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4화. 천명동전(天命銅錢)
*
“지난번에 주인님께서 현천여의인 조각도 회수하셨는데 아직 현천의 보물 조각이 남아 있다니 가진 자산이 두둑한가 봅니다.”
흑갑 거한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말게. 영약의 행방을 찾기 전에 저 자를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야.”
“소인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흠칫 놀란 거한이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저 인족은 합체 후기에 이르러 자네가 나서도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일세. 지난번에 보았을 때는 중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벌써 후기에 이르다니, 현천잔보를 지닌 것 외에도 분명 다른 비밀이 있어.”
“그럼 주인님, 이제 저희는 어찌하면 될까요? 이렇게 계속 감시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인족의 최상급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저 둘이 이곳에 모였다는 것은 큰일을 벌일 거란 뜻일 게야. 아직 수사들이 다 모이지 않은 것 같으니 일단 기다려보세. 이전 점괘에 따르면 영약의 행방과 저 천봉혈맥을 지닌 인족 여인이 연관이 있다 했으니까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일세.”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것들이 다 모이면 그들 중에 영약을 지닌 자가 나타날 수도 있고요. 그럼 저 인족 녀석은 그때 가서 죽여 없애도 되겠지요.”
흑갑 거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구만. 저들이 하는 모양을 보니 다른 이들이 전부 모이려면 시간이 걸리겠어. 자네는 본 좌의 보물 안에 잠시 앉아 있게나.”
호리호리한 인영이 손을 들어 분홍색 안개를 뿜어내자 그 안에 커다란 분홍색 꽃나무가 흐릿하게 떠있었다.
흑갑 거한은 허리를 굽혀 몸을 날려 꽃나무 속으로 들어갔다. 호리호리한 인영도 빛으로 변해 꽃나무와 하나가 된 후 흐릿하게 사라졌다.
* * *
닷새 후, 일곱 빛깔의 기운이 번득이고 커다란 푸른 전함이 나타나 산골짜기 방향으로 날아갔다. 3층으로 이루어진 전함은 각종 진법과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귀한 비행 보물이었다.
거대 전함 꼭대기에 네 사람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하얀빛의 모호한 인영, 노란 치마를 입은 고운 여인 그리고 마른 사내와 연로한 유생이었다.
“상의한 대로만 하는 것입니다. 영물을 찾기 전에는 인족 수사들과 힘을 합쳐야 해요. 이번 마계행은 극도로 위험할 테니 우리 영족인들의 힘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울 겁니다.”
하얀빛 속 인영이 냉랭히 말했다.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우리 영족에 또 한 명의 대승기 수사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후 다른 종족들의 압박을 받을 필요가 없겠죠.”
그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황포 여인은 탄식하듯 말했다.
“천추 선자가 인족과의 교류가 비교적 많았으니 그쪽과의 소통은 맡기겠습니다. 우리는 선자에게 전적으로 협조할 것이고요.”
마른 사내가 느긋하게 여인을 쳐다보았다.
“감사합니다. 농 가 노조 쪽도 두 영물을 찾기 전에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니 처음부터 너무 긴장하지는 않아도 됩니다.”
황포 여인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는 게 좋을 겁니다. 딴마음을 품었다가는 당하는 것은 그들이 될 테니까요.”
노인 유생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허허, 그 말도 맞습니다. 우리의 전력에 인족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요. 허나 이번 일을 성공하지 전에 분란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곧 모이기로 한 장소에 도착할 것 같으니 천추선자께서는 그것을 소환하시지요. 잘 통제해 절대 인족들이 허점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얀빛 속 인영이 눈을 빛내며 당부했다.
“안심하세요. 지능이 온전치 못하지만 노조께서 주신 보물을 이용하면 통제할 수 있으니까요. 저물대에 넣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랬으면 우리 쪽 인원을 한 명 더 데려갈 수 있었을 텐데요.”
