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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80화 (937/2,000)
  • 1180화. 서금충의 위력

    *

    혈포 소년은 등이 너무 아파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이번에 달아나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핏빛 둔광을 일으켜 태극도를 벗어나려 했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도 서둘러 막기는커녕 묘한 눈빛을 보냈다. 핏빛 둔광 앞에 갑자기 금빛이 번득이고 열댓 마리의 요수 허상이 나타나 앞발로 내리쳤다.

    빼곡하게 튀어나간 발톱 허상들이 폭음을 일으켰지만 열댓 마리 요수 허상도 몸을 떨고 튕겨나가 흐릿한 금빛의 짐승으로 합쳐졌다.

    “흐아악!”

    이때 핏빛 둔광 속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금빛 짐승으로 인해 주춤한 사이 밀려났던 서금충 떼가 달려들어 혈포 소년을 완전히 감싼 것이다.

    혈포 소년은 재빨리 수결을 맺어 몸에서 핏빛 광풍과 검은 마기를 방출했다. 하지만 어떤 신통을 써도 서금충 떼는 거머리처럼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결국 혈포 소년은 순식간에 갉아 먹혀 원영조차 살아남지 못했다.

    웽웽웽!

    그제야 만여 마리 서금충들이 금빛 꽃잎으로 흩어져 한립에게 돌아갔다. 한립은 영충들을 회수하고 텅 빈 하늘을 훑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때 태극도가 펑! 하고 터져 빛 알갱이로 떨어져 내렸고, 멀리서 보물을 조종하던 노인과 승려가 동시에 피를 울컥 쏟아냈다.

    “허허허! 마두를 드디어 죽였습니다. 덩치 큰 마족 존자도 한 수사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입니까?”

    은발 노인은 노곤한 얼굴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 후기의 마존은 제가 처리하였습니다.”

    “한 수사께서 큰 공을 세워주셔서 이번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은발 노인이 마지막 근심까지 털어버리고 기뻐하며 말했다. 이어서 그는 깊게 숨을 들이 마시고 큰 소리로 외쳤다.

    “마족성조도 죽임을 당했는데 너희가 아직도 위세를 떨칠 수 있겠느냐! 너희 모두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다.”

    은발 노인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전장 곳곳을 울려 인요족 병사뿐만 아니라 마족 병사들에게도 또렷하게 들렸다.

    이에 인요족 병사들은 환호성을 터트리며 기뻐했지만 마족들은 우왕좌왕했다.

    “어, 어찌 이런 일이…….”

    고계 마존들 역시 혈포소년과 마족 거한이 보이지 않자 어쩔 줄 몰라 했다.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는 주저하지 않고 여러 보물들을 가지고 가장 가까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천연성 장로 둘이 마족 존자들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갑시다.”

    푸른 갑옷을 입은 노인의 말에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마족이 두 손을 펼쳤다.

    콰르릉!

    검은 뇌화가 하늘을 뒤덮고 날아들어 천연성 장로가 거리를 벌린 틈에 마존 하나가 검은 통나무배를 불러내 올라탔다. 통나무배가 검은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이때 푸른 갑옷 노인은 진작 깃발을 꺼내 그 안에서 새어나온 기운에 휩싸여 사라진 뒤였다. 멀리서 공간 파동이 일고 희미한 푸른 인영이 나타나 다시 한 번 종적을 감추었다.

    두 마존은 재빠르게 줄행랑을 쳤다.

    그들과 싸우던 천연성 장로들이 힘을 합쳐 검은 뇌화를 제거하고 뒤쫓으려는 찰나,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가 인근에 도착해 그들을 말렸다.

    “지금 마존들을 쫓을 때가 아닙니다. 다른 수사들을 돕는 것이 우선이에요!”

    은발 노인이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보내고 먼저 방향을 틀어 다른 전장으로 향했다. 두 장로들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곧장 다른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별안간 마족대군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마족 존자들 몇몇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먼저 달아나기 시작했고, 병사들을 이끌고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다른 존자들은 인요족 합체기 수사들에게 포위당해 죽거나 중상을 입고 쫓겨났다.

