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9화. 태극도(太極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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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법력 대부분을 소모했기 때문에 노란 방석을 꺼내 그 위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는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단약들을 삼켜 무리하게 힘을 쓴 대가로 몸이 폭발하는 것은 막았지만 약성을 제대로 흡수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때 기운을 눌러 놓지 않으면 분명 후환이 있을 것이다.
다행히 주변에 진법이 있었고 표린수가 나타나 호법을 섰기에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잠시 후 그의 몸에 금빛 광채가 흐르기 시작했다. 금빛 속에서 한립은 수결의 모양을 바꿔가며 자신의 가슴으로 열손가락을 튕겼다.
휘휘휘휙.
가느다란 은색 실들이 파공음을 남기고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은색 바늘이 경맥 곳곳을 봉쇄했고 소매 속에서 다양한 빛깔의 부적이 날아올라 한립에게 달려들었다.
파파파팟.
부적들이 폭발해 남긴 주술문자들이 그의 몸에 흡수되었다. 한립은 끙끙 앓는 소리를 냈지만 이전보다 기운이 훨씬 안정되었다.
“얼마간은 버티겠지. 그런데 저쪽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구나.”
한립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았다면 금월선사와 은발 노인이 혈광성조 화신을 상대를 전투를 벌이고 있어야 했다.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리고 허공이 극심하게 흔들렸다. 주변의 빛의 장막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36명의 수사들이 나타나 입에서 피를 뿜었고, 팔과 다리가 터져나갔다. 그들 앞의 금제 법기들은 더더욱 강력한 반서를 당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한립은 조용히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곳에 붉은 수정처럼 반짝이는 새빨간 거대 해골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삼두육비를 한 거대 해골은 여섯 개의 손에 새까만 몽둥이 모양의 병기를 거머쥐고 있었다. 몽둥이들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풍이 일고 새까만 칼과 창들이 튀어나왔다.
해골 머리 위에는 혈포 소년이 앉아 있었는데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다른 손으로는 새까만 인장을 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있는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금월선사의 금색 가사는 사방으로 찢겨있었고 가슴에 핏빛 손자국이 깊게 찍혀 있었다. 그러나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상처에도 피 한 방울 새어나오지 않았다.
은발 노인은 핏기 없는 얼굴로 머리를 산발한채 어둑해진 일곱 빛깔 깃털 부채를 쥐고 있었다.
두 장로들 앞에 여러 보물들이 겹겹이 보호막을 만들어냈지만 마풍이 밀려들 때마다 부들부들 떠는 것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핏빛 거대 해골의 무서운 힘에 주변을 감싸고 있던 공간금제도 파훼된 듯 보였다.
한립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혈광 성조 화신의 실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잖아.’
그는 놀란 기색을 지우고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금제가 사라진 덕에 내부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이들도 한립을 볼 수 있었다.
한립을 본 순간 그들의 표정은 확연히 달랐다.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는 놀람과 기쁨으로 눈을 부릅떴지만 혈포 소년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한립은 멀쩡히 제자리에 서있었고 마족 거한만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혈포 소년은 마족 거한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찾아 계속 주변을 살폈다.
“한 수사, 함께 싸웁시다. 다 같이 저 마두를 이 자리에서 끝냅시다. 엇, 수사의 기운이 어찌 이리 약해졌단 말입니까. 조, 조심하십시오.”
혈포 소년은 의식으로 주변을 샅샅이 훑고도 거한의 흔적을 찾지 못하자 핏빛 거대 해골을 움직여 한립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마풍이 스스로 포효라도 하듯 거친 바람소리가 일고 천여 개의 새까만 칼과 창들이 쏟아졌다. 한립의 기운이 허약해진 것을 보고 서둘러 공격에 들어간 것이다.
법력 소모가 극심한 한립이 막기에 힘든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소매 속에 들고 있던 것을 던졌다. 새까만 고리가 날아올라 그 안에서 금색의 꽃잎들이 수도 없이 빠져나왔다.
웽웽웽웽웽!
