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5화. 천점(天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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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거대 전함은 주저하지 않고 너른 바다 위를 가로질렀고 그 안에서 영족과 인족 수사들은 각자의 방에 앉아 묵묵히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이번 마계행은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원정이 될 수도 있었다.
거대 전함의 어느 방 안, 사방에 다채로운 빛깔의 금제가 반짝이는 가운데 세 명의 한립이 나란히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한립 본체와 영체 화신 그리고 제2마영(魔嬰)이 조종하는 법상금신이었다.
혈광의 세 화신들에게 쫓길 당시 곡아가 깃든 영체 화신과 제2마영이 미끼가 되어 한립의 곁을 떠나있어야 했다. 다행히 영체 화신은 타고난 신통으로 추격을 피해 달아났고, 제2마영은 비술로 원영을 폭발해 혼백 중 일부가 운 좋게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천연성으로 돌아온 한립은 비술을 펼쳐 진작 이들을 불러들이고 싶었지만 마족대군에 성이 포위된 때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체 화신과 마영은 어쩔 수 없이 잠시 마족대군이 없는 곳에서 잠시 숨어 기다려야 했다.
천연성이 마족대군을 격퇴하고 한립이 요양을 위해 폐관에 들어갔을 때야 비로소 그들은 은밀히 밀실로 돌아와 본체와 재회했다. 마영이 천연성과 그의 거처인 석탑 금제를 훤히 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체와 곡아는 한립과 떨어져 있는 동안 법력이 약간 늘어 있었다. 그러나 제2마영은 스스로 원영을 폭발해 살아남은 잔혼들만 응집한 것이라 원기를 크게 상하고 말았다.
다른 수사들이었다면 제2원영을 회복시키기 위해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넘게 골머리를 썩었겠지만 수많은 영단묘약을 지닌 한립에게는 고민거리도 아니었다.
대량의 영약을 복용한 결과 제2원영은 반년도 되지 않아 원기의 7, 8할을 회복했다. 현재 제2마영은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으나 무리 없이 법상금신을 조종할 수 있었다.
한립은 곁에 앉은 두 화신들은 놔두고 온 신경을 눈앞에 있는 보라색 작은 솥에 쏟고 있었다.
솥은 손바닥 크기로 고풍스런 양식을 하고 있었고 표면에는 현묘한 주술문자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뿜은 푸른 화염 줄기에 휩싸여 있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작은 솥을 주시하고 있는 한립은 열손가락을 튕겨 계속해서 푸른 화염 속으로 법력을 던져 넣었다.
웅!
푸른 화염 속에서 솥이 작게 울자 흐릿한 회백색 띠가 솥 안으로 절반쯤 스며들어 반짝거렸다. 빛의 띠는 푸른 화염 속에서 영성을 지닌 것처럼 미친 듯이 반짝였는데 마치 푸른 화염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법결을 날리는 한립의 손짓이 더욱 빨라졌고 입에서 분출하던 푸른 화염의 색깔도 변해 금빛도 흐릿하게 머금고 있었다.
퍼펑!
회백색 빛의 띠는 더 이상 푸른 화염을 견딜 수 없는지 솥 안에서 튀어나와 하얀 빛구슬로 뭉쳐져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던 한립은 차분히 손가락을 튕겨 금색 뇌전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하얀 빛덩이는 파직! 소리를 남기고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해냈어! 오랜 시간을 들여 노마(老魔)의 의식을 쫓아냈으니 이제 정혈로 다시 제련만 하면 보물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겠구나.”
그것을 보고 마음이 가벼워진 한립이 즐겁게 중얼거렸다. 그는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입에서 선홍색 정혈을 뿜었다. 핏덩이가 펑하고 터져 핏빛 안개로 작은 솥에 흡수되었고 푸른 화염은 배로 불어나 활활 타올랐다.
작은 솥은 한립이 혈광성조 화신에게 빼앗은 자언정이었다. 이 현천잔보는 현묘한 위력을 발휘해 그를 꽤나 골치 아프게 했었다.
이전에는 노마의 의식 일부가 남아 있어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몸속에 넣어두고 천천히 연화를 시켜야 했다.
