한립은 단번에 ‘팔천만’이라는 가격을 불렀다. 경매회장의 마족들이 웅성거리며 한립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팔천이백만.”
미부인이 굳은 얼굴로 더 높은 가격을 불렀다. 거대 뼈가 꼭 필요한 모양이었다.
“구천만.”
그러나 한립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훨씬 높은 가격을 불렀다. 이번에는 미부인도 주저하다 ‘구천백만’이라 말하고 한립이 앉은 방향을 향해 외쳤다.
“저는 고적성(枯寂城) 해 씨 가문 사람입니다. 진령의 뼈가 가문에 꼭 필요해 그러니 양보해주시면 따로 보답을 하겠습니다.”
“고적성 해 씨 가문이면 고적 성조의 가문이 아닙니까! 그곳 수사가 어찌 이 먼 곳까지!”
“해 씨 가문이면 성계에서 연기술로 손꼽히는 세가이니 진령의 뼈를 탐낼 만합니다.”
“여인의 수행도 그리 약해 보이지 않는데 고적 성조의 직계 후인은 아니겠지요?”
미부인의 말에 다른 마족들은 깜짝 놀라 떠들어댔다.
“마석 1억 개.”
그러나 한립은 아무것도 못들은 것처럼 경매장 내의 다른 마족들이 화들짝 놀랄만한 가격을 제시했다.
그녀가 마족 성조와 무슨 관계이든 혈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고장의 수사라면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것을 본 해 씨 성의 여인이 얼굴을 찡그리고 더는 경쟁을 하지 않았다.
“하하하! 상고 진령 유골은 저 수사께 낙찰되었습니다.”
월련천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낙찰을 선포했다. 한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영석을 치른 다음 뼈를 저물대에 넣었다.
이렇게 혈아성 경매회는 막을 내렸다.
그가 천천히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 머릿속에서 흥분한 곡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님께서도 상고 진령의 뼈가 남다른 것을 눈치채셨겠지요? 이게 있으면 지선의 육신을 이용해 영체 화신이 대승기에 이를 길이 열릴지도 모릅니다.”
“경매장에 모인 마족들은 눈뜬장님이나 마찬가지구나! 약령(藥靈)의 뼈를 평범한 진령의 뼈로 오인하다니. 이것을 경매에 내놓은 주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한립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머릿속으로 유쾌하게 답했다.
“약령의 뼈로 단약을 제련하면 십여 종의 전설적인 영약을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목이 높으신 주인님이니까 알아보신 것이지 아무나 알아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곡아가 신이나 아부했다.
“나도 어느 이종족의 상고 경전에서 관련 기록을 읽은 적이 있어 직접 만져보고 나서야 겨우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 처음부터 이 뼈가 약령이 남긴 것인 줄 알았던 것이냐?”
“지선 대인께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전승해 주신 기억 중에 통현약령(通玄藥靈)에 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영체 화신에 이 뼈를 녹여 넣으면 법력이 크게 증가할 뿐 아니라 뼈의 원주인이 부리던 신통 일부와 기운을 얻을 수 있어 수행을 고비를 넘겨 대승기에 이를 길이 열릴 거라 했습니다.”
한립의 물음에 곡아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지선 영체에 깃들어 있어 이미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체의 수행이 늘면 그녀가 누리는 이익도 막대했다.
“지선의 육신을 본체로 하는 영체는 합체기에 이를 때도 큰 고비를 겪지 않았다. 그래서 합체 후기 최고봉에 이르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약령의 뼈를 구했으니 문제 될 게 없어졌구나. 가끔은 너희처럼 화형을 한 영물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수행을 높일 때 다른 생령(生靈)들에 비해 어려움이 적지 않느냐.”
한립이 작게 탄식했다.
“하지만 주인님, 저희 같은 약령들은 법력을 축적해 화형하기까지 다른 수사들에 비해 백배 천배 고생하지 않습니까. 시간도 오래 걸리고요. 수행이 오를 때 고비까지 있으면 통현약령급의 존재가 나타나지도 못할 겁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나 역시 수없이 많은 기연을 얻지 못했으면 지금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겠지. 약령의 뼈가 오래되어 남아 있는 흔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일단 어느 통현약령의 것인지 부터 살펴 보거라. 같은 약령의 몸이 아니면 알아내기 어렵지 않더냐.”
“예, 주인님! 며칠 내로 어느 약령이 통현약령이 된 것인지 알아내겠습니다. 하지만 영체가 대승기로 진입해도 제 수행이 너무 낮아 기껏해야 5할의 신통밖에는 부리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다른 대승기 수사와는 비할 수 없을 테고 은신술과 둔술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정도겠지요.”
“괜찮다. 대승기 수사의 5할의 실력을 발휘하는 조력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곡아가 조심스럽게 한 말에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헤헤, 맞는 말씀입니다. 역천의 수단으로도 영체의 법력을 합체 후기 최고봉까지 끌어올리려면 백여 년은 걸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주인님! 그동안 곡아가 영체를 이용해 이 뼈를 최대한 연화시켜 두겠습니다.”
“마계에서는 목숨을 보전할 만한 다른 필살기가 있으니 넌 걱정하지 말고 약령 유골 연화에만 전념해도 된다.”
그의 손에 손바닥만 한 비취색 뼈가 나타났다가 괴이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곡아는 밝게 답하고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에 한립은 빙긋 웃으며 삿갓을 벗고 가던 길을 갔다. 거처로 돌아가기 전에 인근의 재료 상점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상점 주인이 이틀 후면 이마금들을 비롯한 새로운 재료들이 대량으로 들어온다며 한 번 더 들려 달라 했었다. 그 이마금들 중에 혹시 특수한 힘을 지닌 수정구슬이 있을지 살펴볼 계획이었다.
구슬 하나로 백년 수행을 늘릴 수 있으니 몇 개를 더 찾으면 수련 시간을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굽이굽이 골목을 돌고 있는데 갑자기 체격 좋은 마족 사내 두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연허 중기의 수행을 지닌 마족들은 각각 몸에서 뜨거운 기운이 모락모락 일고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이 특수한 마공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별일 아니면 비키시지요, 바삐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수사를 찾는 분은 저희가 아니라 다른 분입니다. 저희 가문 부인께서 수사를 보시고자 하는데 옆 건물로 가시지요.”
입이 크고 코가 높은 사내가 냉랭히 말하며 손을 뻗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자 주루 비슷하게 생긴 건물 4층에 검은 치마를 입은 부인이 앉아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