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3화. 천과부(天戈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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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성 밖 마족대군을 통솔하는 성조화신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사를 쫓았던 화신들과 똑같이 혈광성조를 본체로 하니 신통이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한 형이 그 자를 상대한다면 이전의 성조 화신들보다는 쉬울 거라 생각됩니다.”
은발 노인이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곡 형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그 성조화신을 상대해 주었으면 하시는군요.”
“맞습니다. 평소였다면 노부도 절대 이런 위험한 일은 부탁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마족대군의 기세가 흉흉한데다 마족 존자들의 수는 장로회의 배 이상입니다.
다른 수사들과 머리를 쥐어짠 결과 천연성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성조 화신들은 일반적인 합체 후기 수사보다도 강하지 않습니까.
그가 직접 나서면 어찌 대처해야할 지 막막합니다. 성조 화신이 천연성 방어의 약점을 뚫고 마족 대군들이 뒤따라 성 안으로 침입한다면 방어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원래 계획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무런 대책도 세워놓지 않았다는 소리는 하지 않으시겠지요?”
“그저 금제의 힘을 빌리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원래는 총공격이 시작되면 수사들을 파견해 미리 준비해놓은 대규모 진법 속으로 상대를 유인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성조 화신을 죽일 수는 없겠지만 일단 가둬놓고 시간이라도 끌 계획이었죠. 하지만 말이 쉽지 상대가 유인당해 성공할 확률은 너무 낮습니다.”
한립의 물음에 금월선사가 답했다.
“그건 사실입니다. 마족 성조 화신들은 하나같이 간교해서 그들을 유인해 가두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전에도 한 형께 마족 성조를 유인해 달라 부탁드리고 싶었지만 너무 위험한 일이라 차마 입을 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합체 후기에 이르렀으니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지요. 무리해서 성조 화신을 이겨달라는 것이 아니라 전투가 시작되면 상대를 붙들고 시간을 끌어 천연성으로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마족 대군과 존자들을 장로회에서 막을 것이고요. 마족과의 결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이 일에 본 성의 존망(存亡)이 걸려 있으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은발 노인이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마겁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제 와서 그 약속을 어길 수야 없지요. 또 상대를 붙들어 두기만 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습니다. 혈광성조 화신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의로운 결정이십니다, 한 형! 천연성이 마겁을 이겨낸다면 반드시 이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은발 노인이 기쁨에 차 소리쳤다.
“아닙니다. 인족 전체의 안위가 걸린 일에 당연히 힘을 보태야지요. 이야기가 끝났으면 저는 경지를 안정시키러 물러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도 말리지 않고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를 대문 밖까지 배웅하고 돌아왔다.
“곡 형, 어째서 장로직은 제안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분위기가 무르익어 좋은 기회였는데요.”
금월선사가 미소를 거두고 신중히 물었다.
“대사의 생각에는 그가 허락할 것 같습니까? 저도 이전에는 혹시 모른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오늘 합체 후기에 이른 한 수사를 보니 절대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사의 생각에 한 수사의 실력이 다른 인요족 합체 후기 수사들과 비교하면 어떤 것 같습니까?”
“양족의 합체 후기 수사들이라면 빈승도 만나 본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수사처럼 정확한 수행을 파악할 수 없는 경우는 없었지요. 중기의 수행에 이미 동급 수사들을 여럿 격살하고 마족 성조 화신과도 손속을 겨루었다는 전적을 생각하면, 지금은 막 선배님과 오 선배님을 제외하면 한 수사의 상대가 될 자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 한 수사가 갑자기 어느 세력에 가담해 구속을 받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천연성에서 무엇을 가지고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요? 기왕 안 될 일이라면 괜히 한 수사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입을 열지 않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하아, 천 년 전까지만 해도 한 수사가 천연성의 병사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제는 저희보다 수도의 길에서 한참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에요.”
침묵하던 금월선사가 탄식했다.
“허허, 그래서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허나 지금은 한숨이나 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상의하던 일이나 마저 이야기 하시지요. 제 생각에는 성에 설치해 놓은 보물들의 위력으로 처음 저계 마수들의 돌진을 막는 것이…….”
은발 노인도 씁쓸하기는 했지만 얼른 표정을 바꾸어 화제를 돌렸다.
“안됩니다. 얼마나 고생해 제련해낸 보물들인데 저계 마수들에게 쓰다니요. 일단 사용해서 보물들의 존재를 들키면 다음번에는 상대가 대책을 마련해 효과가…….”
“하지만 저계 마수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는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시각, 한립은 대전을 나와 거처로 날아가고 있었다.
금월선사와 은발 노인에게 말했던 대로 이제 막 후기에 이르러 경지를 안정시키는 일이 급했다. 마족과의 결전이 시작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내서 경지를 안정시켜야 했다.
또한 합체 후기에 올라 범성진마공도 대성을 앞두고 있어 이전에는 사용하지 못하던 몇 가지 강력한 신통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신통들도 적 앞에서 펼치기 전 충분히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한립은 거처로 돌아가 기령자와 해대소, 그리고 빙봉에게 몇 가지 당부를 남기고 바로 밀실로 들어갔다.
그는 자리에 앉아 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가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우윳빛 옥패 두 개를 불러냈다.
은색 주술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진 옥패는 그가 오래 전에 얻은 금궐옥서(金厥玉書) 외장들이었다. 각각 현묘한 부적들의 제련법과 괴이한 비술인 백맥연보결(百脈煉寶決)이 적혀 있었다.