그러나 노마의 한 줄기 의식이 영악하게 솥 안에 몸을 숨기고 보물의 힘을 이용해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한립은 몇 년이 걸려 오늘에서야 노마의 의식을 솥 밖으로 끄집어내 멸할 수 있었다. 이제 자언정은 피를 이용해 제련하면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보물의 변화무쌍한 신통을 생각하면 빼앗긴 현천잔보 칼날 조각보다도 더 위력적인 보물이었다. 한립은 꼬박 이레 동안 밤낮없이 솥을 제련하다 8일째 되는 날 밝은 얼굴로 소매를 털어 푸른 화염을 거두었다.
한립이 입을 벌려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작은 솥이 빙글 돌아 엄지손가락 크기로 변한 다음 쉭! 하고 그의 이마에 붙어 은은한 보랏빛을 반짝거렸다.
그는 눈을 감고 솥의 각종 신통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 * *
3일이 지나서 눈을 뜬 한립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작은 솥의 쓰임새를 대부분 익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보물을 거둬들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득 눈에 이채를 띠고 입에서 푸른빛을 뿜었다.
긴 장포 소매가 푸른빛에 찢겨나가고 고동색 팔뚝이 드러났다. 팔뚝에는 흐릿한 노란색 검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현천의 검이 봉인된 자리였다.
팔뚝의 흔적을 보며 머뭇거리던 그가 다른 손을 그곳에 대고 법력을 운용했다. 손바닥을 통해 금빛 파랑이 물밀 듯이 주입되었다.
노란 흔적은 정순한 영력에 힘에 의해 점차 또렷해지고 색깔도 녹색으로 변해가다 나중에는 검푸른 색을 띠었다. 멀리서 보면 검푸른 수정으로 된 작은 검이 팔뚝에 박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립은 신중하게 변화를 관찰하며 금빛 영력의 주입을 멈추지 않았다. 일다경이 지나 검푸른 검이 바르르 몸을 떨고 팔뚝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놀란 그가 팔뚝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금빛 영력을 끊어냈다. 검이 움직인 순간 팔 전체가 화로처럼 뜨거워지고 팔의 경맥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영력 주입이 멈추자 검푸른 검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한립은 노란 검의 흔적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푸른빛이 팔을 뒤덮고 찢겨 나갔던 장포 소매가 흔적도 없이 회복되었다.
“보아하니 합체 후기의 법력으로도 현천의 보물을 발동하기에는 부족하구나. 강제로 격발하면 감응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사용하려면 대승기 수행은 지녀야 되겠어.”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멍하니 앉아 있다가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 * *
두 달 후 푸른 거대 전함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 그것을 감지하고 한립도 눈을 떴다. 잠시 후 농 가 노조의 목소리가 밀실에 울려 퍼졌다.
“한 형, 접점 통로에 거의 다 왔습니다. 이 비행 전함은 너무 눈에 띄니 이제 직접 둔술을 써서 나아가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한립은 담담히 전음으로 답하고 몸을 일으켜 장포 소매를 털었다. 사방 벽에서 다채로운 빛깔의 진법 깃발들이 빠져나와 그의 소매 속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곧 전함 밖 고공에 나타났다.
그곳에는 이미 농 가 노조와 천추성녀 등 일행 중 일부가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고, 그의 뒤를 이어 임 가의 산발 사내와 영족의 늙은 유생이 나타났다.
늙은 유생이 주문을 외고 손끝으로 허공을 짚어 푸른 전함을 축소해 품에 넣었다.
사방은 망망대해여서 쪽빛 하늘 저 멀리 하얀 구름들이 떠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나흘이면 현무경 구석에 위치해 있는 접점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곳은 마족 중에서도 싸우기를 좋아하고 포악한 폭마(暴魔) 일족이 머물고 있어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고 합니다. 혼란스러운 곳이니 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농 가 노조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당연히 신중히 움직일 것입니다. 허나 처음부터 천연성 인근의 접점을 선택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깃털 옷의 엽 수사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천연성 인근의 접점통로는 안 될 말입니다. 노부가 미리 조사한 결과 이곳의 접점을 이용해야 곧장 마계의 혈석산맥(血石山脈)에 이를 수 있어요. 혈석산맥은 마계에서도 황량한 곳이라 마족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아 훨씬 안전하고요. 다른 접점통로를 통해 마계로 들어가는 것은 호랑이 입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거나 목적지와 너무 멀어 몇 배는 더 시간을 허비해야 합니다.”
“저도 그저 아쉬운 마음에 한마디 한 것이지 농 형의 안배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아니랍니다.”
바로 고개를 젓는 농 가 노조를 향해 엽 수사가 웃음을 흘렸다. 이때 천추성녀가 다가와 농 가 노조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나머지 네 성령들과 출발했다.
