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3화. 입성(入城)
*
한립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방의 산맥을 발견했다.
‘흠?’
그는 산맥으로 진입하려다 푸른 둔광을 거두고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살피자 수십 개의 둔광들이 허둥지둥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검은 마운(魔雲)이 몰려들었다. 마운 안에 희미하게 흉악하게 생긴 마수들과 병기를 든 마족 병사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수십 개의 둔광 가장 뒤쪽에서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 두 개의 노란색 비검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마운을 가르는 중이었다. 비검이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거검 형상이 나타나 마운을 공격했다. 평범한 연허기 수사 이상의 능력이었다.
그러나 검이 움직일 때마다 노인의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져갔다.
노인이 입에서 피를 뿜어 흡수시키자 두 자루의 비검이 더욱 강력한 빛을 머금었다. 몇 번의 공격은 일부 마수는 물론 병사들도 피하지 못해 수백 명의 마족 병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런 행동은 고계 마족을 자극했고 괴성과 함께 새까만 삼지창이 튀어나와 거검 형상과 충돌했다.
콰쾅!
큰 충돌음이 귀청을 울리고 검은빛과 검빛이 교전했다. 결국 거검 형상은 다시 비검으로 돌아가 튕겨나갔는데 빛이 암담해져 있었다.
윙윙거리며 마운 쪽으로 돌아간 갈퀴들도 손상을 입은 듯했다.
“감히 내 보물을 훼손해? 너는 본 좌가 직접 잡아 끔찍하게 죽여주겠다!”
마운 속 고계 마족이 아끼던 삼지창이 망가지자 버럭 화를 냈다. 갑자기 마운이 두 배로 부풀어 노인을 덮칠 듯 밀려들었다.
‘이런!’
하얀 수염 노인은 안색이 급변해 비검들이 원기가 상한 것을 안타까워할 새도 없이 검과 합일해 노란 빛줄기가 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노인이 온힘을 다해 마운을 막았기에 제자들은 벌써 백여 리 밖에서 날아가고 있었다. 바짝 쫓아오는 마운을 피해 도망친 하얀 수염 노인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두 사제들을 데리고 협곡의 전송진을 찾아 갔을 때 기다리고 있던 마족의 매복을 만나 여덟 명의 동급 수사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두 사제들이 원영을 폭발해 다른 고계 마족에게 중상을 입히지 않았다면 그도 그 자리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머지 마족 병사들의 추격에 화리종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화리종 최고의 보물인 천간쌍검(天干雙劍)을 이용해 겉으로는 위풍당당하게 싸우는 척 했지만 그의 법력은 대부분 고갈된 상태였다.
그가 시간을 끌어 종문의 대부분 제자들이 무사히 달아났지만 마족 병사들에게 따라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게다가 어차피 인근을 마족들이 점령하고 있기에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는 한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인족 수사들은 산맥의 외곽에 이르렀다. 수행이 낮은 열댓 명은 이미 한참 뒤쳐져 마운에 따라 잡히기 직전이었다.
바로 등 뒤에서 마수들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와 마족 병사들의 함성에 젊은 제자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것을 본 하얀 수염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겠구나.’
앞서가던 노인의 둔광이 허공을 선회해 엄청난 기세로 마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운 속에서 고계 마족의 웃음소리가 둘려오고 네 명의 고계 마족들이 튀어나왔다.
하얀 수염 노인이 마운 상공에 이르자 네 명의 마족들이 동시에 보물을 투척했다. 새까만 삼지창과 두 개의 백골검, 남색 거검과 산만한 노란 벽돌이 번득하며 이동해 노인을 포위했다.
네 마족들은 마공을 운용해 다섯 개의 보물로 공격을 퍼부었다. 노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남은 법력을 일으켜 두 개의 비검에 실었다.
우웅!
다시 두 개의 거검 형상이 나타나 소리 없이 노인을 감싸 보호했다. 비검은 상당한 보물이었지만 네 명의 마족이 힘을 합친 일격은 그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거검이 만든 보호막이 갈라지고 노인을 향해 공격이 쏟아졌다.
