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9화. 적혈복령화와 현광천정탑
*
“천추 수사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농 가 노조는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대신 천추 성녀에게 물었다.
“상의를 해보고 잠시 후 말씀드려도 될지요?”
“물론입니다.”
천추 성녀와 영족 수사들은 둥글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농 가 노조도 곁의 휘 장로와 전음으로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한 형,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셨습니다. 영족들이나 농 가 노조도 아마 찬성할 겁니다. 느낌이지만 영족인들은 해로를 선호하고 농 가 노조는 환소사막을 지나는 길로 택하고자 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니 어떻게 결정이 나든 저와 수사는 더욱 조심해야 할 듯싶습니다.”
한립의 귓가에 엽 수사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그녀를 보니 제자리에 가만히 선 엽 수사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다.
“충고 감사합니다, 엽 수사. 주의하도록 하지요.”
한립도 무표정한 얼굴로 전음으로 답했다. 이에 깃털 옷 소녀는 더 이상 전음을 보내지 않고 그저 미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가 예상한 대로 상의를 마친 천추 성녀와 농 가 노조는 모두 한립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렇게 그들은 방향을 틀어 초원을 따라 서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만여 리 뒤쪽에서 분홍색 기운이 보일 듯 말 듯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 * *
인계, 영족(靈族)의 비밀 금지 안.
우우웅!
초대형 진법이 새까만 대지에서 빛을 발했다. 진법에서 다양한 빛깔의 커다란 주술문자들이 날아올라 거대한 인영을 쇠사슬처럼 둘렀다.
고풍스러운 금색 갑옷을 입고 등 뒤로 열댓 개의 핏빛 그림자를 드리운 인영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두 손 위로 은색 그물이 떠서 커다란 은색 구슬을 받치고 있었는데 구슬 표면의 문양이 반짝일 때마다 주변 허공이 소리 내며 왜곡되었다.
준수한 외모를 지닌 거대 인영은 땀을 흘리며 고공의 거대한 은색 구슬을 향해 분노의 눈길을 보내는 중이었다.
진법 사방에 8명의 합체기 성령들이 떠서 진법 원반을 들고 역시 비지땀을 흘리며 초대형 진법을 조종했다. 그 중에 고공에 떠있는 금색 궁전이 눈길을 끌고 있었다.
“대체 누구기에 봉선주(封仙珠)를 갖고 있는 것이야! 설마 선계에서 달아난 영노더냐!”
거대 인영이 사납게 소리쳤다.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다. 섭령천망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너는 우리 영족의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으니까. 곤마대진(困魔大陣)에 갇히고 봉선주에 묶였으니 이곳이 네 무덤이 될 것이다.”
금색 궁전에서 냉랭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하하하, 겨우 이걸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보느냐! 금선진혼(金仙眞魂)을 수련한 나를 겨우 하계 수사 따위가 죽일 수는 없다. 이곳에서 벗어나면 너희 영노들을 전부 찢어 죽이고 불타오르는 화로에 넣어 혼백을 제련해 주겠다.”
거대 인영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곤마대진과 봉선주로도 진선(眞仙)의 혼백을 말살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네 법력이 아직 나를 넘어서지 못했으니 봉인한 다음 구유지화(九幽地火)와 체내의 진화로 천천히 녹이면 십만 년 후에는 네 혼백으로 선혼단(仙魂丹)을 제련할 수 있겠지.”
노쇠한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감히 내 진혼(眞魂)으로 선혼단을 제련할 마음을 품다니. 선계였으면 형벌사자에 의해 멸족당하는 천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 말에 움찔한 거대 인영이 분노를 드러냈다.
“하하, 너도 이곳이 선계가 아님을 잘 알 것이 아니냐. 감찰사자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영계 전체를 교란시킬만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한 어찌 이곳 일에 신경을 쓸까. 노부가 선혼단을 복용해 수행이 진일보하면 본 족은 영계에서 크게 번영할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겠지. 또한 이것 말고 선인의 혼백을 없앨 방법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노쇠한 노인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전 같았으면 겨우 너 같은 대승기 수사는 순식간에 세상에서 지워버렸을 텐데. 본 사자 앞에서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네 놈이 나를 어찌 봉인해 제련까지 할지 두고 보자꾸나!”
거대 인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고 맹렬히 손가락을 튕겨 열댓 개의 법력을 섭령천망이 변한 은색 그물로 쏘아 보냈다.
우웅!
그물의 기운이 배로 불어나 거대한 은색 구슬을 더욱 높이 밀어냈다. 그러자 초대형 진법을 조종하던 여덟 성령들이 놀라 진법 원반으로 법력을 마구 불어넣었다.
