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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86화 (943/2,000)
  • 1186화. 살인멸구(殺人滅口)

    *

    진한 비취색 문양을 머금은 제단은 강한 만황의 기운이 느껴졌다. 흑갑 거한은 남색 구슬을 꺼내 아래쪽 바다에 던지고 손을 뻗었다.

    콰르릉!

    바닷물이 용솟음쳐 산만한 파도를 이루었다. 파도가 푸른 물의 보호막을 형성해 돌로 만들어진 제단과 여덟 대두목인(大頭木人)들을 감쌌다.

    “주인님, 제단 설치를 마쳤습니다.”

    거한이 길게 숨을 내쉬며 포권을 하고 소리쳤다. 궁장 여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차분히 물의 보호막 안으로 스며들었다.

    여인의 주술소리가 울리자 물의 보호막에 겹겹이 남색빛이 떠올랐고 주변 공간이 왜곡되어 보호막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네모난 제단의 모서리에 여덟 대두목인들이 두 명씩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궁장 여인의 손에서 동전이 날아올라 쟁반만 하게 커지더니 제단 중앙에 떨어졌다. 표면에 복잡한 주술문자가 어른거리는 동전 안에 흐릿하게 보라색 빛구슬이 반짝였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인이 여덟 대두목인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우두커니 서있던 목인들의 얼굴에 괴이한 기운이 어리고 흉악한 악귀 얼굴로 변했다.

    악귀 얼굴들은 섬뜩하게 으르렁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난리를 쳤지만 목인을 벗어나 멀리가지는 못했다.

    “제물을 준비하게.”

    “예, 주인님!”

    궁장 여인의 분부에 흑갑 거한도 제단 위로 날아들어 한 손을 자신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휘리릭!

    새까만 가죽 주머니가 빙글 날아올라 보라색 쟁반 위로 향했다. 주머니에서 핏물이 흘러내려 쟁반 안의 보라색 빛구슬을 적시고 있었다. 괴이하게도 핏물이 폭포수처럼 흐르는데도 쟁반은 절대 넘치지 않았다.

    흑갑 거한은 계속해서 검은 가죽 주머니를 조종했고 한식경이 지나도록 핏물은 그치지 않고 떨어졌다.

    “그만하면 되었네. 합체기 상고 짐승을 죽여 얻은 정혈이니 최대한 아끼는 것이 좋겠지.”

    “존명!”

    궁장 여인의 말에 흑갑 거한은 검은 가죽 주머니를 오므려 거둬들였다. 이어 수결을 맺은 여인 뒤로 거대한 분홍 꽃나무 허상이 나타났다. 나뭇가지마다 기이한 분홍색 꽃이 가득한 꽃나무는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인은 신형이 모호하게 변해 사라졌다가 꽃나무 꼭대기에 다시 나타났다. 여인은 얇은 도(刀)를 꺼내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들어 올려 손목을 베어냈다.

    진한 은색 액체가 손목의 상처에서 흘러내려 꽃나무 속으로 흡수되었다.

    우우웅!

    분홍 꽃나무가 은색으로 변해 가지마다 화려한 은색 꽃을 피웠다. 잠시 후 궁장 여인은 입김을 불어 손목의 상처를 없애고 얇은 도를 회수했다.

    그리고 비단 손수건을 꺼내 날리고 주변을 가렸다. 마치 밤이 된 것처럼 한 줄기의 빛도 들어오지 않아 내부가 깜깜해졌다.

    어둠 속에서 궁장 여인이 발끝으로 꽃나무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펑!

    거대한 꽃나무 허상이 폭발해 은빛으로 흩어지고 검은 밤의 장막에 별처럼 박혀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여인은 전신에서 은빛을 발하며 작은 언덕 크기의 하얀 환영으로 변해 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여인의 환영을 중심으로 은색 별들이 현묘한 별자리를 이루고 쟁반 속 빛구슬이 천천히 떠올라 꿈틀꿈틀 요동쳤다…….

    궁장 여인 앞에 문득 금색의 나침반이 떠올라 그녀가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일곱 빛깔의 빛덩이를 방출했다. 가벼운 손짓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창백해져 갔다.

    이때 제단 모서리의 대두목인들의 여덟 악귀 얼굴이 고공을 향해 새까만 빛기둥을 분출했다.

    * * *

    반 시진 후, 산호 군도 쪽에서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마족 부대가 날개 달린 상어 마수를 이끌고 나타났다. 상어 마수는 굼떠 보이는 생김새와 달리 아주 빠르게 물의 보호막으로 접근했다.