노인은 얼굴에 핏기가 가셔 입을 벌려 간신히 푸른 기운을 방출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발악은 해보아야 했다.
바로 그때, 차분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연허기 마물들이 감히 내 앞에서 살인을 하려 하느냐!”
노인과 불과 한 장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흐릿한 인영이 나타나 대충 손을 휘둘렀다. 놀랍게도 떨어져 내리던 다섯 보물들이 부들부들 몸을 떨고 엄청난 힘에 쾅! 하고 튕겨 나갔다.
그 순간 네 마족들은 보물들과의 연계가 끊겼다.
…….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인영은 바로 한립이었다.
휘릭!
고계 마족들이 보물을 다시 통제하기 전에 노란 빛이 나타나 그들을 빙글 돌고 날아올랐다. 금빛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노란 짐승이었다. 표범을 닮은 짐승의 머리에는 비취색 뿔이 작게 솟아 있었다.
잠시 후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네 명의 마족이 제 자리에서 떠서 기묘한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후두둑!
다음 순간 네 마족의 몸에 가느다란 핏빛 선이 생기고 조각조각 살점이 잘려 나가 핏덩이로 떨어져 내렸다.
고계 마족들의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저계 마수들은 갑자기 미쳐 날뛰며 서로를 물어뜯었고 마족 병사들은 기겁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기왕 직접 나섰는데 마족 병사들이 달아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마수들은 네게 맡기마. 난 마족들을 처리해야겠다.”
그의 전음을 들은 노란 짐승이 털이 복슬복슬한 머리로 끄덕거리고 펄쩍 뛰어올랐다. 짐승의 신형이 늘어나 열댓 마리의 금빛 표범 허상을 만들어냈다.
한립이 그 자리에서 손을 쥐자 금빛 뇌전 덩이가 떠올라 강렬한 빛을 만들어냈다.
콰르릉!
콰콰쾅!
그가 손바닥을 활짝 펼치자 금빛이 맹렬히 부풀어 오르다 터져 수많은 뇌전 줄기로 뻗어나갔다. 이에 저계 마족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마기와 상극인 벽사신뢰에 닿을 때마다 마족들의 갑옷은 물론 육신까지 재로 변해 흩어졌다. 금빛 뇌전들이 새까만 마운과 마풍을 휩쓸었다.
이때 표린수가 변한 수십 개의 허상들도 저계 마수들을 살점 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순식간에 마족 추격병들이 사라졌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천연성의 장로신지요?”
노인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한립에게 예를 취했다.
“대충 그렇다고 봐야겠지. 너희는 어찌 숨어 있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이냐. 천연성 주변이 진작 마족 소굴이 된 것을 모르는 것이야.”
한립은 무표정하게 노인을 바라보았다.
“선배님께 아룁니다! 저희는 화리종 수사들로 은신해 있던 장소가 마족들에게 발각되어 어쩔 수 없이 천연성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전송진을 이용하려다 마족들의 매복을 만나 거의 몰살을 당할 뻔했고요.”
노인이 숨김없이 답했다.
“전송진이 이미 마족의 손에 떨어졌단 말이냐. 내가 처리한 이들 외에 다른 고계 마족들이 인근에 있느냐?”
“전송진에 아직 고계 마족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상을 당해 추격에 합류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어서 서둘러야겠구나. 소식이 전해지면 전송진을 망가트리고 달아날 수도 있겠어.”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노인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때 살아남은 화리종 제자들이 노인 곁에 도착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립은 노란 짐승을 향해 손짓하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협곡으로 쏘아져 나갔다. 표린수도 허공을 박차고 눈부신 금빛이 되어 그 뒤를 쫓았다.
순식간에 그들은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장문 사형, 이제 저희는 어찌 해야 할까요?”
노파가 얼른 하얀 수염 노인에게 물었다.
“물을 것이 뭐가 있느냐. 당연히 저 선배님을 따라가야지! 선배님께서 길을 터주시면 우리는 안전하게 천연성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모두 전속력으로 따라간다!”
