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2화. 제일마존(第一魔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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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이라도 선계로 올라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 일입니까. 우리처럼 죽을 날이나 바라보는 것과는 천양지차지요.”
은발 노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너무 연연해 할 것 없습니다. 상고 시대 이래 인족에 대승기에 이른 수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저 이번 대에 막간리 선배님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운이 좋았다고 여기고 삽니다.”
“허허, 선사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어차피 대승기에 이르러도 비승으로 가는 길은 거대한 관문이 막아서고 있으니까요. 이종족들은 가끔 운이 좋아 비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우리 인족은 선례가 없으니 더 막막합니다.”
“우리 인요족의 역사를 보면 도겁을 앞둔 몇몇 선배님들께서 잠적했다는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그 중에 한두 분은 천겁에 살아남아 비승에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금월선사는 긍정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허나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도 어서 자리를 뜨시지요. 괜히 한 수사의 오해를 사면 큰일입니다.”
은발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삼천 장 가까이 커진 푸른 허상을 보고 금월선사를 재촉했다. 그들은 빛줄기로 변해 빠르게 푸른 허상과 멀어졌다.
멀리 푸른 허상이 미친 듯이 주변의 천지원기를 빨아들여 천연성 위로 천지원기가 밀려들고 있었다.
푸른 허상은 마지막에는 오천 장까지 커져서 천연성에 거주하는 인족과 요족은 누구나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성 안 뿐만 아니라 마족진영의 몇몇 요새와 거탑에서도 흐릿하게 천기현상이 보였다.
그 중 가장 높은 탑, 핏빛 장포의 소년이 창가에 서서 천연성 방향을 바라보며 눈을 번득였다.
“이 기운은……. 틀림없이 어떤 녀석이 합체 후기로 진급하였구나. 강력한 기운으로 보아 약간 성가셔지겠어. 총공격 때에는 이 자를 상대할 인력을 따로 마련해야겠는데.”
“혈광 수사, 겨우 합체 후기 수사가 뭐라고 그러십니까. 제가 해결해 드리지요. 절 불러들인 것이 다 이런 일 때문이 아닙니까.”
창가에 있는 의자에 은색 짐승 가죽을 걸친 거한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짐승의 뒷다리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는 울룩불룩한 근육질에 구릿빛으로 빛나 맹수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 이 일은 흉 형께서 도와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수사께 부탁드릴 것은 다른 성가신 녀석이라 서요. 그 놈이 천연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저 합체 후기 수사라도 부탁드려야겠지요.”
혈포 소년이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상대는 분명 합체 후기 수사였는데 혈광과 서로 평대를 하는 듯했다.
“오, 합체 후기 수사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란 말씀이십니까?”
“아마 이제 막 합체 후기에 이른 저 놈보다는 상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제 삼대화신이 그 자를 두 번 쫓았고, 첫 번째는 실패한 채 돌아오고 두 번째는 아예 돌아오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일이 다 있었단 말입니까! 인요족의 대승기 수사 중 한 명은 아니겠지요?”
거한이 식욕이 뚝 떨어진 얼굴로 짐승 다리를 접시에 던져두었다.
“허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흉 형이 상대해야할 자는 인족의 합체 중기 수사로 실력이 뛰어나 평범한 합체 후기 수사를 넘어서는 정도입니다. 그래도 흉 형은 성족에서 성조를 제외하고 ‘제1마존’으로 불리는 분인데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지요?”
“그만 치켜세우시죠. 수사의 삼대화신을 죽일 실력이면 나보다 약하다고 해도 실력차이가 그리 크지 않을 겁니다. 원래 약속한 보수의 배를 주지 않으면 나서지 않겠습니다.”
거한이 턱을 문지르며 거침없이 보수를 올렸다.
“좋습니다. 그 대신 그 자가 지닌 모든 보물을 제게 넘기셔야 합니다.”
혈광 성조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요구를 수락했다.