    마족들이 거대한 보호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치려는 찰나 이변이 발생했다.

    콰르릉!

    물의 보호막이 모습을 드러내고 수축했다 늘어났다 하다가 폭발한 것이다. 남색 물결이 사방으로 튀고 거대한 소용돌이가 형성되었다.

    놀란 마족들은 타고 있던 상어 마수를 내리쳐 남색 빛에 대해 보호막을 펼쳤다. 보호막 안의 병사들은 화난 얼굴로 병기를 꺼내들었다.

    그때 남색 소용돌이가 급속도로 작아지고 그 안에서 하얀 궁장 차림의 여인과 흑갑 거한이 빠져나왔다.

    금색 나침반을 든 여인은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표정이 복잡한 것이 얼떨떨한 것 같기도 했고 기쁨과 의문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등장에 주변의 화신기 마족 병사들은 화들짝 놀랐고 흑갑 거한도 주위를 둘러보고 놀란 눈치였다.

    정순한 마기를 품고 있는 궁장 여인과 흑갑 거한의 수행은 그들이 파악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두머리 격인 고계 마족이 서둘러 앞으로 나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저는 폭마족 석삭이라 합니다. 두 선배님께서는 어느 일족이십니까?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흑갑 거한이 냉랭히 그들을 훑고 무어라 말하려다 궁장 여인을 향해 공손히 물었다.

    “주인님, 저들을 어찌 처리해야겠습니까?”

    “우리를 보았으니 전부 죽여야겠지.”

    궁장 여인은 나침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간단히 답했다. 이에 흑갑 거한은 의외라 여기지 않고 흉흉한 눈빛으로 폭마족 병사들을 보았다.

    “다, 달아나라!”

    우두머리 화신기 마족이 궁장 여인과 흑갑 거한의 말을 듣고 즉시 소리쳤다. 그는 민첩하게 주먹 크기의 구슬을 꺼내 던지고 발밑에 검은 칼날을 불러내 합일(合一)한 뒤 산호 군도 쪽으로 달아났다.

    다른 폭마족 병사들도 가슴이 철렁해 흩어져 튀어 나갔다. 그 모습에 흑갑 거한이 소매 속에서 검은 기운을 방출했다.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가득한 검은 기운 속에서 각종 요충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검은 기운은 달아나는 마족 병사들을 뒤덮었고 절망 어린 비명만이 하늘을 채웠다. 그리고 거한은 마풍(魔風)으로 변해 가장 먼저 달아난 우두머리 수사의 검은 둔광을 쫓았다.

    얼마 후 거한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통을 들고 돌아와 그것을 마기 속으로 던져 넣었다. 흑갑 거한이 궁장 여인 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검은 기운 속에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여인은 시종일관 고개를 들지 않고 손끝으로 금색 나침반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지. 자네가 빠르게 처리하기는 했으나 누군가의 이목을 끌었을 것이네.”

    궁장 여인이 돌연 나침반을 회수하고는 평온히 말했다. 그녀는 분홍빛을 일으켜 흑갑 거한을 감싸고 산호 군도 방향으로 날아갔다. 둔광 속 흑갑 거한이 눈치를 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주인님. 마지막에 제단이 왜 폭발한 것입니까? 주인님께 무리가 된 것은 아니겠지요?”

    “아닐세. 이번 천점의 여파가 예상보다 커서 꼭두각시들이 대신 훼손되었을 뿐이야. 대체할 꼭두각시들을 제련하기 전에 다시 점술을 펼치기는 어렵겠구만.”

    궁장 여인은 숨김없이 답해주었다.

    “예? 어찌 그런 일이……. 그럼 점괘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어찌 되었든 점괘를 얻을 수 있었으니 안심하게 그저 점괘가 너무 애매하고 모순되어서 해석하기 어려울 뿐이네. 분명한 것은 저들이 내 회복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네. 들키지 않고 뒤를 쫓다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잘 쫓아다니면 되지요! 그런데 저 많은 합체기 수사들이 이렇게까지 멀리까지 온 것을 보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들이 무슨 속셈인지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알 수 있을 것이네.”

    “주인님께서 이미 인족 여인의 몸에 은밀히 표식을 심어 두셨고, 저들이 저희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 추격은 문제없을 겁니다.”

    흑갑 거한이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고 궁장 여인은 고개만 끄덕이고 말이 없었다.

    * * *

    몇 시진 후, 초대형 산호섬 상공.

