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1화. 약조
*
석탑 최하층 밀실 안.
폐관한 이래 움직임이 없던 한립이 천천히 눈을 떴다. 맑아진 눈빛을 보니 원기를 대충 회복한 듯했다.
휙!
갑자기 불덩이가 날아들자 그가 의식으로 그것을 훑고 중얼거렸다.
“누군가 했더니. 아무래도 한 번 나가봐야겠구나!”
한립은 몸을 일으켜 푸른 빛줄기로 변해 밀실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석탑 꼭대기의 대청 안에 푸른빛이 번득이고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기령자와 해대소가 한립을 보고 밝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너희들은 그만 일어나거라. 농 형, 약조한 시간보다 훨씬 빨리 찾아 주셨습니다. 게다가 이런 때에 천연성에 직접 찾아오시다니 마족들이 쳐들어와 농 가가 풍비박산 날까 염려되지도 않으십니까?”
한립은 손을 들어 제자들을 물리고 그를 찾아온 이를 향해 담담히 물었다. 농 가 노조는 한립을 아래위로 훑으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
“먼 길 떠나오기 전에 진작 안배를 해두었습니다. 그보다 수사께서 후기의 경지에 이르러 마족 성조화신과 합체 후기 마존을 격살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직접 보고도 믿겨지지 않는군요.
후기에 이르러 수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사를 보니 노부의 미천한 수행이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일전에 약조한 일에는 큰 도움이 되겠지요. 사정이 생겨 시간이 앞당겨지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몇 년 사이 특별한 기연을 얻어 후기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마족 성조화신은 저 혼자 죽인 것이 아니라 곡 수사와 다른 분들의 조력이 있었고요.”
“어찌 되었든 합체기 수사가 마족 성조화신을 죽였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입니다. 게다가 당시 수사는 막 후기의 수행에 이른 상태였으니 합체기를 대성하면 얼마나 강해질지 모르겠어요! 지금만 해도 노부 역시 수사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 너무 겸손한 언사십니다, 농 형. 이제 변화가 생겼다는 사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한립이 가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말하자면 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지…….”
농 가 노조가 기령자와 해대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희는 물러가 있고, 부르기 전에는 들어오지 말거라.”
“예, 스승님!”
제자들은 공손히 답하고 서둘러 대청을 빠져나갔다.
우웅!
한립이 소매를 펄럭여 푸른빛을 날리자 대청 벽에 하얀빛이 층층이 일어나 내부를 봉쇄했다.
“이제 저와 수사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계속 이야기하시지요.”
한립은 금제를 발동하고 농 가 노조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한 수사께서 금제까지 발동해주셨으니 안심입니다. 사실은, 아무래도 마계로 진입하는 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노부가 접한 소식에 따르면 몇 년 후면 인요 양족이 마족에게 반격을 가할 예정이고, 그때 마계에서 3대 시조들도 영계로 강림한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그 이후로는 마계에 침입하기 어려울 거라는 뜻이지요. 마계로 가 영물을 취하려면 그 전에 출발해야 합니다.”
“마계의 3대 시조!”
한립의 안색이 단번에 달라졌다.
“한 수사도 마족의 3대 시조에 대해 들어보셨나 봅니다. 마계의 원시 고마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이들로 평범한 마족 성조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합니다. 듣자니 영계의 이종족 대승기 수사 몇 명도 이전에 그들의 손에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
농 가 노조의 말에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이에 농 가 노조는 재촉하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가 알기로는 마계 3대 시조는 마계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살해당한 이종족 대승기 수사들도 마계에 침입했다가 발각되어 당한 것이고요. 정확한 소식입니까?”
“노부의 정보가 잘못되었을 거라 의심하는 것입니까?”
“수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 소식은 성도로부터 들은 것이니까요. 게다가 오소 선배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랍니다. 그분의 말이 거짓이거나 잘못되었을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오소 노조, 그 어르신이 성도에 가셨단 말입니까?”
“오소 선배님은 성도에서 한동안 머물 거라 하셨습니다. 마족들과의 진정한 결전이 시작될 때까지요.”
“그렇다면 마족 시조들의 강림도 사실이겠습니다.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겠군요.”
농 가 노조의 대답에 한립이 탄식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원래 마족들의 거센 공격을 몇 차례 받아내고 형국이 안정되면 마계로 진입하려 했는데, 마족 시조가 친히 영계로 강림한다니 어쩌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전쟁의 승패는 오소 선배님과 막간리 대인 및 성조가 어떻게 대응을 하는가에 따라 결정이 날 것입니다.
일단 양족이 패배하면 마족들이 그 일대를 점령할 테니 마계로 진입할 방법이 없고, 승리한다 해도 마계로 돌아가는 마족들로 접점통로가 가득 찰 텐데 우리가 어떻게 몰래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마족 시조들이 강림하기 전에 잠입해야 마겁으로 인해 텅 빈 마계를 가장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겠군요. 영족 쪽에는 연락을 취해보셨습니까?”
“영족에는 연락을 취하기 어려워 아직 소식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만 괜찮다면 그쪽은 문제없을 겁니다. 마족 시조들이 인족과 요족만을 노리고 강림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주변의 이종족들도 별다른 선택권이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중요한 일인 만큼 이틀만 고려해보고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허허, 물론 그러셔도 됩니다. 노부가 이틀 후 한 수사의 답을 들으러 다시 오겠습니다.”
농 가 노조는 미소를 띠고 동의했다.
“그때는 반드시 확실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농 형 쪽의 마족들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족 대군에 대해 물었다.