진법 원반이 폭발적으로 빛을 발하고 초대형 진법이 울어대며 더욱 굵은 쇠사슬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거대 인영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비술을 펼친 후였다.
퍼퍼펑!
거대 인영 뒤에서 열댓 개의 검은 그림자들이 폭발해 핏빛 안개로 스며들었다.
흐릿하던 거대 인영의 육신이 또렷하게 변하고 갑옷이 깨져 구릿빛 피부가 드러났다. 그의 가슴에는 기이하게 생긴 꽃 한 송이가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거대 인영의 입에서 영계에서는 쓰이지 않는 상고주술이 빠르게 흘러나오고 금색 꽃문양이 피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피비린내를 품은 꽃이 거대 인영의 가슴에서 떠올라 실체를 갖추었다.
“적혈복령화(滴血茯苓花)! 화요(花妖)의 몸이었다니!”
금색 궁전에서 놀란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대 인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핏빛 거대 꽃을 향해 입김을 불었다.
휘리릭.
주변의 천지원기가 혈화(血花)를 향해 밀려들어왔고 거대한 오색구름이 나타나 하늘이 어둑해졌다. 천지원기를 머금고 열 배로 불어난 혈화는 소름끼치는 기운을 발산했다.
“미쳤어! 꽃을 폭파시키는 그 순간 네 육신도 끝장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급박한 상황에 노쇠한 목소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금색 궁전 위로 파동이 일고 혈색 좋은 백포 노인이 나타났다. 소매에 자홍색 단풍잎이 수놓아진 노인은 아래의 거대한 혈화를 보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흐하하, 자폭하는 것이 혼백이 단약으로 제련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 아니더냐. 본 좌의 혼백의 힘이면 몇 만 년 걸리지 않아 육신을 응결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았으면, 지금이라도 진법과 봉선주를 거두거라! 그러면 이 일에 대해 죄를 묻지 않고 떠나도록 하지. 이 요화(妖花)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폭발의 위력도 알겠지. 다른 것은 몰라도 너희를 재로 만들기에는 차고 넘칠 것이다.”
거대 인영이 허공의 거대한 혈화와 노인을 번갈아 보고 음산하게 협박했다.
백포 노인이 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은 물론 진법을 지탱하는 여덟 성령도 혈화 폭발의 무서운 위력을 듣고 얼굴색이 극히 어두워졌다.
그러나 노인이 버티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진법을 조종하고 있었다.
“놓아 달라? 봉인을 마친 후에나 고려해 보겠다.”
안색이 시시각각 달라지던 백포 노인이 사납게 눈을 번득이고는 환영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죽고 싶어 안달이 났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거대 인영이 그것을 보고 얼른 핏빛 거대 꽃을 쳐다보았지만 바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말은 쉽게 했지만 다시 육체를 응결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만 년 내로 새로운 육신을 주조하려면 큰 운이 따라줘야 했고 적혈봉령화의 본원을 응결한 지금의 육신이 아깝기도 했다.
이 몸이 있다면 수련을 통해 옛 전성기의 법력과 신통을 되찾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도 평범한 수사는 아니었기에 머뭇거림은 찰나에 그쳤고 주문을 외며 손을 뻗어 거대 혈화을 가리켰다.
핏빛 꽃이 처량하게 울고 꽃잎마다 하얀 실금이 가서 위험한 기운을 방출했다. 동시에 하늘의 오색구름은 천지원기를 품고 거대한 솥뚜껑처럼 응결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젓은 성령들은 태산과 같은 압력에 몸이 묵직해져 행동이 느려졌다.
그때 웅! 하고 열댓 개의 빛덩이가 그들의 몸에서 떠올라 보호막들을 이루었다. 성령들이 지니고 있던 보물들이 스스로 발동한 것이다.
그 덕에 아직 무사하기는 했지만 성령들은 대경실색해 내빼려 했다. 평소였으면 전광석화 같았을 움직임이 훨씬 느려져 제때 혈화 폭발의 범위를 벗어나는것은 무리였다.
여덟 성령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달아나면서 여러 보물들을 벌떼처럼 방출했다.
“터져라!”
차갑게 눈을 빛낸 거대 인영이 단호히 외쳤다. 그러자 혈화 꽃잎의 하얀 균열이 더욱 두터워지고 용암처럼 새빨간 액체가 새어 나왔다.
새빨간 액체는 공기와 맞닿은 순간 적홍색 화염 덩어리로 변해 주변을 빨갛게 물들였다. 불안정하게 수축했다 늘어났다 하는 것이 언제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것을 본 거대 인영이 몸을 수축해 빛나는 은색 보호막을 불러냈다. 육신은 잃어도 혼백이라도 큰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였다.