    통솔자를 잃은 저계 마족들은 크게 당황해 성을 공격하기는커녕 달아나기 급급했다. 이에 인요족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 뒤를 추격했고, 마족 병사들 뒤로 각종 영기의 빛이 쏟아져 그들을 격추시켰다.

    한립은 금월선사 등을 따라가지 않고 조용히 고공에 떠서 마족대군이 참패해 달아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마족대군을 쫓아 인요족 병사들마저 사라진 후에야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번 전투의 결과는 마족의 패배였다. 또 다른 마족 성조화신이 강림한다고 해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한립은 전장에 오래 머물지 않고 표린수를 데리고 성 안으로 돌아갔다.

    이미 마족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퍼져 성 안은 환호성으로 가득했고 거처에서 숨죽이고 있던 저계 수사들도 거리로 나와 시끌벅적했다.

    천연성의 거리와 고공은 전투 전과 달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평소 평온함을 유지하던 한립도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잠시 성 안을 둘러보고는 곧장 거처로 날아가 석탑 안으로 들어갔다. 석탑 아래 숨겨진 은밀한 밀실에 다다른 한립은 금제를 전부 발동하고 표린수에게 몇 마디 말을 남긴 다음 가부좌를 틀었다.

    그의 몸 안에서 여러 약성들이 충돌하는 탓에 최대한 빨리 운기조식을 해야 했다. 그래서 은발노인 등이 승리를 선포하기도 전에 서둘러 거처로 돌아온 것이다.

    그가 폐관을 하고 요양에 들어간 동안 인요족 합체기 수사들은 병사들을 이끌고 3일 내내 마족대군을 추살했다. 마족 존자들 대부분은 도망갔지만 중, 저계 병사들 5, 6할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은발 노인 등은 적잖은 인원을 배치해 마족 잔여 세력의 동정을 감시했고, 대승을 거둔 천연성 대군은 모두 들뜬 얼굴로 돌아왔다.

    천연성으로 돌아온 병사들은 성을 지키던 이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승리를 축하하는 성대한 잔치가 열렸고 성 안의 모든 수사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천연성의 장로급 수사들은 성대한 잔치에 참석하지 않고 출전한 다른 합체기 수사들과 은밀히 따로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성도에서 몰래 지원을 보낸 합체기 수사들도 있었고, 수련에만 매진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천연성의 수사도 있었다.

    이런 합체기 수사 무리는 혈광화신이 서금충에 둘러싸여 죽임을 당했다는 은발 노인의 말에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서금충! 그것도 성체 서금충을 만 마리 넘게 키워 내다니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혈광성조 화신은 물론이고 또 다른 합체후기 마존도 전부 한 수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 아닙니까?”

    누런 얼굴에 새까만 수염이 가득한 거한이 낮게 웅얼거렸다.

    “말하자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노부는 금월선사와 마족화신을 잠시 붙들어 두었을 뿐 한 일도 없으니까요. 한 수사의 서금충이 있었기에 화신을 격살할 수 있었고 또 다른 후기 마존도 한 수사 홀로 처리했습니다.”

    은발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 말씀하실 일은 아닙니다. 곡 형과 대사께서 성보(聖寶)를 발동하지 않았으면 한 수사의 서금충들이 어찌 성조화신을 따라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청록색 머리를 지닌 노옹(老翁)이 신중하게 말했다.

    “최 옹, 그 태극 성보는 막간리 대인께서 떠나기 전에 주고가신 것입니다. 그걸 제 공으로 돌릴 수는 없지요.”

    은발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천의 보물을 발동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입니까. 곡 형과 대사께서 전신의 정혈을 짜내 겨우 성조화신을 붙들어둔 것을요.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은 곡 형과 대사가 아니라 저희들입니다.”

    노옹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남색의 긴 치마를 입은 부인이 빙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곡 형과 대사의 공이야 이번 전투를 위해 오랜 기간 고심해서 전력을 세운 것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그나저나 이야기를 들으니 한 수사란 분의 신통이 양족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 같은데 한 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수 부인의 말씀대로 노부도 한 수사를 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수사들 대부분이 여인의 말에 호응했다.

