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5화.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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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 복장을 한 청룡상인이 두툼한 하얀 서책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선배님도 아시겠지만 강제적으로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하실 겁니다. 게다가 성 안의 다른 선배님들이 걸리지도 않으십니까?”
빙봉이 청룡상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며칠 전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최근 노부가 새로운 신통을 터득해서 말이야. 자네가 기꺼이 내게 협조하게 만들어주지! 천연성의 다른 수사들이 나를 막아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네. 노부는 어제 정식으로 천연성 장로회에 가담해 장로가 되었네. 이미 죽은 수사와 천연성 장로 중에 그들이 누구를 택할지는 뻔하지 않은가?”
청룡상인은 더 이상 위선을 떨지 않고 냉랭히 말했다. 그 말에 빙봉의 안색이 급변해 돌연 손을 들어 허공을 그었다.
파앗!
허공에 하얀 공간 균열이 나타나자 그녀의 신형이 모호하게 사라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나 소홍 등 다른 수사들이 막을 틈이 없었다.
그들이 놀라 손을 쓰기도 전에 이미 하얀 공간균열은 괴이하게 사라져 종적을 감추었다.
청룡상인은 담담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흔들었다. 은빛 고대 문자가 튀어나가 막 공간균열이 사라진 곳을 공격했다.
쿵!
은색 문자가 폭발하고 파문이 생긴 허공이 깨져나갔다.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빙봉의 가녀린 몸이 휘청거리며 튀어나왔다. 연달아 몇 걸음을 물러서고서야 몸을 가눈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장 같았다.
“노부의 면전에서 달아날 생각일랑 말거라. 내 너를 놓친다면 청룡이 아니라 용청이라 불려도 마땅할 것이야! 얌전히 주변 수사들에게 법력을 봉인 당하겠느냐 아니면 노부가 직접 나서야겠느냐!”
청룡이 오만하게 빙봉을 훑었다. 소홍 등 연허기 수사들이 삽시간에 빙봉을 둘러싸자 꿋꿋하던 빙봉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호오, 용청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십니다. 앞으로는 그리 불러드리지요!”
소홍이 막 손을 쓰려는 찰나 냉랭한 사내의 목소리가 대청 안에 울렸고,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콰콰쾅!
경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결계로 단단히 막혀 있던 대문이 폭발했다. 파편들이 날아가 그 앞을 막고 있던 연허기 수사들을 그대로 벽에 처박았다.
하필 결계로 강철보다 단단한 것으로 막아놓아 그들은 머리에서 피를 뿜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이다.
다른 수사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 문에서 멀찍이 멀어졌다. 청룡상인도 사내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안색이 크게 달라졌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빙봉의 얼굴에는 놀람과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가 서둘러 몸을 돌리자 푸른 장포 청년이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 형!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오는 길에 귀찮은 일이 생겨 조금 늦었으나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한립이 붉은 기운이 도는 빙봉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한 수사께서 놀랍게도 마족 성조의 수중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크게 축하할 일입니다! 다른 수사들과 연회를 열어 그간의 피로를 털어버릴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청룡상인도 합체 중기에 이른 노괴였기에 바로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한립은 그런 청룡상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날이 선 눈초리로 소홍을 포함한 대청 안의 수사들을 휙 둘러보았다.
“아주 잘들 놀고 있구나!”
그 말에 청룡상인을 제외한 수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한립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신분과 수행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청룡상인에게 매수되어 이 일에 가담한 것은 한립이 이미 죽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단코 합체기 수사에게 밉보일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립이 죽기는커녕 살아 돌아와 그들이 벌인 짓을 직접 보았으니 후환이 두려웠다.
“하, 한 선배님! 무사히 귀환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저희 사부님께서도 분명…….”
거한이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 포권을 하며 나섰다.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립이 소매를 펄럭였다.
펑!
거한은 갑자기 가슴 한쪽이 뜨끈해지더니 다른 두 명과 마찬가지로 결계가 쳐져 있는 단단한 벽으로 튕겨 나갔다. 그 역시 벽에 부딪혀 피를 쏟고는 정신을 잃었다.
다른 수사들이 식겁해 서둘러 살피니 거한이 입고 있던 장포가 재로 변하고 그 안에 있던 매끄러운 갑옷이 드러나 있었다. 멀쩡해 보이던 갑옷은 곧 맑은 소리를 내며 깨져 거한의 몸 위로 떨어졌다.
한립의 손짓 한 번에 거한은 중상을 입은 것은 물론 귀한 보물인 갑옷까지 잃고 말았다. 그 모습에 어찌어찌 상황을 모면해 보려던 몇몇 수사들도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청룡상인 역시 얼굴을 실룩였으나 상대가 합체기 수사 여럿과 홀로 싸워 격살한 것을 보았기에 감히 따지지 못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척을 했다.
“한 형, 그리 화내실 것은 없지 않습니까? 방금 부상을 당한 수사는 본 성의 고 장로가 아끼는 제자였는데 나중에 무어라 설명하시려 그러십니까.”
“무슨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내가 과했다 여기면 고 장로가 찾아와 물을 일이고, 지금은 수사가 내게 상황을 설명할 때인 듯싶습니다만.”
한립이 고개를 돌려 거침없이 반박했다.
“큼,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 수사가 이미 목숨을 잃은 줄 알고 빙봉 수사에게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여 제안한 것입니다. 기왕 한 형께서 무사하게 돌아왔으니 노부가 며칠 내로 직접 찾아가 이 일에 대해 사죄하겠습니다.”