“그 인족 수사가 아주 귀하거나 아니면 수사가 필요한 물건을 지니고 있나 봅니다. 알겠습니다, 보수가 낮은 것도 아닌데 보물까지 탐하면 안 되지요! 저도 수사의 삼대화신을 격살한 인족 수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싸워보고 싶군요. 그날이 하루빨리 와야 할 텐데요!”
거한이 열손가락을 쥐자 우두둑 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마치 사람을 물어뜯기 전의 맹수 같았다.
“저도 흉 형이 신용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큰 대가를 치르며 성계에서 이곳으로 모신 겁니다. 총공격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넘어오며 소모한 원기를 보충하고 계시지요.”
“겨우 그까짓 일로 휴식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바로 해야 할 일이 없으면 주변이나 돌아보렵니다. 성조들이 영계에서 까지 내가 하는 일을 막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거한의 얼굴이 순간 사나워졌다.
“물론입니다. 이종족의 땅이야말로 어떠한 구속도 없는 곳이지요. 재미있게 다녀오십시오, 흉 형!”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던 혈광이 웃으며 비위를 맞추었다. 이에 거한도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대청을 나가버렸다.
상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혈광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마족 제1마존이라 추켜 세워준 거한은 혈광성조 화신에게 경외감을 드러내기는커녕 말도 잘 듣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혈광성조 본체가 아니라 화신이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잠시 고민하던 혈광이 소리쳤다.
“여봐라, 10대 통령들을 모이라 하라!”
“예, 대인!”
문밖에서 병사 하나가 공손히 답했다. 한편 한립은 다시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사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천연성.
천지원기를 흡수한 거대 허상이 푸른 빛구슬로 뭉쳐져 탑으로 떨어졌다. 눈부신 빛을 번득이고 빛구슬이 사라졌을 때 탑 지하에서 한립이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눈을 떴다.
“이게 합체 후기의 경지였다니. 이제 대승기 문턱에 절반쯤 발을 걸친 것과 다름이 없어. 영생의 길이 희미하지만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한립은 체내의 법력과 의식이 확연히 늘어나자 감격했다. 유일하게 아쉬운 것은 육체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승기에 이르러야만 육신이 다시 주조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주조의 효과는 각자가 수련한 공법과 잠재력에 따라 다를 테고.’
한립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눈을 감고 천겁을 치르는 동안 소모한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심마에 대항하느라 많은 법력과 의식을 소모해 남은 천겁을 막느라 보물의 힘을 상당히 빌려야 했다.
마지막에는 기운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열 개가 넘는 최상급 보물을 터트리고 72개 청죽봉운검 마저 무리하게 발동했다.
후기에 이르기 위한 천겁이 그의 상상을 초월해서, 두 극산이 마지막 몇 차례의 천뢰들을 막아주지 않았으면 도겁도 실패하고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번 경험으로 원합오극산에 대한 그의 믿음은 훨씬 커졌고 앞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남은 세 개의 극산을 마저 모으리라 다짐했다.
합체 후기 천겁도 이렇게 강력한데 대승기에 이르거나 비승할 때의 천겁은 막을 수 있을지 오극산 없이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거기다 일정 세월마다 한 번씩 겪게 되는 대천겁의 경우 오극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한립은 잠시 고민을 미루고 단전에서 시작해 법력을 몸 곳곳으로 흘려보냈다.
…….
그가 좌선을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을 때 탑 지하 밀실의 문이 열렸다.
푸른빛과 함께 문 앞에 나타난 한립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한 형, 후기에 이르신 것을 감축 드립니다!”
기령자, 해대소 그리고 빙봉이 기다리고 있다 벌떡 일어나 기쁜 얼굴로 예를 올렸다.
“하하, 선자의 도움이 없었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대청으로 가서 자세한 이야기 나누시죠. 너희도 그간 고생 많았다. 따라 올라 오거라.”
한립의 말에 빙봉과 기령자, 해대소가 그를 따라 석탑 맨 위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한립과 빙봉이 최상층 대청 안에서 마주 앉았다. 제자의 신분인 기령자와 해대소는 옆에 서서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한립이 합체 후기에 이르자 그들은 그보다 더욱 좋아했다. 안 그래도 스승님 덕에 인족과 요족에서 기령자와 해대소를 함부로 대하는 이가 없었는데 앞으로는 더욱 더 그들에게 예의를 차릴 것이다.