“제대로 통제만 되면 우리보다 더 강한 실력을 발휘할 텐데 그게 대수겠습니까. 자, 이제 준비들 하지요! 곧 도착입니다.”
하얀빛 속 인영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모두를 재촉했다. 다른 영족들은 하얀빛 속 인영의 말에 답하고 분분히 전함 안으로 이동했다.
비슷한 시각, 산골짜기의 다른 방향에서 세 개의 빛줄기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가장 앞서고 있는 중년 사내는 농 가 노조였고, 양옆의 둔광에는 얼굴에 흉터가 있는 흑포인과 무표정한 얼굴의 산발 사내가 떠있었다.
푸른색 거대 전함과 세 개의 빛줄기가 동시에 산골짜기 위에 도착해 대치했다.
“이런 우연이 다 있습니다. 영족 수사분들도 지금 도착하셨나 봅니다.”
농 가 노조가 둔광을 거두고 나타나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농 형께서는 벌써 도착해 계실 줄 알았는데, 이제야 도착하셨네요.”
천추 성녀의 목소리가 전함에서 들려왔다. 잠시 후 선단에서 성녀뿐만 아니라 네 명의 성령급 수사들과 희미한 안개가 나부기는 창백한 얼굴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안 그래도 먼저 와있을 계획이었는데 오는 길에 사소한 말썽이 생겨 이렇게 되었습니다. 수사들께서도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농 가 노조가 웃으며 상대편 수사들을 훑다 하얀빛 속 인영에게 시선이 멈추었다.
“말썽이요? 이번 일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그저 고계 마족을 만나 처리하고 오느라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이번 일은 절대 새어나가지 않았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천추 성녀의 물음에 농 가 노조가 가볍게 답해주었다.
“그럼 마음 놓고 있겠습니다. 다른 수사들께서 먼저 와계신 것 같은데 내려가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실까요?”
“기운으로 보아 한 수사와 엽 선자일 겁니다. 내려가서 만나보시지요.”
그들은 서둘러 산골짜기로 향했다. 영족의 푸른 거대 전함은 비술을 사용했는지 홀로 고공에 남아 있다 늙은 유생이 고개를 돌려 손짓하자 그 자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성령들과 농 가 노조 일행이 산골짜기에 내려섰을 때 맑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오셨습니다. 저와 엽 선자가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산골짜기 안쪽에서 두 개의 빛줄기가 번뜩하고 나타나 두 무리 앞에 멈춰 섰다. 한립과 깃털 옷을 입은 엽 수사였다.
“과연 두 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군요. 모두 무탈하게 모여 다행입니다.”
농 가 노조가 그들을 보고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천추 수사 말고 다른 영족 수사 분들은 처음 뵙는데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한립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며 영족 무리를 살폈다.
“한 수사께서 벌써 합체 후기 경지에 이르셨단 말입니까!”
천추 성녀가 한립을 보고 크게 놀라 소리를 높였다. 만령대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합체 초기였는데 몇백 년 만에 후기의 경지가 되어 나타났으니 기겁할 만했다.
“여러모로 운이 따라주어 후기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잔잔하게 미소를 짓는 한립을 보고 다른 성령들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영족 성령들은 출발 전 인족 수사들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 때문에 한립을 알아보았다.
“허허, 한 형은 우리 인족에서 십만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 덕에 우리의 일이 성공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으니 기뻐할 일입니다.”
농 가 노조가 묘한 얼굴로 웃음 지었다.
“저도 한 수사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합체기에 이른 후에도 이렇게 빨리 수행이 오를 줄은 몰랐습니다. 농 형의 말씀대로 마계행에 도움이 될 경사군요. 아, 먼저 본 족의 다른 수사 분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은 영족 금계(金系) 일맥 금고 장로십니다. 음파 신통에 정통해서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할 때…….”
천추 성녀가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회색 장포를 입은 마른 사내부터 소개하기 시작했다. 엽 수사와 인족 수사들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한 명 한 명 자세히 그들을 살펴보았다.
