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190화 (947/2,000)

1190화. 초원의 마조(魔潮)

*

이제 빙산 옆에는 백포 노인만이 남았다.

“불완전한 현광천정탑으로 정말 본 사자를 봉인할 수 있다고 보느냐! 탑의 한기가 바닥나면 나를 어찌 붙들어두는지 보겠다!”

빙탑 아래에서 인영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한눈에 내 본체의 결함을 눈치채고, 상계에서 내려온 자가 맞기는 하구나. 허나 그렇다고 해서 네가 무궁무진한 신통을 지닌 진선은 아니지 않더냐? 지금 네 수행으로는 한기가 바닥날 때까지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봉인을 당하고도 아직까지 말할 힘이 남아 있다니 혼백의 힘이 강력하기는 하다만 오래 의식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백포 노인이 빙산 아래로 시선을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계에 내가 의식을 잃게 할 만한 봉인방법이 있을 리가…….”

“노부가 쓸 방법이 하계의 수단이 아니라면?”

백포 노인의 손에서 한기에 둘러싸인 부적 한 장이 들렸다. 얼음으로 응결된 것처럼 보이는 부적에는 금색 주술문자가 가득 적혀 있었다. 그것은 선계 특유의 금전문이었다.

“아깝게 이걸 여기서 쓰게 되다니.”

노인은 속이 쓰려왔지만 힘차게 손목을 털어 부적을 날렸다.

쉭!

금빛이 빙산으로 파고들고 노인은 수결을 맺은 채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빙산에 태양처럼 밝은 금빛이 떠올라 거대한 주술문자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네 놈, 뭐 하는 짓이……. 서, 선계의 부적!”

아래쪽 인영이 빙산의 이변을 감지하고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이미 금색 거대 문자가 빙산을 투과해 아래쪽 진법까지 도달했다.

쾅!

굉음을 끝으로 인영의 말소리가 뚝 끊겼고 정적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노인은 멈추지 않고 주문을 더욱 거세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빙산이 바르르 몸을 떨고 금색문자들이 표면을 타고 꾸물꾸물 기어 나와 커다란 주술문자로 뭉쳐졌다. 이제 빙산이 내뿜은 하얀 한기 속에는 푸른빛이 함유되어 있었고 기운도 한층 농밀해졌다.

그제야 노인은 주문을 멈추고 안심했다.

노인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빙산 속에는 금포를 입은 준수한 청년이 쇠사슬과 얼음에 뒤덮여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노인은 의식으로 봉인을 점검하고 빙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시각, 극히 멀리 떨어진 계면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새까만 얼굴의 도사가 눈을 번쩍 떴다.

“사형제에게 문제가 생겼단 말인가? 진혼패(眞魂牌)가 이리 난리 난 것이 이상하구나.”

도사의 소매 속에서 초소형 누각이 날아올라 빛을 발하고 원래의 크기로 변했다. 그곳을 새까만 얼굴의 도사가 차분히 걸어 들어갔다.

2층 대청 안에는 백여 개의 옥 탁자가 배치되어 있었고 탁자마다 열댓 개의 크고 작은 노란 목패가 놓여 있었다. 천천히 탁자를 살피던 도사가 눈썹을 끌어올리고 대청 구석의 녹슨 솥으로 손짓했다.

휙!

커다란 솥 안에서 노란 목패 하나가 솟아올라 도사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과연 진혼에 문제가 생겼구나! 그렇다면 두고 볼 수 없지. 반드시 찾아내야해!”

희미하게 하얀빛을 반짝이는 목패를 들고 도사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 * *

한립은 고공에 떠서 72개의 푸른빛들이 그를 향해 달려드는 수십 마리의 새까만 마수들을 조각내는 것을 보았다.

핏물이 떨어지고 수많은 마수들이 죽어나갔지만 마수들은 사방팔방에서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전부 머리에는 외뿔이 자라나 있고 등에는 비늘이 덮인 짐승들이었다.

푸른 검빛들이 빙글 돌아 연꽃을 피워내고는 다음 마수들을 공격했다. 진한 피비린내가 퍼져나갔다. 이런 저계 마수들은 청죽봉운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수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었다. 이에 한립이 입 꼬리를 꿈틀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머지않은 곳에서 농 가 노조를 비롯한 일행들도 마수들을 격살하는 중이었다.

