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4화. 천연대전(天淵大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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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꼭대기에 은색 장포를 입은 은광선자가 초조한 얼굴로 서있었다.
“스승님께 전음부를 보냈으니 곧 나오실 겁니다.”
기령자가 수시로 문 쪽을 살피는 은광선자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마족대군이 요새를 벗어나 천연성 인근에 이르렀다는구나. 한 형께서 어서 출관을 하셔야 할 텐데. 너희도 한 형을 따라 가거라. 그럼 전투 후반에나 참전할 테니 일반 수사들보다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높을 게다.”
“예, 감사합니다. 선배님!”
은광선자의 조언에 해대소와 기령자가 밝게 외쳤다. 빙봉도 고마운 기색이었다. 바로 그때 푸른빛이 번득이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은광선자, 마족대군의 진격이 시작된 것입니까? 이전처럼 그저 소란을 피우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 형, 출관하셨군요! 마족들이 대대적으로 성을 공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수들과 마족 병사들은 물론 혈광성조 화신까지 나타났으니 이전처럼 탐색하려는 목적은 아닌 듯합니다. 엇! 한 형께서 후기에 이른 후 수행이 이렇게까지 늘어나다니요. 법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은광선자가 희색을 드러내다가 의식으로 한립을 훑고 놀란 얼굴을 했다.
“별 것 아닙니다. 상황이 급박한 것 같은데 바로 다른 분들과 합류하겠습니다. 너희도 같이 가자꾸나.”
한립이 고개를 돌려 제자들에게 분부했다. 이에 제자들은 그의 분부에 따랐고, 은광선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석탑에서 날아올라 마족대군이 몰려오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한립은 한참을 날아가 천연성 성벽과 그 위에 섬처럼 떠 있는 거대한 궁전을 발견했다.
그를 비롯한 일행들은 방향을 틀어 천천히 궁전 앞에 내려섰다. 그곳에는 수천 명의 고계 수사들이 모여 있었고 중심에 따로 마련된 높은 석탑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은발 노인, 금월선사 등 장로회 구성원들이었다.
한립은 기령자와 빙봉 등에게 궁전 앞에 있으라고 당부하고는 은광선자와 같이 석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드디어 오셨습니다, 한 수사! 어서 와서 살펴보시지요. 저 자가 마족들을 통솔하는 혈광성조 화신인 것 같습니다.”
은발 노인이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마족대군을 가리켰다.
그 말에 한립은 내심 흠칫했으나 말없이 은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멀리 떨어진 마족대군의 정황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마족 전함들 중 삼각형의 거대 건축물 꼭대기에 핏빛 갑옷을 입은 고계 마족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거대 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마차를 이끄는 마수들이 전부 사자 머리에 비늘 갑옷을 입고, 거대한 몸과 전갈의 꼬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에는 마족의 문자가 적힌 새까만 깃발이 나부꼈다. 피처럼 새빨간 글자에 은은하게 핏빛 기운이 반짝였다.
깃발 아래로 마존들 사이에 핏빛 장포를 입은 소년이 서있었다. 이전에 그를 쫓던 3명의 혈광성조 화신과 똑같이 생긴 소년이었다.
한립이 서늘한 눈빛으로 살기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혈포 소년이 무언가를 감응했는지 슬쩍 고개를 돌려 영목으로 멀리 한립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소년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물들고 강력한 기운이 소용돌이처럼 한립의 시선을 끌어당기려 했다.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져 의식의 힘으로 눈빛을 회수했다.
이때 멀리 마족대군의 혈포 소년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혈광 수사, 뭐라도 발견하셨습니까?”
짐승 가죽으로 하반신만 가린 거한의 목소리가 마차 끝에서 들려왔다. 혈광성조가 성조 아래 ‘제1마존’이라 칭했던 흉 씨 거한이었다. 그는 마차 난간에 기대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인족 수사 하나가 우리 쪽을 엿보기에 쫓아 보내려 했는데 상대가 내 흑광마안(黑光魔眼)을 벗어났지 뭡니까.”