    “당장 만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전투로 한 수사 역시 원기를 적잖이 상해 성으로 돌아온 후에는 바로 폐관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회합에도 청하지 않았고요.”

    은발 노인이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그랬군요! 제가 경솔했습니다. 한 수사께서 출관한 이후에 따로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남색 치마의 부인은 아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답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요양 중이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 한 수사의 공이 크기는 하지만 여러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본 성이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을 겁니다. 말로는 감사의 마음을 다 표할 수 없고, 앞으로 천연성에서 여러분을 도울 일이 있다면 노부에게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신세를 갚겠습니다.”

    은발 노인은 그곳에 모인 합체기 수사들을 훑으며 포권을 했고 그 외의 다른 천연성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다른 합체기 수사들이 희색을 드러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마족 존자들과 마족대군 절반가량이 살아남았으니 혈광성조가 독한 마음을 품고 다시 화신을 내려 보내면 힘든 싸움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본 성은 수비를 단단히 하는 한편 마족대군을 지속적으로 추격해 사살할 계획입니다. 마족들이 천연성을 다시 넘볼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니까요.”

    은발 노인이 인사를 마치고 앞으로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에 다른 수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 * *

    은발 노인과 천연성의 장로들의 주도 하에 인요족 병사들 절반 가까이가 여러 가지 임무를 받아 성 밖으로 나섰다. 천연성 주변의 마족을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수사들은 천연성에 남아 훼손된 진법과 방어구를 복구하고 부대를 꾸려 급히 마계 통로 접점으로 보내도록 했다. 접점을 파괴하면 마족 패잔병들이 마계로 지원을 요청해도 천연성 주변으로 강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상의를 마친 합체기 수사들은 곧바로 대전을 떠났고 그곳에는 은발 노인과 최 옹이라 불렸던 노인만 남았다.

    성도에서 파견된 사자 중 한 명인 최 옹은 은발 노인과 비밀리에 무언가를 상의하고는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은발 노인의 얼굴이 부쩍 밝아졌다. 최 옹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대로 인근에 머물던 마족 무리를 제거했다. 그러나 나머지는 천연성 일대를 벗어나 다른 여러 마족 대군으로 합류했기에 더 이상 쫓을 수 없었다.

    이에 마족들을 추격하던 병사들은 그저 경계 지역에 대량의 소초(小哨)를 세우고 성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천연대전(天淵大戰)은 일단락을 맺었다.

    인요족은 대승을 거두었지만 방어 역량의 3분의 1이 훼손되었고 몇몇 합체기 장로도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다. 물론 연허기 이하의 사상자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다행히 마족대군을 물리치고 인요족 사상자 보다 훨씬 많은 마족들을 죽였기에 천연성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천연성의 승리가 마겁에서 인요족 전체의 승리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여러 거점들은 마족 대군의 포위에 둘러싸여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천연성이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족 병사들을 몰아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곳곳에서 숨어 있던 산수(散修)들과 종문, 세가들이 몰려들었다. 이를 통해 천연성은 전투로 잃은 병력을 손쉽게 보충할 수 있었다.

    천연성이 빠르게 방어체제를 복구하며 열심히 전력을 끌어올리는 동안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한립의 거처에 특수한 신분의 손님이 찾아와 해대소와 기령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들은 얼른 탑 꼭대기의 대청으로 손님을 모셨고 그는 태연히 기령자를 향해 명을 내렸다.

    “너희 사부와 긴히 논의할 일이 있어 찾아왔으니 즉시 알리거라.”

    “선배님께 아룁니다. 스승님께서는 폐관 중이시라 손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기령자는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사실대로 고했다.

    “상관없다. 나와는 이전에 약조한 것이 있으니 너희가 소식을 전한다고 해도 혼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선배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

    기령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전음부를 꺼내 몇 마디 중얼거리고 그것을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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