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4화. 뜻밖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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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문 밖에서 두 개의 인영이 날아들었다. 바로 두 제자 해대소와 기령자였다. 그들은 한립을 보자마자 넘치는 기쁨에 앞 다퉈 달려와 대례를 올렸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너무 다행입니다!”
“스승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너희는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더냐?”
그들의 소란에 한립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을 했다.
“스승님께서 오랫동안 돌아오시지 않아 천연성 내에 안 좋은 소문이 돌았습니다. 마족 성조에게 변고를 당하셨다고요. 그런데 사부님의 무탈한 모습을 뵈니 헛소문에 불과했습니다.”
해대소가 들떠 소리쳤고 옆에 있던 기령자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헛소문은 아니었다. 마족 성조 화신을 만나 위험천만하기는 했었지.”
한립은 불쾌한 기억에 잠시 미간을 좁혔다. 그 말에 기령자와 해대소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셨다.
“허나 이미 다 지난 일이니 괜찮다. 게다가 전화위복이 되어 기연을 얻기도 했고! 곧 합체 후기 고비를 넘을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합체 후기에 이르시다니! 감축 드립니다! 이제 천연성 제일 수사라 불리셔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스승님께서 대도를 이루심을 미리 감축드립니다. 스승님의 신통에 후기에 이르시면 성조 화신도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령자와 해대소가 반색하며 기분 좋은 아첨을 했다.
“빙봉 사고는 어찌 지내고 있더냐? 탑에는 머물고 있지 않은 듯한데.”
“그것이 빙봉 사고께서는 교역회에 참석하셨습니다.”
그의 질문에 해대소가 기령자와 눈빛을 교환하고 머뭇거리며 답했다.
“뭔가 숨기는 것이라도 있느냐?”
눈치 빠른 한립이 얼른 말하였다.
“제자가 어찌 감히 스승님을 속이겠습니까. 그저 이 일을 어찌 고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습니다. 빙봉 사고께서도 그리 달갑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나가신 것이라 서요.”
흠칫 놀란 기령자가 서둘러 답했다.
“억지로? 누가 강요라도 한 것이냐?”
“아무래도 봉 사고님의 신분이 외부에 노출 된 듯싶습니다. 그 자가 스승님께서 실종되었다 여기고 끊임없이 들러붙는 통에 사고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해대소가 씩씩 거리며 입을 열었다.
“연허기 수사인 빙봉에게 그럴 수 있다면 평범한 수사는 아닐 것이다. 특히 마겁의 도래로 인요족이 연합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성 안의 장로들이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외부에서 새로 온 자의 짓이냐?”
“과연 스승님이 십니다! 사고께 들으니 의천성의 태상장로였던 자랍니다. 의천성의 안위를 위해 스승님께서 목숨을 걸고 도와주셨는데 은혜를 갚기는커녕 사고께 그런 짓을 벌이다니 배은망덕한 자가 아닙니까.”
기령자도 노기를 드러냈다.
“의천성? 그거 의외로구나. 내가 마족 성조와 일전을 벌이는 동안 의천성의 두 장로가 정예 제자들을 데리고 천연성으로 향했지. 그들 중 하나란 말이냐.”
“바로 그 구성종 청룡상인입니다!”
한립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해대소가 대답했다.
“청룡상인! 그가 너희 사고를 귀찮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웬만한 이유로는 나와의 인연을 알면서 감히 그럴 수 없을 것인데.”
“그건 사고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아 제자들도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청룡이 사고께 쌍수(雙修)를 하자는 뜻을 드러낸 듯합니다.”
“하! 늙은이가 단단히 마음을 먹었구나.”
해대소의 말에 한립이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냉소했다. 빙봉이 어쩌다 청룡상인에게 정체를 들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성종 태상장로는 그녀의 원음을 취해 수행의 고비를 넘길 작정을 한 것이다.
‘이제 와서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
한참동안 얼굴이 굳어 있던 한립이 입을 뗐다.
“너희 빙봉 사고의 태도는 어떠하더냐?”
“당연히 봉 사고께서는 거절 의사를 분명히 하시고 한동안 탑에 숨어 바깥 출입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사고께서도 어쩔 수 없이 몇몇 연회에 참석을 하셔야 했죠. 참석하는 인원이 많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수락했지만요.