소년이 그를 힐끗 보고 선선히 답해 주었다.
“오, 평범한 인족 수사는 아니었나 봅니다. 제가 상대해야할 녀석이거나 아니면 이제 막 후기에 이른 녀석일까요?”
거한이 나른한 표정을 떨치고 흥미를 보였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누구든 간에 만만한 상대는 아니겠지요. 흉 수사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하하!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저는 상대가 너무 약해 마음껏 싸우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는 거한을 보고 혈포 소년이 쓴웃음을 지었다.
같은 시각, 두 눈을 감고 있던 한립은 한참만에야 어지럼증에서 벗어나 눈을 떴다.
“한 수사, 무슨 일이 십니까? 혹시…….”
은발 노인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별일 아닙니다. 상대가 비술을 사용해 기습했으나 지금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별 일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저 자가 혈광성조 화신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십중팔구 맞을 겁니다! 이전에 보았던 혈광성조 화신과 똑같이 생겼으니까요.”
“혈광성조가 친히 나서서 마족대군을 지휘하는 것을 보면 이번 전투에서 승부를 가르겠다는 생각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전투가 시작되면 저 성조화신은 한립 수사께 맡기겠습니다. 무리해서 상대를 압도할 것 없이 시간만 끌어주시면 됩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금월선사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다른 마족이 끼어들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저 마두의 화신이 다른 인족 수사들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사만 믿겠습니다. 저희도 다른 마족 존자들을 최선을 다해 막아 결코 수사를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지요.”
은발 노인이 기쁜 얼굴로 장담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말이 없었는데, 다른 장로회 장로들이 종종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이전보다 한층 격식을 차려 그를 대했다. 그러나 한립은 친분이 없는 장로들과는 간단히 몇 마디를 나누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둥둥둥둥둥둥!
이때 멀리 마족 대군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마기 덩어리로 이루어진 마해(魔海) 속에서 흉악하게 생긴 마수 무리가 튀어나왔다.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마수들은 소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흉수도 있었고 날개에 다리가 여섯 개인 인면(人面) 괴조와 거대한 몸집을 가진 석마(石魔)도 있었다.
홍수처럼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뒤로 백여 개의 검은 빛덩이 속에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화형기 마수들이 몰려나왔다.
지능이 발달된 마수들의 명령에 혼란스러운 마수 무리가 질서 정연하게 대열을 갖추고 낮게 으르렁 거렸다. 이런 평범한 마수들 말고도 초대형 마수들도 천여 마리나 섞여 있어 눈에 띄었다.
마수대군은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끊임없이 마해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천만 마리를 넘어선 마수대군을 보고 장로회 구성원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찌 이리 많단 말입니까? 기껏해야 5, 6백만 마리일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고 노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로는 그랬습니다. 아마 나머지는 새로 증원된 마수들이겠지요.”
금월선사가 낮게 불호를 외고 해명했다.
“마수들이 이렇게 많으면 상대하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요족 장로인 흑포 사내도 난색을 표했다.
“모두 당황할 것 없습니다. 저계 마수들은 어찌 되었든 저계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수가 배로 늘어난다고 해도 전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노부가 만일을 위해 대비해두었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은발 노인이 차분하게 장로들을 다독였다.
“곡 형께서 준비해두신 게 있다면 안심입니다.”
합체기 장로들은 그 말에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이에 은발 노인이 미소를 짓고는 하얀 진법 원반을 꺼내 무어라 중얼거렸다.
웅! 웅! 웅! 웅!
잠시 후 성벽 위로 파동이 일고 거대한 진법이 떠올랐다. 진법의 중심에는 옥처럼 새하얀 제단이 떠있었고 그 위로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짙은 남색의 발우, 새까만 호리병박 그리고 은색 장검과 하얀 병풍을 닮은 물건이었다.
“천하사보(天河四寶)! 곡 형, 드디어 이것들을 제련해 내셨군요! 하지만 저계 마수들에게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들이 아닙니까?”
합체기 요족 수사가 제단 위의 물건들을 알아보고 기뻐하며 말했다.