“다른 곳은 잘 몰라도 거대 가문들이 만든 거점들은 마족들의 공격에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마족의 주 병력이 성황성에 집중하고 있기에 그나마 다른 거점들은 위험을 피한 것이지요.
아무래도 성황성 쪽의 마족 통령은 대부분의 병력을 성황성으로 결집해 그곳을 점령하고 다음으로 우리 같은 거점들을 멸할 계획 같습니다. 그러나 성황은 인족에서도 최상급 존재답게 여러 차례 마족대군의 맹공에도 성을 잘 지키고 있는 상황이고…….”
농 가 노조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힌립은 귀 기울여 듣다가 가끔씩 질문을 던져 궁금한 점을 물었다.
한립에게는 아주 만족스런 시간이었다. 그 후 농 가 노조는 한립과 한담을 나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대청 문 앞까지 배웅을 나선 한립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혹시 성도에는 오소 선배님 홀로 나타나셨습니까? 아니면 다른 문하의 제자들을 데리고 오셨다고 합니까?”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나 직계 후인을 데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 물었을 뿐입니다.”
농 가 노조는 조금 의아해하긴 했지만 한립이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자 서둘러 인사를 하고 둔술을 펼쳐 석탑을 떠났다.
한립은 그 자리에서 서서 농 가 노조가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지켜보다 무표정한 얼굴로 대청으로 돌아갔다.
대청에는 기령자와 해대소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
“스승님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제자들이 도와드릴 수는 없을까요?”
해대소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웃는 낯으로 물었다.
“너희가 도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이 스승에게 고민거리가 되겠느냐.”
“저희 수행이 미천해 스승님의 근심을 나눌 수 없어 송구스럽습니다.”
그의 말에 기령자가 부끄러워하며 답했다.
“너희의 수련 자질은 아주 뛰어나다. 그렇지 않았으면 짧은 시간 안에 그 정도 수행에 이를 수도 없었을 테지! 합체기 수사에게도 극히 위험한 일을 너희가 돕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내 일은 됐고, 일단 천연성의 대략적인 상황을 말해 보거라. 남은 마족들은 소탕을 마쳤더냐?”
“스승님께 아룁니다. 스승님께서 폐관에 들어가신 후 곡 선배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도 성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바로 각자 맡은 임무에 따라…….”
기령자가 천연성에서 최근 발생한 굵직굵직한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는 돌연 빙봉의 일을 물었다.
“봉 사고께서는 천연대전이 끝나고 수행을 높이기 위한 폐관 수련에 들어가셨습니다. 사고께서 말씀하시길 짧으면 몇 달 길어도 1년 내로 출관할 거라 하셨고요.”
이번에는 해대소가 서둘러 답했다.
“너희의 봉 사고는 본래 귀한 혈맥을 타고났으니 대전 중에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너희는 그동안 탑을 잘 지켜 누구도 사고의 수련을 방해하기 못하게 하거라.”
“예, 스승님!”
기령자와 해대소가 한 입으로 명을 받들었다.
“이제 쉬어야겠으니 너희는 그만 물러가 보거라.”
“알겠습니다. 저희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 오늘 농 수사가 찾아온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가려는 제자들을 향해 한립이 당부했다. 기령자와 해대소가 흠칫 놀란 공손히 대답하고 대청을 나섰다.
홀로 남은 한립은 의자에 앉아 무언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 아련한 표정이 떠올랐다.
* * *
반년 후 어느 산맥 위.
새까만 마기를 두른 마족들이 일고여덟 명의 인족 수사들을 둘러싸고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쌍방의 실력차이가 크지 않은지 전투는 시간이 흐를수록 치열해졌다.
그때 하늘 끝에서 오색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아래쪽 마족과 인족 수사들이 크게 놀라 누구도 적인지 동료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싸움을 멈추었다.
“기왕 보았으니 도움을 주마.”
오색 둔광 속에서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느다란 인영이 두 팔을 펼쳐 오색 빛의 실들을 뿜어내자 마족들은 몸에 구멍이 숭숭 뚫려 연기로 변해버렸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인족 수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예를 올렸다. 오색 둔광 속 몽롱한 인영은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하늘을 갈랐다.
이에 산맥 위의 인족 수사들도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들이 사라지고 얼마 뒤, 고공에 파동이 일고 두 개의 인영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커다란 몸집에 새까만 갑옷을 입은 추한 사내와 분홍색 안개로 가려져 모습이 보이지 않는 하얀 궁장 차림의 여인이었다.
“주인님, 아까 그 인족 수사들은 소인이 죽이고 오겠습니다.”
흑갑 거한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겨우 인족 중계 수사들에 불과한데 그럴 필요가 있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 여인을 뒤쫓는 것일세.”
“하지만 저 여인의 뒤를 몰래 쫓은 지도 벌써 1년입니다. 이전의 예측이 틀린 것은 아닐지요?”
고개를 젓는 궁장 여인을 향해 흑갑 거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점괘 신통은 착오가 일어날 수도 있다. 허나 지난번 점은 성공적이었네. 점괘의 풀이대로 움직이다 저 여인을 발견한 순간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아보았지. 여인을 따라가다 보면 내 부상을 회복할 만한 영약이 있는 곳이나, 영약을 지닌 자에게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전처럼 넓은 인족 영역을 마구 뒤지는 것보다는 확률이 높겠지!”
궁장 여인은 흑갑 거한을 보고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이에 흑갑 거한은 그녀의 말에 연신 그럴 거라고 답했다.
궁장 여인은 소매를 펄럭여 분홍 기운으로 그를 감싸고 서둘러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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