청룡상인이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수시로 협박을 해와 사고께 무슨 일이 생길까 저희 사형제도 그 일로 근심이 많았습니다. 청룡상인은 아무래도 천연성 장로회를 고려해 지금까지 드러내 놓고 억압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장로들이 나서줄 지는 모를 일이니까요.”
머리 회전이 빠른 기령자가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럴 지도 모르겠지. 그래서 사고가 참석한 교역회 장소가 어딘지 아느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흉흉한 기세를 드러냈다.
“두원각(兜元閣)이라고 들었습니다! 소규모의 사적인 교역회 같았는데 연허기 수사 이상만 참석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희가 사고를 모시고 함께 갔을 텐데 말입니다.”
해대소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너희의 수행에 따라간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내가 직접 가서 너희 사고를 데려오마.”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른 빛줄기가 긴 꼬리를 남기고 대청을 빠져나갔다.
대청에 둘만 남은 기령자와 해대소가 묘한 얼굴로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에 봉 사고를 그리 자주 찾지 않으셨는데 스승님이 사고를 이렇게 챙기실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으셨던 것은 아니겠지요? 이러다 사고께서 머지않아 사모님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대소가 눈을 깜빡거리며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함부로 왈가왈부 하는 것은 좋지 않네. 허나 내 생각에는 그런 연유 때문인 것 같지는 않군.”
기령자가 진중한 척하며 대 사형 티를 냈다. 하지만 그도 해대소 못지않게 이 일에 관심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것을 본 해대소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두원각은 고계 수사들이 모여 논의하는 장소 중 하나로 그 주인이 천연성의 합체기 장로라 그 누구도 그곳에서 소란을 벌이지 않았다. 그래서 천연성 수사들 사이에서도 두원각은 평판이 좋았다.
평범한 수사들도 사적으로 교역회를 열거나 비교적 비밀을 요하는 사항을 상의할 때 이곳을 빌리고는 했다.
한립은 전속력으로 날아갔고, 드디어 울창한 밀림에 도착했다. 그 가운데에 커다란 누각 한 개와 작은 누각 세 개가 모여 있었다.
큰 누각은 천연성의 석탑들과 비교해도 될 정도였고 나머지 누각들도 웅장한 기운이 느껴졌다.
누각 1층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원영기 수사들은 돌연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드는 것을 알아차렸다. 놀란 병사들 중 몇몇은 서둘러 법기를 꺼내 들고 경계했고 일부는 긴급 신호를 보낼 때 쓰는 부적을 불러내기도 했다.
그때 허공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리고 강대한 압력이 밀려들었다. 병사들은 주변 공기가 단단하게 굳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누각 1층 입구에 어느새 푸른 장포를 걸친 인영이 서 있었다. 병사들은 누각을 등지고 있어 누군지 확인하지 못했으나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한 영기의 압력에 굵은 땀방울만 죽죽 흘렸다.
“아는 수사를 찾으러 왔으니 너희는 이곳에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푸른 인영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을 내린 후 모호하게 사라졌다. 마치 누각의 금제 따위는 애초에 없던 것처럼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푸른 인영이 사라진 순간 병사들을 내리누르던 압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체 누구시기에 두원각에 난입하시는 것입니까? 이곳의 주인이 누구신지 모르시는 것입니까?”
병사 하나가 자유를 되찾자 크게 소리쳤다. 다른 병사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색이 좋지 못했다.
“쉿!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좋을 겁니다. 괜히 나섰다가는 피를 볼지도 모르니까요.”
남색 머리카락을 지닌 노인이 다급히 동료를 만류했다.
“수사,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입한 선배님의 정체를 아시는 것입니까?”
그 말에 또 다른 중년 사내가 물었다.
“수사들은 본 각에서 근무한지 얼마 안 되어 모르겠지만, 둔광으로 보아 제가 예전에 멀리서 뵌 적이 있는 한 선배님 같습니다. 그분은 합체 중기의 수사라 이곳의 주인보다도 수행이 높지요. 그런 선배님을 막아선다면 죽은 목숨 아니겠습니까.”
노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설명했다.
“하, 합체 중기 수사요!”
병사들은 기함했고 특히 방금 큰 소리로 외친 어린 병사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합체기 수사가 그들에게 손을 쓴다면 개미 한 마리를 눌러 죽이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만일 상대가 이 일을 기억했다가 앙갚음이라도 한다면…….
