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5화. 암혈오색령(暗血五色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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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곧 경매회 시작을 알렸고 전당 쪽문에서 쟁반을 들고 마족 여인들이 걸어 나왔다. 노인의 손짓에 여인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 쟁반을 들어 올렸다.
“최상급 마기 ‘암혈오색령(暗血五色鈴)’입니다. 혈마령이라 불리는 다섯 개의 방울로 구성되어 있어 각각 미혼술, 환영, 중독, 적의 동작 지연, 적의 피를 끓게 하는 색다른 효과를 내는 마기이지요. 시작가 마석 오백만 개입니다!”
노인이 쟁반의 검은 천을 치우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쟁반 위에는 검은 문양이 그려진 은색 쇠방울 다섯 개가 금색 고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암혈오색령? 유명하기로 최상급 마기 중에서 열손가락 안에 든다는 보물이 어찌 이곳에!”
“해운산(海雲山) 암 대사만 제련할 수 있는 보물인데 혈아성 같은 외진 곳에 나타난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번 경매회에 참석하길 참 잘했습니다. 시작부터 암혈오색령을 내놓았다면 뒤로 갈수록 더 대단한 보물이 나올 거란 뜻이 아니겠습니까.”
장내가 소란해졌고 많은 이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구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물의 이름을 들은 한립도 움찔했다.
‘암혈오색령? 이름이 왜 이리 익숙하지,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가 기억을 더듬는 동안 마기의 가격은 팍팍 오르고 있었다.
“오백 만!”
“육백 만.”
“팔백만 개!”
“천백만!”
최상급 보물의 가격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오르는 것을 보고 한립은 내심 놀랐다. 며칠 동안 마계의 물가를 파악한 결과 일반적인 최상급 마기는 마석 2, 3백만 개면 살 수 있었다.
‘엇, 암혈오색령이면 유리오묘령(琉璃五妙鈴)과 비슷하지 않은가. 현천연기술에 적힌 보물!’
한립은 비슷한 이름을 떠올렸다. 금궐옥서의 선계 보물 제련술 중에는 원합오극산 외에도 다른 후천적 현천의 보물들이 언급되어 있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유리오묘령이었다.
제련법을 구했어도 재료들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선계의 것들이라 한숨만 내쉬고 포기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암혈오색령의 이름과 효과가 유리오묘령과 묘하게 비슷했다.
‘설마 마계에서도 누군가 현천의 보물 제련법을 구해 그 모조품을 제련하고 있단 말인가!’
한립은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그가 갖고 있는 마석으로는 낙찰받을 수 없었다. 또한 최상급 마기라 실전에 쓸 일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누가 이 보물을 가져가는지 지켜보았다.
마계에서도 유명하다는 마기는 푸른빛으로 전신을 가리고 은색 악귀 가면을 쓴 마인이 마석 천오백만개라는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가져갔다.
장 내의 많은 고계 마족들이 불만스런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았지만 정체를 숨긴 마인은 암혈오색령을 손에 넣자마자 경매회장을 나가버렸다. 적잖은 마족들이 무슨 꿍꿍이 인지 대놓고 그 뒤를 따라 나갔다.
경매 진행자인 월련천은 그 모든 것을 못 본 척하고, 두 번째 여인의 쟁반에서 한기를 발산하는 남색 수정돌을 꺼냈다.
“보기 드문 마수 빙포수(氷匏獸)의 정핵입니다. 귀한 빙계(氷系) 마기나 단약을 제련하기에 안성맞춤인 재료이지요. 최저가 마석 이백만 개부터 시작합니다!”
“이백만 개!”
“이백삼십만!”
“이백오십만.”
암혈오색령보다 가격이 치솟지는 않았지만 얼음 속성 재료를 필요로 하던 마족 열댓 명이 경쟁에 돌입했고, 빼빼 마른 마족이 사백만이 넘는 가격에 낙찰을 받아갔다.
이어서 월련천이라는 마인은 쟁반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차례로 소개하고 또 다른 마족 여인들을 불러냈다.
경매에 나오는 물품들은 영계의 것과 크게 차이가 없어 대부분 광석, 영약 등의 재료들이었고 틈틈이 특수한 기능을 지닌 마기가 등장했다.
