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3화.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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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뵈었을 때는 막 합체기에 이르셨는데 못 본 사이에 후기의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이렇게 빠른 수련 속도는 처음 들어봅니다. 마겁이 도래하지만 않았어도 진작 성도 사자가 찾아와 성도로 청했을 겁니다.”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다. 성도는 인족과 요족의 가장 정순한 혈통들이 모여 있고 셀 수없이 많은 진귀한 재료와 영약이 있다고 하니 그곳에 이를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럼 이것도 들어보셨습니까? 성도는 그 자체로 반쯤 현천의 보물이라 할 수 있고 우리 두 종족이 최후의 순간 혈통을 전승하기 위해 이용할 곳이란 걸요.”
깃털 옷 소녀가 진지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성도의 몇몇 노괴들을 제외하면 외부인 중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열댓 명이나 될까요? 그중에 삼황과 저 그리고 농 가 노조도 포함되어 있고요.”
여인은 미세하게 안색이 달라진 한립을 보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선자께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한 형께서 이곳에 오셨다면 마족 3대 시조가 강림할 거란 소식을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만일 두 종족이 이번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가문과 문하의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두셨습니까?”
“하하, 제자들이 몇 있기는 하지만 문파를 세운 적도 없고 가문이랄 것은 더더욱 없는 제가 그런 고민을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제가 듣기론 수사의 제자들은 이미 많은 제자들을 들였다던데요?”
소녀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건 제자들의 일이고 저는 일절 간섭할 생각이 없습니다. 운이 따라준다면 살아남을 것이고 아니라면 사라지는 것이 이치 아니겠습니까.”
한립은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요. 제가 괜한 말을 꺼냈나 봅니다.”
“엽 선자께서는 이번 마족과의 전쟁에 걱정이 많으신 듯합니다. 마족 시조가 무서운 존재이기는 하나 인근의 대승기 수사들이 연합하면 대항은 해볼 수 있을 텐데요. 게다가 아무리 명성이 자자한 3대 시조라도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그 실력을 알 수 없는 일이고요.”
“걱정을 아예 안 할 수는 없네요. 마족의 3대 시조가 다른 마족 성조들보다 강력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오, 선자께서 무언가 아는 바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한 형께서는 저희 집안 아이의 목숨을 구해주신 적이 있지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한 형과 엽 가도 어느 정도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수사께서는 저희 엽 가의 선조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요?”
“엽 가가 상고시대부터 이어져 온 진령세가 중 하나라는 것 말고는 딱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한립은 턱을 문지르며 솔직히 대답했다.
“엽 가를 창시하신 선조는 물론이고 그 밖의 선조들 중에도 대승기에 발을 들여 놓은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십니다. 한 선조께서 대승기에 이르시고 체내의 진령 피가 극성으로 발동되어 신통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분은 마계에도 몇 번이나 몰래 잠입하셨답니다.”
한립은 소녀의 말을 유심히 들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 당시 선조의 신통을 설명하자면, 인근 이족 대승기 수사와 비밀리에 실력을 겨뤄 단 한 번도 진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도 다음 경지로 넘어가기 위해 몇 가지 진귀한 영약을 찾아 어쩔 수 없이 몇 번이나 마계로 잠입하셔야 했습니다.
처음 몇 차례는 아주 순조로웠으나 마지막에는 소식이 끊긴 후 돌아오지 못하셨지만요! 아마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해 마계에서 목숨을 잃으셨을 겁니다. 그분이 가문에 남겨 놓은 비밀 서책에 마계에 관한 정도가 꽤 적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직접 목격한 마족 3대 시조 중 한 명과 진령 간의 전투였고요. 선조의 말씀대로면 자신의 실력도 역대 대승기 수사들 중에 따를 자가 없을 정도였는데 마족 시조를 상대로는 일고여덟 초식을 버틸 자신이 없다 하셨습니다. 오소 선배님과 막간리 대인께서 아무리 강하셔도 절대 엽 가의 그 선조분을 뛰어넘지는 못할 텐데 하물며 마족 시조라면…….”