    천추성녀의 보물로 은신을 한 일행이 고공에서 멈춰 멀리 마족 요새를 내려다보았다. 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마족 요새의 담에는 빼곡하게 금제가 새겨져 있었다.

    검은 보호막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성벽 위는 각종 병기를 든 마족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그 위로 머리가 둘 달린 괴조들이 날아다녔다.

    요새의 중심으로 갈수록 순찰을 도는 병사들이 많아져 경비가 삼엄했다. 이런 요새 위로 거대한 검은 구름이 꿈틀거렸다. 그 안에서 수시로 은색 뇌전이 번득이고 굉음이 들려왔다.

    “착오가 있는 것 아닙니까? 이곳이 농 형께서 말씀하신 소수의 마족 병사들이 주둔해 있는 소규모 요새가 맞는 것입니까?”

    천추 성녀가 어두운 얼굴로 마족 요새를 쳐다보았다. 다른 성령들의 표정도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한립과 엽 수사를 비롯한 인족 수사들도 상대의 체면을 생각해 말을 아꼈지만 농 가 노조를 향해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는 중이었다.

    “모두 오해 마세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둔하는 병사가 얼마 되지 않던 곳입니다. 아마 근래에 대량의 병사들이 증원되어 이렇게 요새가 커진 듯 싶습니다.”

    농 가 노조가 씁쓸하게 웃으며 해명했다.

    “농 형께서 대사를 앞두고 허언을 하셨을 거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제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이 정도 규모면 마족 존자도 머물고 있을지 모르는데 다른 접점통로를 찾아봐야 할까요?”

    천추성녀가 마지못해 표정을 풀고 물었다.

    “다른 곳을 찾기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곳이 그간 조사했던 접점통로 중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으니까요. 다른 접점통로들은 들어가기는 쉬워도 마계에 이르면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요새가 조금 커지기는 했지만 반드시 마족 존자가 머물고 있으리란 법도 없고 한두 명쯤 마주친다고 해도 우리의 신통에 힘을 합쳐 빠르게 해치우고 마계로 들어가면 될 것입니다.

    위마주가 고계 마족의 이목도 속일 수 있다지만 금제에 대항하는 능력은 뛰어나지 않으니 만일 강력한 금제가 있어 행적이 드러나면 마족 대군을 돌파해 진입하는 것으로 합시다.”

    침음하던 농 가 노조가 다부지게 제안했다.

    “저는 찬성입니다. 이렇게 많은 합체기 수사들이 있는데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냥 쳐들어가서 깨끗하게 마족들을 처리하고 접점통로에 들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임 가의 산발 사내가 그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렇게 되면 마계의 마족들이 소식을 접해, 이후 마계에서의 이동이 불편해지지 않겠습니까?”

    엽 수사가 걱정스레 말했다.

    “마계는 광대하니 마족들이 모여 있는 성만 피해 다니면 그들도 우리를 찾기 쉽지 않을 겁니다. 거기다 이족이 마계에 침입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도 아니라서 마족들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도 있고요.”

    검은 장포를 입은 휘 수사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한립은 턱을 쓸어내리며 말이 없었고 천추 성녀와 성령들은 자기들끼리 전음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결론을 내렸는지 여인이 농 가 노조를 향해 의견을 말했다.

    “이제 와서 경로를 바꾸는 것은 시간 낭비가 큽니다. 농 형의 계획에 따르겠습니다. 들키면 무력으로 제압하고 접점통로로 진입하는 것으로 하지요. 하지만 마계의 상황은 지금처럼 착오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걱정 마십시오. 접점 반대편은 확실히 미리 말씀드린 곳일 겁니다.”

    그녀의 말에 농 가 노조가 자신 있게 답했다.

    “농 형께서도 그리 말씀하시고 시간 끌어 좋을 일이 아니니 바로 움직이시죠! 제가 연운번(烟雲幡)의 위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최대한 금제에 걸리지 않고 접점에 다가갈 수 있게 하겠습니다.”

    천추 성녀가 수결을 맺어 주변 안개로 법력을 튕겨 넣었다. 한립이 명청령안을 일으켜 살피니 이전보다 확실히 흐릿해져 영목 신통으로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천추 성녀가 그것을 눈치 챘는지 의미심장하게 그를 보았지만 조용히 깃발을 쏘아 보내 마족 요새 쪽으로 나아갔다. 검은 구름까지 그다지 멀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순찰을 도는 무리를 여덟 번이나 마주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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