한립은 조용히 경매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며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그저 그가 내놓은 마기들이 적잖은 가격에 팔려나갈 때 슬쩍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어느 물품도 첫 번째로 나온 마기보다 높은 가격을 받지는 못했고 연허기 고비를 넘길 확률을 높여 준다는 미완성의 단약이 천삼백만 마석에 팔려나간 것이 그 다음으로 높았다.
“자, 이제 마지막 두 물품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암혈오색령보다 가치가 있을 테니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월련천이 의미심장한 말로 모두의 이목을 끌었고 굉장한 미모의 마족 여인 두 명이 등장했다. 그들은 이전 여인들과 달리 한 명은 팔뚝 길이의 녹색 목함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빈손이었다.
경매에 참석한 마족들의 눈빛을 받으며 월련천은 목함을 끌어와 뚜껑을 열고 하얀 벽돌 형태의 물건을 선보였다.
“이백만 년 전 읍령 성조의 각종 공법이 기록되어 있는 성전(聖塼)! 시작가, 마석 삼천만 개입니다!”
조심스럽게 벽돌을 꺼내고는 노인이 소리쳤다.
“읍령 성조! 당시 삼대시조에 버금가던 성조 대인이 아닙니까!”
“말도 안 돼! 그런 분의 신통이 기록된 성전이면 몇몇 성성(聖城)의 거대 경매회에 등장해도 엄청난 가격에 거래될 텐데 여기서 등장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월련천의 말에 경매회장이 들끓기 시작했다. 한껏 들뜬 자들도 있었고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는 자들도 있었다.
“모두 조용히 해주십시오! 경매회의 물품은 모두 감정을 거쳤습니다. 이 성전은 읍령 대인께서 남기신 것이 확실합니다. 만일 거짓이라면 열 배로 보상할 것이니 안심하고 경매에 참여하셔도 됩니다. 다만 이런 물건이 본 경매회에 등장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노인이 소란을 잠재우고 입을 열었다.
“어떤 이유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검은 기운으로 얼굴을 감춘 마족이 입을 열자 경매회에 모인 수사들이 전부 입을 다물었다.
“진각 형께서 물어보시는데 당연히 답해 드려야지요. 본 성에 성전이 나타난 이유는 첫째, 물건의 주인이 이 일로 주변이 소란해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입니다. 둘째는 성전에 적힌 두 가지 공법에 중요한 구결이 빠져 있고 당시 읍령 대인이 주로 수련하던 신통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귀한 보물이 어찌 노부가 진행하는 경매에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군요. 읍령 대인의 신분을 생각하면 성전 속에 있는 공법들이 불완전해도 그것들을 연구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상당할 것입니다. 확실히 암혈오색령 이상의 가치를 지닌 보물입니다.”
노인의 설명에 의아한 마음이 가신 진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마족의 문답을 들은 다른 마족들은 실망하기는커녕 성전을 향해 더욱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공법이 불완전하면 그만큼 소장가치는 떨어지겠지만 진품일 가능성은 높아졌다.
“월 수사, 두 공법의 이름을 말씀해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야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알 것이 아닙니까!”
날카로운 음성이 전당 안에 울려 퍼졌다. 술법을 사용했는지 누가 질문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물건의 주인이 성전을 경매에 내놓으며 공법의 이름을 노출하면 안 된다는 조건을 걸어서 말이지요. 자, 설명은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바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과감히 경매 시작을 선포했다.
“사천만! 성전은 본 좌가 꼭 가져가야겠습니다.”
험악한 얼굴에 덩치가 큰 마족 거한이 목청껏 소리쳤다.
“겨우 마석 사천만 개로 보물을 가져가려 하다니 꿈도 크십니다, 석 형. 오천만 개!”
머리에 외뿔이 난 마인이 냉소하며 가격을 올렸다.
“육천만!”
진각도 주저하지 않고 연이어 가격을 높였다.
“육천오백만 마석.”
“육천팔백만!”
전당 안은 어느새 가격을 부르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한립도 당연히 대승기 수사가 남긴 공법에 관심이 갔지만 마조 성조의 공법인 데다 주요 구결이 빠졌다는 말에 나서지 않았다.
“팔천만 마석.”