노인의 명에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출발했다. 그동안 불안에 떨며 이동하는 것과 달리 제자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했다.
얼마 후 협곡 주변에 도착한 그들은 커다란 폭음을 들었다.
협곡 위로 푸른 검기들이 치솟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참혹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머리에 뿔이 난 흐릿한 검은 그림자가 허겁지겁 그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쳐 오는 것이 보였다.
노인과 노파는 시선을 마주치고 입 꼬리를 올렸다.
우웅!
노인은 등에서 노란 쌍검을 뽑아 들었고, 노파는 입에서 은색의 연검을 방출했다. 궁지에 몰린 마족의 원영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보물을 발동하기 전 협곡에서 커다란 푸른 검기가 나타나 마풍 속의 원영을 갈랐다. 섬뜩한 빛이 번쩍인 후 원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푸른빛을 거두고 줄어든 비검이 쏜살같이 협곡 안으로 되돌아갔다.
“너희도 천연성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언제 마족 지원병이 도착할지 알 수 없다.”
한립의 목소리가 유유히 협곡에서 전해졌다.
“어서! 다들 서둘러라!”
그 말에 하얀 수염 노인이 힘차게 소리치고 튀어나갔다. 수행이 낮은 제자들도 젖 먹던 힘까지 짜내 협곡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천연성 안, 금제로 겹겹이 둘러싸인 전송대전. 원영기 병사 두 명이 문가에 서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우웅!
한 줄로 나란히 펼쳐져 있는 열댓 개의 전송진 중 하나가 강렬하게 빛났다.
“누군가 전송되어 옵니다! 당장 모든 금제를 발동하고 수비 대장께 알리세요!”
원영기 수사의 목소리에 또 다른 병사가 손바닥만 한 남색 진법 원반을 꺼내 내리쳤다.
펑!
진법 원반에서 오색 기운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전송대전 안에 각종 파동이 나타나 금은색 주술문자들이 빼곡한 빛의 장막으로 변했고 백여 명의 병사들이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진을 쳤다.
진동하던 진송진의 하얀 빛 속에서 푸른 인영이 나타났다. 한립은 심각한 얼굴로 대기 중인 전각 병사들을 보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겨우 2, 3년 들리지 않았다고 벌써 나를 몰라보는 것이더냐.”
“한 선배님, 돌아오셨군요! 정말 잘 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장로들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선배님에 관한 소식이 있으면 바로 고하라는 명이 있어서요.”
금위 중 하나가 한립을 알아보고 얼른 나서 공손히 예를 올렸다.
“장로들께서 나를 염려하고 있었구나. 알겠다. 곧 다른 이들도 전송되어 올 것이니 안내해 주거라.”
“예! 한 선배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금위는 서둘러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들었다.
* * *
한립이 성큼성큼 문밖으로 걸어 나갈 때 전송진이 다시 하얀빛을 머금고 노인과 노파가 나타났다. 병사들은 금위의 통솔 하에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대전을 나서자마자 날아올라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의식을 퍼트려 주위를 살피니 그가 떠날 때보다도 훨씬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길 곳곳을 순찰하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평범한 산수나 수사들이 성 안을 돌아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순찰병들의 수도 배로 늘었고 간혹 지나는 수사들을 붙잡아 간단한 신분 검사를 했다.
천연성 전체에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한립이 발산하는 강대한 기운을 감지한 순찰병들도 그의 앞을 막지는 못했다.
잠시 후 한립은 눈에 익은 높은 석탑을 발견하고 1층의 대청으로 날아들었다. 대청 안을 둘러보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모든 것이 그가 떠나기 전 그대로였다. 대청 안은 누가 꾸준히 청소를 하는지 먼지 하나 없었다. 제자들이 신경을 많이 쓴 것이 틀림없었다.
한립이 대청에 놓인 의자에 앉아 소매를 펄럭였다. 그러자 두 장의 부적이 날아올라 불덩이로 변하고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 후 그는 눈을 감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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