꽃잎들은 허공에서 빙글 돌며 주먹 크기의 금색 딱정벌레로 변했는데 그 수가 만 마리가 넘었다. 흉악한 외모를 지닌 딱정벌레들은 성체 서금충이었다.
한립의 법력과 육신의 힘은 고갈되었지만 의식만은 멀쩡했기에 서금충들을 불러낼 수 있었다. 서금충들이 웽! 하고 금빛 구름으로 한립 앞으로 모여들었고 그의 손짓에 따라 두껍게 뭉쳐져 거대한 방패를 만들었다.
이때 마풍이 날카로운 칼날들을 머금고 방패와 충돌했다.
콰릉!
충돌소리가 연이어 들렸지만 금색 방패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굳건했다.
“가라.”
펑!
한립의 명령에 금색 방패가 와해되어 만여 마리의 딱정벌레들이 금빛 구름으로 변해 핏빛 해골 쪽으로 달려들었다.
“제길, 서금충!”
혈포 소년이 가까이 다가오는 영충 떼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 고함을 쳤다. 소년은 서둘러 발밑의 거대 해골이 지닌 몽둥이들을 투척했다. 몽둥이들이 새까만 거대 구렁이로 변해 금빛 구름으로 쇄도했다.
혈포 소년은 다급히 거대 해골을 박차고 핏빛 바람을 일으켜 거대 해골과 함께 달아났다.
쿠르릉!
여섯 마리의 거대 구렁이는 금빛 구름 속에서 꿈틀거리다 종적을 감추었다.
웽웽!
곤충 떼가 갑자기 거대 매의 형상을 갖추고 날개를 펼쳐 엄청난 속도로 쫓기 시작했다.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어서 그것을 씁시다. 지금이야 말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빈승도 그러려던 참입니다.”
은발 노인의 말에 금월선사가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고는 품에서 반쪽자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주술문자가 수놓아진 누런 손수건은 아주 낡고 더러워 보였다.
그러나 노인과 승려는 더없이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들고 주문을 외웠다.
두 개의 회색 빛덩이가 떠올라 허공에서 하나로 합쳐지더니 잿빛의 태극도(太極圖)로 변해 자취를 감추었다.
콰릉!
하늘이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몰려들며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까만 구름과 하얀 구름이 태극 문양을 만들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
달아나던 혈포 소년은 물론이고 태극 문양의 영향권에 있는 마족들도 어깨가 묵직해져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러나 마족 존자들에게는 그리 심각한 압력이 아니라 법력을 끌어올리면 얼마든지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핏빛 바람을 휘감은 혈포 소년도 아무렇지 않게 속도를 높여 달아나고 있었다. 이때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가 하늘을 향해 양손을 뻗고 큰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다음 순간 태극 문양이 빛을 번득이며 혈포 소년을 중심으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다섯 가지 색깔을 품은 주술문자들이 태극 문양에서 세차게 몰려나와 눈부신 빛을 머금었다.
쿠쿵!
태극 문양은 빙글빙글 돌아 혈포 소년을 내리 눌렀다. 소년 주변의 공기가 딱딱하게 굳고 사방팔방에서 압력이 쏟아져 핏빛 바람이 펑! 하고 터져나갔다.
거대한 힘이 소용돌이를 이루어 소년과 거대 해골을 휩쓸었다.
“이런, 현천의 보물이 있었다니!”
혈포 소년이 놀라 서둘러 새까만 인장을 발동했다. 날아오른 커다란 인장은 누각 크기로 커져 태극 문양을 강타했다.
쿵!
태극 문양은 미세하게 흔들거리다 화려한 빛을 내뿜어 인장을 튕겨냈다. 혈포 소년도 검은 인장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 그 틈을 타 핏빛 거대 해골 속으로 몸을 날렸다.
거대 해골은 소년을 흡수하고는 입을 쩍 벌리고 새까만 부적, 보라색 옥패 그리고 핏빛 빛구슬을 분출했다. 세 가지 물건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터져 새까만 기운, 보라색 광채, 핏빛 실뭉치로 변해 해골의 몸에 새겨졌다.