어린 병사는 생각하면 할수록 몸이 떨려왔다.
“한 씨 성을 쓰시고 합체 중기의 선배님이시라면 설마!”
중년 사내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눈을 부릅떴다.
“허허, 이제야 기억해 내셨습니까. 맞습니다, 바로 2년 전 목숨을 잃으셨다는 소문이 떠돌던 바로 그 한 선배님입니다. 오늘 이곳에 나타나신 것을 보면 전부 유언비어였던 게지요.”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방금 전 안으로 들어간 선배님의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좋은 일로 온 것 같지 않던데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간 지켜온 본 각의 명성이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한 선배님께서 이곳에서 무엇을 하시든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두원각이 무너진다 해도 이 일로 각주께서 저희를 나무라시겠습니까?”
어린 병사의 말에 노인이 미소 짓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말에 다른 병사들도 흩어져 각자의 일을 보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누각 안 금제로 겹겹이 봉쇄된 대청.
8명의 수사들이 하얀 장포를 입은 여인을 둘러싸고 무어라 설득하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지닌 백포 여인은 짙은 눈썹에 오뚝한 코, 반짝이는 눈을 지녀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표정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바로 교역회에 참석한다며 거처를 나선 빙봉이었다.
이곳에 오니 교역회 같은 것은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급히 떠나려 하자 금제가 발동되어 층 전체가 봉쇄되고 말았다.
그 후로 그곳에 모인 이들이 돌아가며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전부 청룡에게 매수된 것이다.
“봉 수사, 어찌 보면 빙봉의 몸을 한 수사와 우리 흑봉족은 인연이 깊다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제가 수사와 청룡 선배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피하기만 하다가 정말 선배님의 심기가 상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러지 말고 지금 수락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청룡 선배님이 한 가와 비교해 부족함이 있는 분도 아니고요.”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은 약간 사나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바로 흑봉족 소홍이었다. 그간 흑봉요왕의 명을 받아 폐관해오던 그녀는 얼마 전 수행이 크게 늘어 천연성에 나타났다.
마족들이 천연성을 공격한 이래 성 안의 요족과 인족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져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다. 그래서 그녀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일반 수사들까지 천연성 곳곳을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고계 수사들만이 서로 왕래할 뿐이었다. 당연히 빙봉을 둘러싸고 설득하는 인족과 요족 수사들도 전부 연허기 이상이었다.
그들은 합체기 수사인 청룡상인과 쌍수를 하는 것은 수많은 수사들이 원해도 얻을 수 없는 기회라며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빙봉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 냉랭한 얼굴로 대꾸하지 않았다.
“빙봉 수사, 내 동생같이 생각해 언니로서 조언한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확실히 답을 주시지요. 청룡 선배님과의 쌍수를 받아들일 것입니까?”
소홍이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저어 다른 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물었다.
“어떤 감언이설을 늘어놓으셔도 저는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상하군요. 요족의 일원인 소 수사께서 인족과 요족의 쌍수를 금하는 일족의 규칙을 모르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청룡상인을 도와 저를 위협한다면 흑봉요왕께서 죄를 묻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빙봉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소홍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고 곧 피식 웃어버렸다.
“그건 수사께서 몰라 하는 말씀입니다. 청룡 선배님의 몸에는 저희 요족의 피도 흐르고 있답니다! 반요(半妖) 출신으로 스스로 인족에 남기를 택하고 구성종 대장로가 되신 것이지요.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인족과 요족이 똘똘 뭉쳐 마족에 대항해야 할 때입니다. 봉 수사의 선택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정 그렇게 나온다면 이제 이 일은 제 손에서 떠난 것이나 다름없군요.”
소홍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마쳤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빙봉이 흠칫 놀라 안색이 창백해진 순간, 소홍이 몸을 돌려 대청의 문 한쪽을 돌아보았다.
“청룡 선배님, 저는 이미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무래도 빙봉 수사는 선배님께서 직접 옳은 길로 이끌어 주셔야 할 듯싶습니다.”
“노부도 이런 방법을 쓰기는 원치 않았네만 잘못된 길을 고집한다면 그리해야겠지.”
사내의 목소리가 울리고 은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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