엽 수사가 열 손가락을 튕겨 은빛을 퍼부을 때마다 대량의 마수들이 추락했고 임 가의 산발사내는 새빨간 자를 꺼내 마수들을 불덩이로 만들었다.

농 가 노조와 휘 장로는 금색 거대 손 두 개를 만들어내 휘두르거나 소매 속에서 녹색 기운을 뿜어냈다. 그들 주변으로 다가간 마수들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흩어지거나 독에 중독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또한 영족의 늙은 유생은 푸른 등잔을 꺼내 수십 개의 보라색 등불을 날려 엄청난 면적을 뒤덮었다. 보랏빛이 어리는 곳마다 마수들이 푸른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얀빛 속에 어른거리는 신비한 영족 백척은 그저 떠있기만 했는데도 마수들이 하얀빛 속에서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 안에 날카로운 칼날들이라도 가득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른 금고 장로는 징 같은 보물로 댕! 하는 소리를 퍼트려 다가오는 마수들을 추락하게 만들었고, 무표정한 청년 지수는 은색 갑옷으로 온몸을 가리고 돌풍이 되어 마수 무리를 휩쓰는 중이었다.

바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수들의 잔해가 날아 다녔다. 한립은 그들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일행이 운이 없는 것인지 초원을 따라 십여 일 쯤 이동했을 때 초원 깊은 곳에서 밀물처럼 몰려드는 방대한 마수 떼와 마주쳤다.

영계에서도 이런 요수의 난을 겪어본 일행은 마수 떼를 피해 돌아가려 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끝없이 몰려드는 마수들은 늑대 요수들이었고 수행이 그다지 높지 않아 대부분 축기기 혹은 결단기 수행이었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수량은 웬만한 수사들이었다면 절망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농 가 노조 등이 강력한 대량 살상 신통을 사용해 백만 마리 정도를 죽였지만 일행은 마수 떼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일행들이 아무리 마수들을 죽여도 그 수가 줄지 않았고, 벌써 이틀이 지났는데도 주변은 새까만 마수 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한립은 놀랐고 농 가 노조와 천추 성녀 등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수들의 수는 요수의 난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아마 영계의 해역에 서식하는 거대 해양 요수 떼나 이 정도 규모가 될 것이다.

한립이 불쑥 손에서 금색 뇌전들을 뿜어 마수 떼를 공격했다. 3, 4백 마리가 한순간에 재가 되어버렸고 두려움 없이 몰려들던 다른 마수들도 순간 움찔했다.

그 틈을 타 한립은 신형을 번득여 농 가 노조 옆으로 이동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농 형. 우리의 법력이 아무리 심후해도 마수들의 수가 너무 많아요.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드는 것을 보면 마수들 뒤에서 분명 요왕(妖王)이 통제하고 있을 겁니다.”

“노부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학살을 당하고도 물러나지 않을 리 없으니까요. 이대로 마수들과 대치하다 고계 마족의 눈에 띄면 성가셔질 테니 그 요왕을 죽여야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농 가 노조가 고개를 끄덕이고 한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콰르릉!

거대 손바닥이 허공에 나타나 수백 마리 마수들을 으깼다. 그 사이 농가 노조는 입술을 달싹여 영족 무리와 전음으로 상의하고 다시 한립을 쳐다보았다.

“천추 수사와 얘기해보았습니다. 일행 중 노부와 한 수사를 비롯한 네 명은 후기의 수행을 지녀 혼자서도 요왕급 존재를 죽일 수 있을 겁니다. 엽 선자를 비롯한 나머지가 이곳에서 마수들의 주의를 끄는 동안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길을 뚫고 요왕을 찾아내 죽이는 것으로 하지요!