거대 해골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갑자기 괴력을 발휘해 압력의 구속에서 벗어나 팔을 자유롭게 움직였다.
후웅!
초승달 모양의 언월도를 닮은 새까만 칼날이 허공에 응결되었다. 거대 해골은 청록색 눈을 번득이며 여섯 개의 거대 언월도를 쥐고 허공의 태극 문양을 있는 힘껏 베었다.
이에 회전을 멈춘 태극 문양 중간에 검은 금이 생기고 둘로 갈라졌다. 거대 해골은 주변의 압력이 사라지자 재빨리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동시에 입에서 정혈을 뱉어 냈고 핏물은 핏빛 안개로 퍼져 사라졌다.
웅웅!
둘로 갈라졌던 태극 문양이 힘차게 진동하며 가운데로 중첩되었고, 표면에 빛을 반짝인 태극 문양은 이전처럼 하나가 되어 회전했다.
쿠쿵!
핏빛 거대 해골은 얼마 달아나지 못하고 다시 압도적인 힘에 내리 눌려 꼼짝하지 못했다. 거대 해골에 몸을 숨긴 혈광 화신이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불 보듯 뻔했다.
여섯 개의 손이 언월도를 풍차처럼 휘둘러 새까만 도광이 흑룡이 되어 태극문양으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매서운 도광에 태극 문양이 깨져나가도 빛이 반짝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이 되었기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가 아낌없이 정혈을 뱉어내 태극도를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달아 피를 토하느라 그들의 몸은 눈에 띠는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목숨을 걸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초초해진 혈포 소년이 이를 악물었다.
펑!
해골의 여섯 개의 팔 중 네 개가 폭발하고 등 뒤로 뼛조각들과 핏물이 모여들어 한 쌍의 날개를 만들어냈다. 남은 두 팔로 수결을 맺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휘익!
드디어 서금충 떼로 만들어진 금색 거대 새가 도착해 거대 해골의 등을 할퀴었던 것이다.
“이럴 순 없어!”
해골의 머리가 동시에 괴성을 지르고 금월도로 금색 매를 베었지만 서금충은 계속해서 날갯짓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태극도에 갇힌 거대 해골은 아무리 빨리 움직이려도 해도 느리기만했다.
금색 거대 매가 도광에 갈려 금빛 꽃잎으로 흩어졌다.
웽웽웽웽웽!
금빛 속에서 핏빛 해골이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해골의 몸을 금색 딱정벌레들이 뒤덮고 사각사각 갉아대는 소리가 퍼져나가 소름이 끼쳤다.
혈광성조가 만든 해골도 서금충을 이겨내지 못했는지 해골들의 몸이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성체 서금충들입니다. 한 수사가 이렇게 많은 수의 서금충을 부리다니 놀랍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막간리 대인께서 주신 보물을 아주 적시에 사용했어요. 꾹 참고 아껴두었으니 망정이지 마두가 달아나게 놔둘 뻔 했습니다.”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가 들뜬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때 한립은 핏빛 해골 옆으로 이동해 소매 속에서 두 손을 쥐었다 폈다. 그 모습에 해골 안에 숨어 있던 혈포 소년이 안절부절 했다.
해골의 몸이 얼마 남지 않아 더 이상 숨어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혈포 소년은 이를 악물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퍼펑!
거대 해골 잔해가 폭발해 핏빛 광채로 흩어지자 만여 마리 서금충들을 밀어냈다. 그러나 서금충 무리 속에 있던 십여 마리의 서금충들은 강력한 핏빛 광채의 파동에도 밀려나지 않고 혈포 소년의 뒤로 화살처럼 튀어나가 다시 갉아먹기 시작했다.
서금충왕 후보인 자문서금충들이었다.
한립은 연허 후기 수사에 상응하는 신통을 지닌 자문서금충왕 후보들을 다른 성체 서금충들과 몰래 섞어서 방출했다. 기운이 일반 서금충과 거의 흡사해 혈광화신의 이목을 속였기에 공격이 성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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