“이 보물들은 위력도 대단하지만 가장 큰 장점이 광범위한 살상력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용하려고 아껴두었다가는 오히려 적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할 겁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노부와 금월선사가 오랜 상의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천하사보로 저계 마수대군을 죽인다면 첫째, 적의 병력을 줄일 수 있고 둘째, 우리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적군이 처음부터 저계 마수들을 이렇게 많이 파견한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은발 노인이 상세히 설명했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여겼는지 다른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가장 성가신 것은 마족 정예병들입니다. 그들도 같이 출전한 것 같습니다.”
갑작스런 한립의 말에 수사들이 움찔하고 서둘러 성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마수 떼 뒤로 갑옷을 입은 마족들이 보였다.
마수를 타고 있거나 마풍으로 변한 마족들은 하나같이 살기를 품고 마수대군을 뒤따르고 있었다. 워낙 마수대군의 수가 많아 한립의 언급이 아니었으면 합체기 장로들도 바로 찾아내지 못했을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북소리와 함께 마해 속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고 새까만 전차들과 삼각형의 마족 비탑(飛塔)들이 마기를 빠져나왔다.
“마족 성조가 미친 것 아닙니까! 어찌 처음부터 전력을 전부 노출한단 말입니까. 설마 남겨 놓은 병력이 더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마족 대군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장로들이 눈을 부릅떴다. 이번에는 은발 노인도 예외는 아니었고 한립의 표정도 가라앉았다.
“마족들이 무슨 생각이든 간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응대하면 그뿐입니다! 곡 형, 마족들의 수에 놀아나지 말고 원래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하시지요. 다른 수사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전투에 우리 천연성의 생사존망이 걸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금월선사가 숙연히 외쳤다.
“당연히 우리도 전투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천연성과 생과 사를 함께 하겠다고 맹세하지는 못해도 일말의 승산이라도 있는 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검은 장포의 요족 수사가 거침없이 답했다. 다른 양족의 수사들도 신중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은발 노인이 이를 흡족하게 지켜보다 고개를 돌려 한립에게 전음을 보냈고, 한립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짝!
은발 노인의 박수 소리에 석탑 아래에서 금색 갑옷을 입은 병사가 올라가 장로들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너는 한 수사를 안내해 원래 계획대로 움직이거라!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존명! 한 선배님, 저를 따라 오시지요.”
노인의 엄한 명령에 병사가 힘차게 답했다. 한립이 곧바로 둔광을 일으켜 날아오르자 금갑 병사가 재빨리 그를 따라 허공 궁전에서 머지않은 성벽의 누각으로 안내했다.
누각 1층 대청에는 36명의 사내들이 거대 진법에 둘러앉아 있었다. 푸른 의복을 입은 사내들의 피부에서 청록색 실 줄기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그들은 화신기 경지로 모두 똑같은 공법을 익힌 듯했다.
‘이런…….’
한립은 그들을 훑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의 기운이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수련으로 얻은 성취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억지로 법력을 끌어올린 것이 분명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한립이 들어서자 수사들이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이분은 한 선배님이시다. 이후 모든 것은 한 선배님의 명에 따라야 할 것이야.”
“청운36위(靑雲36衛)가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너희가 힘을 합쳐 펼치는 진법은 마족 존자가 갇혀도 한동안 깨고 나올 수 없다고 들었다. 사실이더냐?”
“선배님께 아룁니다! 저희는 수도의 길에 들어선 이래 이 진법을 펼치기 위해 고된 수련을 해왔고 36명이 힘을 합치면 절대 허점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청진류광대진(淸眞琉光大陣)은 상고 진법 중 하나로 살상력은 출중하지 못하나 적을 가두는 데는 현묘하기 이를 데 없으니 마족 존자 한 명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우두머리 청포 수사가 성실히 답했다.
“그래, 알겠다. 앞으로 내 명에 따라 움직이면 된다.”
한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한립은 거대 진법 중심에 자리를 잡고 무언가를 기다렸고 길을 안내한 금갑 수사는 조용히 대청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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