세 시진 내로 요왕을 발견하지 못하면 바로 돌아와 다른 방법을 상의해 보도록 하고요. 노부의 짐작대로라면 요왕이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을 겁니다. 마수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게 하려면 가까이에서 제어를 해야 할 테니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의식으로 동쪽을 훑으니 마수들의 기운이 꽤 강하더군요. 저는 그곳으로 가보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농 가 노조도 반대하지 않았고 휘 장로에게 무어라 당부를 한 후 서쪽으로 질풍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후기 성령인 천추성녀와 백척은 자연히 남과 북으로 흩어졌다.

엽 수사 등은 수사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워 둥그렇게 둘러서서 몰려드는 마수들을 상대했다. 한립은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푸른 빛줄기로 변해 몸을 날렸다.

푸른 빛줄기가 지나는 곳마다 마수들의 피가 빗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한립이 돌진한 지도 어느덧 두 시진이 흘렀다. 72자루의 비검들이 교룡처럼 둔광 주변을 휘감아 앞을 막는 마수들을 갈랐다.

수행이 높아진 한립은 법력이 부쩍 늘어 청죽봉운검의 위력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지금 그는 조금 초초해 하고 있었다.

오는 동안 몇몇 변이 마수들을 만났지만 화신 후기의 수행을 넘어서지 않았다. 그들이 마수들을 조종하는 요왕일 리가 없었다.

세 시진이 가까워오는데도 요왕이 나타나지 않자 한립은 그만 돌아가서 상의를 해봐야 할까 고민했다.

‘흠…….’

그가 돌연 눈을 빛내고 전방의 마수 떼를 훑었다.

멀리서 격렬한 폭음이 터지고 그를 향해 악착같이 달려들던 마수들이 구슬프게 울며 방향을 틀었다. 이에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속도를 높였다.

푸른 둔광 앞을 가로막는 마수들은 칼날에 몸이 갈라졌지만 다른 마수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한립의 수행을 보고 마수들이 달려들지 않아 순식간에 멀리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순간 둔광을 멈추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커다란 청록색 마수가 나타나 그가 가야할 길을 막고 있었다. 다른 마수들보다 훨씬 몸집이 큰 청록색 마수의 털은 기이하게 반질거리면서도 이상한 냄새를 풍겼다. 독을 지닌 것 같았다.

당황해 달아나던 마수들은 변이 마수를 보고 즉시 그 뒤로 가서 숨었다. 하지만 한립이 보고 있는 것은 더욱 먼 곳이었다.

청록색 마수 뒤에 더욱 커다란 은색 마수 십여 마리가 두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은색 마수들 옆에는 머리에 오색 뿔이 난 마수가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그 위로는 반쯤 타들어간 회색 양초가 푸른 연기를 내뿜는 중이었다.

푸른 연기는 주위로 퍼져나가며 흐릿한 고리를 만들어냈고 녹색 마수들은 마수들을 이끌고 그곳을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녹색 마수는 분노에 차 울부짖었지만 푸른 연기가 만들어낸 거대 고리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한립은 남색빛을 일렁여 멀리 은색 마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또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철탑처럼 단단해 보이는 마족 거한과 뺨에 남색 문신이 있는 마족 노인이었는데 모두 연허 후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마족 거한이 검은 몽둥이를 휘두를 때마다 뇌전과 바람 소리가 났고 검은 기운이 주변의 은색 마수들을 밀어냈다.

삼각형의 뾰족한 눈을 지닌 마족 노인이 들고 있는 새까만 그릇에는 괴조(怪鳥) 허상들이 연이어 날아올랐다. 괴조들이 은색 마수를 덮칠 때마다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커다란 곤봉이나 괴조 허상 모두 은색 마수들을 밀어낼 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단단한 몸을 지닌 은색 마수들은 잠시 튕겨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달려들고 있었다.

법력이 바닥나면 두 마족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강대한 기운으로 보아 그 옆에 오색 뿔이 난 마수의 시체가 한립이 찾던 요왕 같았다.

‘이미 죽었단 말인가! 저 마족들에게? 수행이 낮은 것은 아니지만 그럴 실력이 아닌데…….’

한립은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했지만 무척 의아했다. 게다가 요왕이 죽었는데도 마수들이 흩어지지 않는 것도 의외였다.

한립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청록색 짐승은 지능이 높은지 한립이 만만하지 않은 상대인 것을 알고 다짜고짜 달려들지는 않았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