농 가 노조도 농 가의 휘 장로와 함께 날아갔고 나머지 셋이 그 뒤를 따랐다. 이후 나흘간 그들은 곳곳에서 마족 순찰병들과 마주쳤다. 그 수가 많을 때는 백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마족 병사들은 천연성에 나타난 마족과 달리 체구가 훨씬 크고 남색 문양이 들어간 갑옷을 입고 다녔다.
그들의 실력에 마족 병사들을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지만 최대한 몸을 숨겨 은밀히 움직였다. 이에 마족 순찰병들은 그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넷째 날 오후에 접어들었을 때 바다 저 끝에 검은 점들이 나타났다. 크기가 제각각인 산호섬들이었다.
“전방에 고계 마족들이 주둔하고 있을 겁니다. 천추성녀께서 나서주셔야겠어요. 다른 분들은 미리 나눠드린 위마주를 삼켜 혹여 들키게 되면 그 안의 마기를 이용해 적들을 속여 넘기도록 하시지요.”
농 가 노조가 둔광을 멈추고 천추성녀와 다른 수사들을 둘러보았다.
“알겠습니다. 이번 일을 위해 백 년 동안 공들여 제련한 물건이니까요.”
천추 성녀는 빙그레 웃으며 하얀 깃발을 꺼내 흔들었고 하얀 꽃들이 마구 흘러나와 펑펑 터져나갔다. 하얀 꽃들이 만들어낸 안개가 응집해 다른 수사들을 둘러쌌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안개를 살폈을 뿐 몸을 피하지는 않았다.
천추 성녀가 깃발을 강하게 흔들며 주문을 외우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하얀 안개에서 오색 주술문자가 떠오르고 그 안의 인영들이 희미하게 변해 종적을 감춘 것이다.
엽 수사 등 다른 수사들은 희색을 드러냈고, 한립도 의식으로 안개를 살펴보고는 눈을 빛냈다. 정체 모를 현묘한 금제의 기운이 어려 있어 그의 강대한 의식으로도 텅 빈 허공만이 감지되었다.
그는 명청령안을 발동하고 나서야 보호막처럼 그들을 둘러싼 하얀 안개가 보였는데 아주 얇고 흐릿해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립은 그제야 안심하며 남색 빛을 거두었다.
이런 은신 효과는 그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아도 특수 신통을 익힌 마족 존자가 아니면 평범한 고계 마족에게 들킬 일은 없어 보였다.
임 수사와 엽 수사도 안개의 효과에 신기해했고, 농 가 노조는 아주 흡족한 얼굴을 했다. 천추성녀가 깃발을 날리자 깃발이 하얀빛으로 변하며 기척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다른 수사들은 새까만 구슬을 하나씩 꺼내 삼키고 하얀 안개에 몸을 숨긴 채 산호 군도가 있는 쪽으로 나아갔다.
* * *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고공에 파동이 일고 분홍색 빛구슬이 나타났다. 빛이 가시고 흑갑 거한과 하얀 궁장 차림의 여인이 나타나 보라색 동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흑악, 준비하게. 천점(天占)을 보아야겠어.”
보라색 동전이 번득이며 사라지고 여인이 입을 열었다.
“지난번 천점을 보신 여파가 아직 남아 있으신데 이렇게 단시일 내에 점술 신통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연달아 두 번의 천점을 행하는 것은 큰 부담이지만 법력을 회복할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는 없네.”
“겨우 인족 수사들에게 그리 마음을 쓰십니까? 주인님께서 진원건(震元鍵)을 내주시면 제가 대신 저들을 죽이고 영약을 찾아와 바치겠습니다.”
“진원건의 위력이 대단해도 자네의 수행으로 얼마나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천명동전의 경고로 보아 저들 중 누군가는 진원건에 대항할만한 방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네. 됐으니 이만 준비를 시작하지. 저들의 속도가 느리지 않아 시간을 지체할수록 쫓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야.”
궁장 여인이 거한을 보고 담담히 명을 내렸다.
“예, 주인님!”
흑악은 여인이 마음을 굳히자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백여 장 정도 떨어진 그는 두 손을 펼쳐 8개의 새까만 나무 인형을 방출했다. 팔뚝 반절 크기의 나무 인형들은 희로애락 등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흑갑 거한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빙글 몸을 돌려 백여 개의 돌 판자들을 불러냈고, 돌 판자들은 빠르게 결집해 순식간에 높은 청록색 제단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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