천추 성녀의 소개에 따르면 마른 몸의 청년 ‘금고’ 장로 외에 장 형이라 불리는 늙은 유생은 진법과 금제에 능했고, 하얀빛 속에 신령처럼 보이는 ‘백척’은 마공을 억제하는 여러 신통에 능할 뿐만 아니라 마계의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창백한 청년에 대해서는 새로 합체기에 이른 기령족 장로 ‘지수’라고 소개했고, 허공을 깨는 효과를 지니는 독특한 비술을 지니고 있다고만 설명하고 넘어갔다.
성령들 중 합체 후기의 천추 성녀와 하얀빛 속 백척을 제외하면 늙은 유생 장형과 금고 장로는 중기의 수행을 지녔고, 지수라는 청년만이 합체 초기였다.
한립이 뜻밖에 합체 후기에 이르지만 않았다면 성령들의 전력이 인족을 능가했을 것이다. 농 가 노조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처음 만난 성령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에 영족 늙은 유생과 마른 사내만 미소를 머금고 답하고, 백척과 지수 수사는 냉랭하게 서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농 가 노조는 별의별 성격의 수사들을 다 만나 보았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한립을 시작으로 인족 수사들을 소개했다.
합체 후기에 버금가는 백척 수사는 성령이 발산하는 기운이 천추 성녀보다 훨씬 강했기에 인족 수사들은 무의식중에 그에게 가장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후기 성령의 본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전신의 하얀빛이 쉼 없이 깜빡거려 한립도 한참 쳐다보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 놀랐을 정도였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그들은 인근의 거목 아래에 앉아 마계로 진입하기 위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논의했다.
마계행을 오랜 세월에 걸쳐 준비해왔기에 큰 줄기는 논의가 끝나 있었고 아주 자잘한 문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두 시진 후, 그들은 상의를 마치고 다 같이 날아올라 다시 모습을 드러낸 허공의 푸른 전함으로 들어갔다.
우우웅!
푸른 전함이 일곱 빛깔 기운을 번득이며 푸른 빛줄기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하늘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전함 안의 수사들은 몰랐지만 아주 높은 고공에서 희미한 하얀 빛덩이가 소리 없이 뒤를 쫓았다. 괴이한 하얀 빛덩이 속에서 흑갑 거한이 크게 놀라 궁장 여인을 향해 무언가를 물었다.
“저들 중에 주인님도 경계할만한 자가 있다니 말도 안 됩니다. 부상이 심해 성조급의 신통을 발동할 수는 없으셔도 시간을 들이면 저런 합체기 수사들이야 충분히 하나씩 처리할 수 있으실 텐데요!”
분홍 기운의 궁장 여인이 한 손에 자금색 동전을 들고 손끝으로 문지르며 답했다.
“내가 합체기 수사들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천명동전(天命銅錢)이 스스로 반응을 보인 것이네. 저들 중에 누군가 내게 위협이 될 만한 보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겠지. 괜히 방심했다가 또다시 부상을 당할 수도 있네.”
그녀가 들고 있는 동전에는 각각 인자한 사람과 악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는데 서로 번갈아 가며 번득였다.
“어떤 보물이기에 주인님께 위협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신통을 잃기 전에는 현천의 보물을 제외하면 세상에 그런 보물이 몇 되지 않았지. 하지만 법력이 크게 준 지금은 알 수가 없네. 특수한 신통을 지닌 통천령보도 지금의 내게는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조금 전 영약의 흔적을 감지하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영약의 행방은, 저들 중 한 명에게서 희미하게 느껴졌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궁장여인은 드물게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그녀를 주저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흑갑 거한은 영문을 몰라 그저 궁장 여인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푸른 거대 전함은 그 길로 장장 석 달 넘게 날아갔고 모습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인족과 마족의 여러 거점을 지나 끝없이 펼쳐진 대양(大洋)에 도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