이때 냉랭한 목소리가 입을 열자 서늘한 기운이 폭풍처럼 전당 안을 휩쓸었다. 수행이 낮은 마족들은 서늘한 기운에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뻣뻣해졌고 연허급 수사도 몸을 떨어야 했다.
“마존 대인!”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전당의 입구 중 하나에 잿빛 장포를 입은 노인이 서있었는데 전신에서 옅은 핏빛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성주 대인이 아니신가?”
“병 선배님?”
은목(銀目) 노인의 얼굴을 알아본 고계 마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주 대인께서 이곳까지는 어찌…….”
월련천 마저 놀라 서둘러 예를 취했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는가?”
“아닙니다. 성주 대인께서 참석해 주시면 영광이지요!”
은목 노인의 대수롭지 않은 물음에 월련천이 흠칫 놀라 해명했다.
“내가 가장 높은 가격을 불렀으니 성전을 낙찰 받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성주 대인보다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수사가 없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더 가격을 부르실 분이 계십니까?”
월련천이 반짝이는 벽돌을 들고 큰 소리로 물었다. 이에 소란하던 전당 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성전을 필사적으로 낙찰 받으려던 고계 마족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지의 성주이자 마존인 병천인의 심기를 거스를 자는 그곳에 없었다.
월련천이 막 성전의 귀속을 정하려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천만 마석.”
“헉, 누가 감히 성주 대인과 경쟁하려는 거지?”
“담도 크지 않은가. 살아서 혈아성을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 겐가?”
누군가 가격을 올리는 것을 듣고 전당 안 마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적잖은 이들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혈아성 성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구천오백만’이 라는 액수를 불렀다.
“구천구백만.”
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낯선 목소리가 가격을 올렸다. 그러자 혈아성 성주 주위에서 핏빛 한기가 요동쳤다. 주변 마족들은 은목 노인의 표정 변화에 주눅 들어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물건인 것 같으니 노부가 굳이 방해하지 않겠네.”
예상을 깨고 혈아성 성주는 성전을 포기하고 몸을 돌려 전당을 나섰다.
“가격을 부르실 분이 더 계십니까? 없으시면 성전은 낙찰된 것으로 하겠습니다.”
월련천도 의외라고 생각했으나 본분을 잃지 않고 경매를 계속했다. 여러 마족들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민하면서도 나서지 않았다. 혈아성 성주가 원하는 물건을 낙찰 받았다가 무슨 후환이 따를지 모를 일이었다.
이때 전당 구석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 무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한립도 눈을 반짝이고 그의 모습을 봐두었다.
옅은 남색 장포를 입은 중년 마인은 겨우 연허 초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저 자는 양노이 아닌가. 감히 성주 대인과 경쟁하다니 돌은 것인가?”
그곳에 모인 수사들 대부분이 중년 마인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실례지만 양노이라는 자가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수행이 그리 높아보이지는 않는데 다들 아는 눈치군요.”
한립은 옆에 앉은 장년 마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두 뺨이 얇은 푸른 비늘로 뒤덮인 마인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자들 중 한 명이었다.
“아, 외지에서 오신 분인가 봅니다. 양노이는 본 성에서 꽤 유명한 연기사(煉器師)입니다. 많은 이들이 망가진 마기 수리를 맡기거나 아니면 저계 마기 제작을 의뢰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곳에 머문 백여 년간 늘 조용하던 자가 오늘 갑자기 성주 대인을 상대로 저런 짓을 벌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상한 공법을 수련하다 머리가 돌아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장년 마족은 한립이 연허 후기 수사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랬군요. 설명 감사합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시선을 돌려 ‘양노이’라는 자를 보았다. 그는 태연하게 마석이 든 저물대를 월련천에게 건네고 성전을 받았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양노이가 성전을 낙찰 받고도 바로 경매회장을 떠나지 않고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다음 경매에 참여한 것이다. 그의 행동에 몇몇 마족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월련천도 의아한 눈빛을 보냈으나 아직 경매회가 끝나지 않았기에 표정을 가다듬고 마지막 물품의 경매를 시작했다.
그의 손짓에 무대로 나온 아름다운 마족 여인은 청록색 고리를 불러냈다. 고리는 빙글빙글 회전하며 하얀 빛을 뿜어냈고 무대에는 방대한 물체가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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