엽 수사는 한숨을 고르며 말을 멈췄다.
“마족 시조의 신통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꼭 정면 대결할 필요는 없지요. 그리고 그들은 이계(異界)의 존재라 영계의 배척을 받아 수행에 제한이 있을 것입니다. 영계야말로 우리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란 말이지요.
또한 제 생각에는 성도나 막간리 선배님 그리고 오소 선배님께서 분명 마땅한 대책을 세워놓으셨을 겁니다. 아니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전투를 지속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마족 성조가 강림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즉시 두 종족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아났겠지요.”
안색이 어두워진 한립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엽 가의 식솔들을 데리고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엽 가의 자제들 일부라도 성도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면 이번 전쟁이 두 종족의 대패로 끝나더라도 엽 가의 혈통이 끊기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엽 수사가 솔직히 자신의 바람을 털어놓았다.
“선자의 뜻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사자가 아니라 제게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하하, 한 수사께서는 아직 본 족에서 자신의 가치를 모르시고 계십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아, 한 형! 이번 마겁이 아니더라도 막간리 대인과 오소 선배님께서 두 종족을 언제까지 지켜주실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한 분은 다음번 대천겁을 이겨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다른 한 분도 대승기에 이른지 오래라 대천겁을 몇 번이나 더 넘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두 분을 제외하면 대승기 수사가 없는 이때에 요족과 인족 합체기 수사 중에 누가 대승기에 이를 확률이 가장 높겠습니까? 요족에는 특출한 요왕이 등장했다는 소식도 없고, 인족은 그나마 성황과 패황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지만 한 수사의 역천의 자질에 비하면 거론할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제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이번 전쟁에 승산이 없으면 성도에서 제일 먼저 수사를 성도로 청해 머물게 할 것입니다. 행여나 두 종족이 영토를 잃는다 해도 수사가 대승기에 이르면 다시 되찾을 기회가 생길 테니까요.”
엽 수사는 단번에 많은 말을 쏟아내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수사의 그 말씀은 조금 과장된 듯합니다. 그래서 제게 진짜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엽 가에서 가장 정순한 천봉혈맥을 계승한 아이들이 몇 있습니다. 수사가 그 아이들을 문하로 들여 마족과 결전을 벌이기 전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성조로 데려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 형께서 이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저는 마계에서 수사의 뜻에 따라 움직일 생각입니다.”
“제자라니, 농이시겠지요?”
엽 수사의 간곡한 부탁에도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로 농을 하겠습니까! 하나같이 천재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아이들이라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수사께서는 그저 문하로 들여서 약간의 조언만 해주시면 됩니다.”
“허나 저는 더 이상 제자를 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선자께서 원하시는 것이 엽 가의 제자들을 성도로 보내는 것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요. 제 말이 성도에 통할 것이라고 하시니, 성도의 장로들에게 보낼 서한을 적어 드리겠습니다.
결전 전에 제 제자들과 엽 가의 자제들을 함께 성도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지요. 성도에서 들어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요. 또한 마계에서 제 뜻에 따르실 필요도 없습니다. 엽 선자께서 알아서 현명한 선택을 하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한립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흠, 한 형의 말씀대로 따를 수밖에 없겠네요. 저도 그저 만일에 만일을 대비해 가문의 살길을 마련해 놓는 것뿐입니다. 보아하니 그 아이들의 복이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수사의 문하로 들어갈 수 있다면 앞길에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다만 제가 드린 약조는 어찌 되었든 지키겠습니다. 솔직히 한 형께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았어도 마계에서 수사의 뒤만 따라다니려고 했으니까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저는 이번 원정이 농 수사를 주축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흥, 농 가가 엽 가를 노려 계략을 꾸민 일이 어디 한두 번인 줄 아십니까. 농 가의 늙은이는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도 절반은 후인들을 위해서였고 나머지 절반은 마계에서 수사와 손을 잡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농 노괴가 영족의 인물들과 짜고 암암리에 무슨 짓을 벌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저는 이용만 당하다 그들의 손에 희생양이 될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 염려를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자, 그럼 바로 서한을 적어 내드리겠습니다. 자제들에게 전달할 방법이 있으시겠지요? 엽 가의 자제들이 서한과 제 신물(信物)을 가지고 천연성의 제 제자들을 찾아가면 될 것입니다. 이번에 마계로 진입하면 몇 년이 걸릴지 몇 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니 돌아오면 마족과의 대대적인 전쟁이 코앞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한 형.”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옥간을 꺼내들었고 그 모습에 소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한립이 의식으로 내용을 새기기 시작하자 옥간이 푸른빛을 머금었다.