금궐옥서 외장은 온전하지 않았지만 오랜 연구 끝에 대부분의 부적들은 제련해냈고 이제 천과부(天戈符)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천과부는 유일한 공격성 부적으로 불가사의한 위력을 낸다고 적혀 있었다. 이전 부적들에 비해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몇 차례 기연을 얻고 이종족 부적대사와 교류를 통해 경험을 쌓아 겨우 연구를 마쳤다.
그리고 한립은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아냈다. 일단 재료도 찾기 어려웠지만 제련에 필요한 법력이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합체 중기의 수행을 지닌 그도 천과부 제련을 할 수 없을 만큼 대량의 법력이 필요했다.
답답한 일이었지만 당연했다. 적혀 있는 대로 무서운 위력을 내는 부적이라면 진선계에서도 평범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오랜 세월 제자들을 시켜 천천히 필요한 재료들을 모아왔고 그의 수행도 이제 합체 후기에 이르러 제련 과정을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번 폐관을 통해 천과부도 제련해낼 계획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옥패에 적힌 ‘백맥연보결’은 놀랍게도 육신을 보물과 같이 제련하는 비술이었다. 시전자가 갖춰야할 조건이 굉장히 까다로워서 한립의 단단한 몸으로도 이전까지는 원자극산 등 보물들을 신체 일부와 결합하는 것이 한계였다.
비술 일부를 왜곡해서 이용했는데도 신통의 위력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한립은 다시 정식으로 백맥련보결을 익힐 생각이었다.
한립은 두 금궐옥서에 적힌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고는 눈을 감았다. 일단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린 다음에 천과부 제련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천과부를 지니고 있으면 얼마 후 벌어질 전투에서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물론 그가 혈광성조 화신을 맡기로 한 이유는 천과부 때문만이 아니었다. 후기의 수행을 지녔으니 이제 서금충 떼를 이용해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수천마리 서금충 떼가 불시에 달려들면 성조화신이라도 무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거기다 범성진마공의 신통들도 범상치 않아 적에게 충분한 놀라움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고, 표린수와 자문 서금충들이 있으니 성조 본체가 눈앞에 있어도 목숨은 부지할 자신이 있었다.
한립은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고 명상에 잠겼다. 처음 얼마간은 밀실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지만 나중에는 낮은 울림이나 굉음이 들려오기도 했다.
* * *
쿠르릉!
보름 후, 엄청난 폭음이 울리고 금색 빛기둥이 밀실 천정을 빠져나가 한립이 기거하는 탑 위로 솟아올랐다.
거대한 빛기둥 속에 기다란 창 모양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창 주위로 수천 개의 은색 주술문자가 나풀거리는 것이 신비하기 짝이 없었다.
윙!
창 그림자가 날카롭게 진동하자 금빛과 파동이 무섭게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동이 닿는 곳마다 금색 빛의 점들이 떠올랐고, 빛기둥 쪽으로 밀려들었다. 주변의 정순한 금속 속성 영기가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좌선하고 있던 수사들이나 저공비행을 하던 병사들의 금속 갑옷과 다른 병장기류가 공명하며 대량의 금속성 영기를 빼앗겼다.
수사들은 화들짝 놀라 비술과 부적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보물을 통제하려 했으나 금속성 영기의 유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금속성 영기를 절반 넘게 빼앗긴 보물들은 빛이 어둑해졌고 이대로 가다가는 완전히 망가질 위기까지 이르렀다. 수사들이 혼비백산하며 당황해 할 때 빛기둥 속의 창 그림자가 부르르 몸을 떨며 발산하던 괴이한 파동을 멈췄다.
거대한 금색 빛기둥은 빨아들은 금색 빛의 점들과 함께 아래쪽으로 떨어져 종적을 감추었다. 다행히 주변 수사들이 지니고 있던 보물도 더 이상 금속성 영기를 빼앗기지 않았다.
이 같은 현상에 주변에 기거하던 수사들은 그가 대량의 금속성 영기를 필요로 하는 보물을 제련하는 중이라 여겼고, 크게 놀랐지만 감히 따지러 가지는 못했다.
금월선사와 장로회의 다른 장로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의 보고를 받았지만 한립에게 그 일에 따져 묻지 않았다.
성 밖의 마족대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 * *
두 달 후,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립의 두 손에 금은색 부적이 놓여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삼두육비의 허상이 떠 있었고, 법상은 희로애락 등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여섯 개의 팔을 들어 금색 법기 허상을 만들어냈다.
긴 막대기 모양의 병기를 비롯해 망치, 창 등 모든 법기들이 금빛으로 빛나며 은색 주술문자로 뒤덮여 있었다.
어떤 것들은 바람과 뇌전 소리를 냈고, 또 어떤 것들은 낮게 진동하며 줄었다 늘어났다 했는데 전부 엄청난 위력을 지닌 듯했다.
한립이 눈을 뜨자 금은색 부적이 소리 없이 사라졌고, 머리 위의 삼두육비 법상도 몸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휙!
이때 붉은 빛이 밀실 바깥에서 들어와 그의 손에 떨어졌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붉은빛을 들여다보다가 방대한 의식으로 탑을 훑었다.
“마족들의 공격이 시작되었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은광선자가 직접 찾아와 내 수련을 방해할 리 없을 테니.”
한립이 손뼉을 짝! 하고 쳐서 붉은 빛을 없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푸른빛으로 변해 밀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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