“저는 천봉의 피를 타고나 누구보다 자질이 뛰어나다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 형을 뵈니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네요. 한 형과 힘을 합쳐 함께 공간접점을 통과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지 어찌 알았겠습니까. 한 형의 실력에 수행까지 합체 후기에 이르렀으니 인요족 중 대승기 수사를 제외하면 그 뜻을 거스를 자가 없겠습니다. 그저 부러울 따름이에요.”
빙봉이 따뜻한 어조로 선망을 드러냈다.
“제가 지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5할이 운입니다. 진령혈맥을 타고난 봉 수사의 자질에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수행을 높일 수 있을 텐데 부러울 것이 무엇입니까.”
“그랬으면 좋겠네요. 안 그래도 법력이 충만한 느낌이라 슬슬 다음 경지로 나아갈 때가 아닌가 싶기는 했습니다.”
“하하, 그럼 제가 먼저 축하를 드리겠습니다!”
한립은 미소 지었고 빙봉도 마주 웃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기령자, 내가 폐관에 들어간 동안 별일은 없었느냐?”
한립이 고개를 돌려 기령자를 향해 물었다.
“스승님께 아룁니다! 최근 성 안에 마족대군의 대규모 공격이 코앞이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리고 스승님이 천겁을 치르고 나서 수많은 종문과 세력들이 축하 서한과 선물을 보내와서 제자가 일단 받아 기록하고 창고에 넣어두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직접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장로회의 장로들도 각각 선물을 보내셨고, 금 선배님께서는 스승님이 출관하는 대로 장로회로 나와 주실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물건들은 시간이 나면 살필 테니 우선 창고에 두거라. 장로회는……. 아마 마족과 관련한 사안이겠지. 길게 끌 일이 아니니 바로 다녀오마.”
한립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령자와 해대소, 빙봉은 그가 이리 급히 거처를 떠나는 것이 의외였지만 결코 막지 않았다.
* * *
한립이 장로회 대전 앞에 도착했을 때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금월선사와 은발 노인이 그를 맞이하러 나왔다.
은발 노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축하인사를 건네며 의식으로 한립의 수행을 살폈다.
‘이럴 수가!’
놀랍게도 그가 느끼는 한립의 수행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물과 같았다. 그도 합체 중기 수사인데 후기 수사와 이렇게 법력 차이가 크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이런 경우 보통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했다.
첫째, 상대가 모종의 비술을 익히거나 강력한 보물을 지녀 수행을 숨기는 경우였다. 둘째로는, 정말로 상대의 법력이 보통 합체기 수사를 월등히 초월했기 때문이다.
은발 노인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머리를 굴렸다. 그의 생각에 첫 번째는 아닌 듯했다.
이렇게 감쪽같이 수행을 감출 수 있으면 합체 중기 때도 비술이나 보물을 사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합체 후기에 이른 것을 천연성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에 더더욱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 말은 바로…….
은발 노인은 자신의 결론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자연히 한립을 대하는 태도도 더 부드러워졌다.
금월선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를 대했지만 속으로 은발 노인 못지않게 놀라고 있었다. 자신은 한립의 실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너무 얕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분께서 보내주신 선물도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급히 저를 보자고 하신 데는 따로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한담을 나누던 한립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 형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니 제가 말하기가 편합니다. 수사께서 뜻밖에 합체 후기에 이르러 이제 본 성 ‘제1수사’라 할 수 있겠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 밖의 성조 화신과 싸우면 승산이 얼마나 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금월선사와 눈을 마주친 은발 노인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마족 성조의 화신이라……. 성조 화신마다 수행과 공법이 천지차이라 확실히 답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성 밖의 성조 화신은 잘 알지 못해 확실하지 않고, 이전에 만났던 화신의 경우라면 어느 정도 대처는 가능할 것입니다.”
한립이 잠시 고민하다 무표정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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