잠시 후 옥간은 푸른빛이 가라앉고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옥간과 투명한 옥패를 건네주었고, 엽 수사는 신속하게 두 물건을 살피고 기뻐했다.
“선자와 제가 약조한 날보다 며칠 일찍 도착한 것 같은데, 다른 수사들을 기다리는 동안 수련하며 얻은 깨달음을 교류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요행이 합체 후기에 이르렀지만 중기에 머물던 나날이 길지 않아 엽 수사에게 배울 것이 많습니다.”
“너무 겸손하십니다. 한 수사와의 교류라면 저도 바라던 일인 것을요. 마계행에 관해서도 논의드릴 일이 있으니 골짜기 안쪽에 제가 임시로 마련한 거처로 가시지요.”
한립의 제안에 엽 수사가 바로 흥미를 보였다. 그들은 둔광을 일으켜 골짜기 안으로 함께 날아갔다.
* * *
산골짜기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고공에 하얀 구름이 떠있었다. 구름 속에는 두 인영이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분홍빛에 둘러싸인 호리호리한 인영이 핏빛 법기를 들고 주문을 외고 있었다.
법기 표면의 핏빛이 줄었다 늘었다 하고 주술문자들이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아주 신비했다.
웅!
법기가 갑자기 눈부신 빛을 발하고 쩡! 하고 쪼개져 버렸다. 법기를 든 인영이 얼굴을 굳히고 소매를 저어 조각난 법기를 치웠다.
“이상하구나. 내 점술이 통하지 않아.”
“저 자가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영약을 지니고 있어 점술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대인께서 전력을 다하지 않아 그런 것입니까?”
호리호리한 인영의 말에 거한이 깜짝 놀라 물었다.
“내가 찾는 영약이 역천의 물건이기는 하지만 그런 신통을 지니고 있지는 않네. 저 자가 그것을 지니고 있었다면 점술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근거리에서 감응할 수 있었을 것이고. 지난번 펼친 점술 때문에 이번에는 제대로 된 신통을 부리지 못했지만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이상하군.”
“어찌된 일일까요? 주인님의 점술 신통은 대승기 수사나 되어야 차단할 수 있을 텐데요.”
거한이 얼떨떨해하며 되물었다.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상대가 비슷한 점술 능력을 펼칠 수 있거나 전설의 몇 가지 선령체(仙靈體)를 지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세.”
“주인님과 비슷한 점술 능력을 펼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영계에서 그런 능력이 있는 자는 몇 되지 않으니까요. 또한 전설적인 선령체를 지닌 자는 한 세계를 샅샅이 뒤져야 겨우 찾을까 말까 합니다. 그런데 겨우 인족 수사 중에 그런 자가 있을 리 없지요.”
“그래, 내 생각도 같다. 영계 같은 계면(界面)에서 선령체가 출현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저 자는 현천의 보물 조각 혹은 현천의 보물을 모조한 법기를 가지고 있겠군. 몇몇 현천의 보물이 함유한 법칙의 힘은 점술의 천지법칙을 막아낼 수 있다고 들었으니 말이야. 그런 현천의 보물 조각은 극소수일 테지만 그렇게밖에는 설명되지 않으니까.”
여인이 아무리 견문이 넓어도 한립의 몸 안에 완전한 현천의 보물이 봉인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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