“자폭을 하려면 노부의 동의를 얻어야겠지? 본체의 만 년 수행이 줄어들더라도 너를 철저히 제압해 주겠다.”
혈화 위에서 백포 노인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허공에 산만한 거탑이 등장했는데 거탑 표면에 투명한 주술문자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더욱 특이한 것은 거탑 아래쪽에 박힌 남색 구슬이었다. 부드러운 구슬 표면에 크고 작은 투명 진법이 각인되어 있었다. 진법들은 고리처럼 겹겹이 겹쳐 더욱 신비하고 현묘해 보였다.
현란하기 그지없는 얼음 거탑은 놀랍게도 영족 최고위 존재인 백포 노인의 본체였다. 거탑 하단에서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새어나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불덩이와 거대 혈화를 휩쓸었다.
한기가 어린 하얀 빛 속에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얼음 거탑도 콰릉 하고 떨어지는 중이었다.
“네 놈이 현광천정탑(眩光天晶塔)이 변한 영노였다고! 그 보물의 복제품들은 몇 만 년 전 북명선궁(北冥仙宮)에서 전부 훼손된 것으로 아는데 어찌 영노가 탄생했단 말인가!”
독살스러운 눈빛을 쏘아 보내던 거대 인영이 얼음탑을 보고 얼굴에 핏기가 가셔 소리쳤다.
선계의 수사였던 인영은 현광천정탑의 무서운 위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필사의 각오를 하고 혀끝을 깨물어 피를 내뿜었다.
쿠르릉-!
핏방울들이 새빨간 불 구렁이들로 변해 얼음 거탑으로 달려들었다.
인영은 선계 비술로 만들어낸 불구렁이들이 얼음 탑을 막는 동안 적혈봉령화가 먼저 얼음 봉인을 깨고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때가 되면 현광천정탑이라 해도 거대 혈화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영의 이런 행동은 모두 백포 노인이 유도한 것이었다.
노인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고 얼음 탑의 남색 구슬이 스스로 빙글 돌아 손가락 굵기의 남색 광선들을 분출했다. 광선들은 쉭! 파공음을 남기고 불 구렁이들을 공격했다.
치직!
남색 광선이 품고 있는 무서운 위력에 거대한 불 구렁이들이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하고 푸른 연기로 피어올랐다.
인영이 급히 다른 신통을 시전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대량의 한기를 품은 얼음 탑은 거대 혈화와 인영에게 동시에 압력을 가했고, 금색 주술문자들이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때 백포 노인의 허상이 탑 위로 솟아 겁을 먹고 있는 여덟 성령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희들은 뭣들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곤마대진을 조종해 영족을 위협하는 저 자를 봉인하는 것을 도우지 않고!”
성령들은 얼음 탑이 거대 혈화가 폭발하는 것을 막는 것을 보고 있다가 노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덟 성령은 서둘러 진법 주위에 자리를 잡고 진법 원반을 꺼내 법력을 불어넣었다.
우웅!
동시에 진법에서 주술문자들이 날아올라 흐트러져 있던 쇠사슬들을 보강하고 거대한 그물형태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때 거대 얼음 탑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더욱 거대해지고 있었다. 빙산처럼 거대해진 탑은 진법에서 뻗어 나온 쇠사슬 그물과 연결되어 인영과 거대 혈화를 뒤덮고 얼어붙었다.
그것을 본 성령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백포 노인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아래의 성령들에게 명을 내렸다.
“잘 듣거라! 내 본체를 이용해 강적을 이곳에 봉인해 두었지만 선계의 꽃인 적혈봉령화를 해결하려면 만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전에는 아무도 이 빙산을 건드려선 안 되고, 내 원신(元神) 역시 본체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너희는 당장 이곳에 금제 진법들을 펼쳐 노부의 본체와 곤마대진 전체를 다시 봉인해야 한다. 적혈복령화를 해결하는 대로 빙산을 구유지화가 있는 땅으로 옮겨 상대의 혼백을 천천히 단약으로 제련하면 되겠지.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본 족의 중대사는 장로회에서 공동으로 결정한다. 반드시 이번 마겁을 이겨내거라! 영족의 번영이 머지않았다!”
“명 받들겠습니다, 영왕 대인!”
여덟 성령이 숙연하게 무릎을 꿇고 답했다. 진법 원반을 거둬들인 성령들은 즉시 명을 수행하기 위해 빛줄기로 변해 쏘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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