청룡상인은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얼굴로 변명을 해댔다. 그는 은근히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보상을 하겠다는 뜻을 표하고 있었다.
“수사의 그 사죄, 저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의천성과 수사를 도와줬는데, 고작 며칠 늦게 돌아왔다고 이런 일을 벌이다니요. 이 일을 이대로 넘어간다면 제가 앞으로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한립이 음산하게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럼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란 것입니까! 설마 지금 본 좌와 싸움이라도 해보겠다는 것이에요?”
버력 화가 치민 청룡상인의 말투도 거칠어졌다.
“하하! 청룡수사의 말씀을 제가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감히 이런 짓을 벌였을 때는 그만한 실력이 되기 때문이겠지요.”
웃음을 터트린 한립이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말을 받았다. 청룡상인은 도발을 당했음에도 그저 난색만 표하고만 있었다.
우웅!
그냥 해본 말이 아닌지 한립의 소매 속에서 당장 푸른 비검들이 빼곡하게 치솟았고 그의 몸에서 금빛이 크게 일어나 엄청난 영기의 압력이 청룡상인을 억눌렀다.
노기를 참을 수 없었던 청룡상인도 옥으로 만든 서책을 펼쳐 무수히 많은 주술문자들이 튀어 오르게 했다.
소홍을 비롯한 연허기 수사들은 두 합체기 수사들이 맞붙을 기세를 보이자 크게 놀랐다. 그러나 앞서 세 사람이 당하는 것을 보았기에 함부로 대청을 뜨지는 못했다.
한립은 오직 청룡상인만을 놀려보며 손을 쓰려던 찰나, 하얀 빛줄기가 대청 밖에서 날아들었다. 하얀 빛줄기는 빙글 돌아 한립과 청룡상인 중간에 내려서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설마 이곳에서 손속을 겨루시려는 것입니까? 백 장로의 거처를 박살 내놓을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제 체면을 봐서라도 중재할 수 있게 잠시 시간을 주시지요.”
금색 가사를 걸친 수사는 인자한 얼굴의 금월선사였다.
“금월선사,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한립은 승려를 보고 마음속의 노기를 억누른 채 인사를 건넸다. 천연성 장로들 중 그와 가장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금월선사의 체면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룡상인은 금월선사의 등장에 내심 한시름을 놓았다. 한립의 실력을 알고 있는데 그라고 싸우고 싶겠는가? 후배들이 우르르 보고 있어 꼬리를 말고 도망칠 수가 없어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예의 바르게 승려를 향해 포권을 했다.
“금월 수사가 마침 제때에 찾아 주셨습니다. 직접 나가 맞이했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빈승, 한 수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오는 길입니다. 다행히 제때에 도착해 큰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군요. 오는 길에 주변의 다른 수사께도 연락했으니 곧 도착하실 것입니다. 마족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본 성의 장로들끼리 분란이 생기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 수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금월선사가 잔잔히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대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맙습니다, 금월수사. 수사가 아니었으면 두원각은 오늘로 폐허가 될 뻔했습니다 그려.”
회색 장포를 입은 새까만 얼굴의 노인이 회색빛에 휩싸여 아무런 기척도 없이 등장했다.
“고 수사.”
한립은 노인을 훑으며 그가 합체 초기의 두원각 각주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 수사! 나중에 시간이 나면 노부의 거처에서 담소라도 나누시지요. 마족 성조의 수중에서 무사히 탈출하시다니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해 죽겠습니다.”
회색 장포 노인이 배시시 웃으며 한립을 바라보았다. 몇 번 만난 것이 전부인데 살가운 태도가 오랜 지기를 만난 사람 같았다.
“과찬이십니다, 고 형. 마족성조가 아니라 성조 화신이었기에 운이 좋았습니다. 정말 마족성조가 본체로 강림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서 몇 마디 대꾸해주었다.
“성조화신에 쫓겨도 저희 같은 합체기 수사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습니다. 한 형의 모습을 보니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됩니다.”
회색 장포 노인이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에 한립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금월선사를 향해 물었다.
“고 수사께서는 오셨고 나머지 한 분은 누구십니까?”
“허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한 수사께서도 잘 아는 분이에요.”
“잘 아는 분이라면…….”
금월선사의 웃음기 어린 대답에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천연성 전체를 통틀어 그가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때 청룡상인이 끼어들어 무어라 말하려는데 문밖에서 은빛이 번득였다. 대청 안으로 곧장 날아든 은색 장포 여인은 은광선자였다.
“한 형, 몇 년 사이에 또 수행이 늘어났군요. 이리 다시 보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 저도 의천성 전투 후 마족 존자의 추격을 당해 달아나다 성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은광 수사께서도 이제 막 성으로 돌아오셨군요. 어쩐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한립도 그녀를 웃는 얼굴로 맞았다.
“자, 두 분도 오셨으니 다 같이 앉아서 이야기 나누시지요!”
금월선사가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아요? 청룡수사와 말입니까? 저는 그런 일에 시간 낭비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 감히 노부에게 이리 수모를 주다니. 다음번 도겁을 위해 아껴둔 원기를 상하는 한이 있더라도 본때를 보여줘야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청룡상인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하자 한립은 주저 없이 온몸에 푸른빛을 일으켰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찌된 일인지 은광 수사는 모르시겠지만 저와 고 수사는 대략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저 최근 마족의 공격이 거세져 미리 중재하지 못했지요. 빈승의 미흡한 일처리로 빙봉 수사가 그간 고생이 많았겠군.”
금월선사가 다급히 그들을 말리다 빙봉을 향해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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