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9화.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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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두 눈을 감고 의식으로 수면 아래를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
“아주 멀리 휩쓸려 가버렸구나.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던져두면 쉽게 발견되지 않겠지.”
한립은 하얀 목함을 꺼내 잠시 바라보다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이전과 마찬가지로 목함은 남색 얼음으로 변해 가라앉았다.
한립은 말없이 빙하를 내려다보았다. 반 시진이 흐르고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목함은 빙하를 따라 아주 멀리까지 떠내려가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진마쇄가 아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그 안에 갇혀있는 두 마두를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처리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제 그들이 진마쇄를 탈출하든 말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할 일을 마친 그는 곧바로 마풍을 일으켜 협곡 위로 솟구쳤다.
그 시각, 빙하 깊은 곳을 떠다니는 목함 안.
동굴로 보이는 밀실 안에서 차기공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공법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석전 안에서는 풍사가 역시 수련에 힘을 쏟았다.
그들은 목함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까맣게 몰랐다. 이로써 진마쇄를 탈출해 한립이 지닌 혼돈이기를 빼앗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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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로 돌아가는 길은 더없이 순조로웠다. 전력으로 날아 하루 만에 사막으로 돌아가 다시 소형 접점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고공에 떠 있는 출구는 물론이고 그곳을 지키는 마족 병사들도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마기를 흩어버리고 빙글 돌아 천봉으로 변해 날개를 펄럭였다. 희미한 광채로 변한 천봉이 접점으로 날아들었다.
공간접점 내부를 지나는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오색 광채가 영계에 뚫린 접점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접점을 빠져나오자마자 의식으로 주변을 훑고는 냉소했다. 그가 천봉의 광채를 흩어버리고 푸른 기운에 휩싸인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자마자 인근에서 ‘공격!’하는 고함 소리가 울렸다.
쉬쉬쉬쉭!
사방팔방에서 검은 빛들이 쏟아져 내리고 열댓 마리의 쌍두 마조(魔鳥)가 덤벼들었다. 그리고 아래쪽에서는 푸른 전함 두 대가 떠올라 검은 빛기둥을 쏘아댔다.
매복해 있던 수백 명의 마족 병사들이 그가 나타난 순간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그러나 한립은 이미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회색 기운을 날려 수정 보호막을 치고 달려드는 마조들을 향해 다른 쪽 손을 튕겼다.
피피핑!
열댓 개의 푸른 검기들이 그의 손끝을 빠져나와 마조들을 두 동강냈다. 피가 비처럼 쏟아지고 마조들의 시체가 비처럼 떨어져 내리자 고계 마족들이 대경실색했다.
쌍두 마조는 강철과 같은 몸을 지녀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데 일격에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당황하게 한 것은 수백 개의 검은 빛과 전함이 쌓아올린 빛기둥이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헉, 합체기 노괴다! 달아나!”
고계 마족 중 한 명이 다급히 소리쳤다. 고계 마족들은 목족인들을 격퇴하던 네 명의 화신급 통령과 연허기 쌍각(雙角) 마족이었다.
목족인을 물리치고 돌아온 그들은 접점을 지키던 병사들이 사라지고 없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곧바로 주변의 마족 진영으로 소식을 보내 정예병을 꾸려 접점을 지키기 시작했다.
접점에 문제가 생기면 그들 모두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하게 한립이 마계로 들어간 지 겨우 며칠 만에 돌아와 그들의 포위에 걸려든 것이다.
고계 마족들은 희색을 드러냈지만 쌍각 마족은 단번에 한립의 수행을 알아보고 혼비백산했다.
고계 마족들은 가슴이 철렁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기를 일으켜 달아나려했다. 한립에게 들킬까봐 수하들에게 퇴각하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강대한 의식으로 진작 매복을 알고 있던 한립은 고계 마족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와 도망가려는 것이냐?”
한립이 새하얀 손으로 허공을 쥐자 마족들 머리 위로 파동이 일고 오색 거대 손이 나타났다. 얼굴에 핏기가 가신 마족들은 재빨리 튀어나가며 각종 보물을 방출해 거대 손을 공격했다.
강력한 보물로 거대 손을 막을 수 있다면 살아 도망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펑!
그러나 보물이 거대 손에 닿자마자 폭발해 오색 한염으로 변해버렸다. 오색 한염에 말려든 마족들은 곧바로 얼음덩어리로 변해버렸다.
그제야 사방에서 공격하던 마족 병사들이 상황을 알아채고 혼란에 빠졌다. 한립은 재빨리 소매 속에서 푸른 비검들을 뿜었다. 수백 개의 검빛이 여기저기로 뻗어나갔다.
* * *
일다경 후, 마족 요새에는 마족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며칠 후 목족 정탐꾼들이 그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정찰을 마치고 이것이 마족의 함정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고 신속히 보고를 올렸다.
이레 후, 마족 요새는 목족인들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리고 여러 현묘한 진법을 설치해 그곳을 봉인하려고 애를 썼다.
그때 한립은 묵묵히 체내의 혼돈이기를 연화시키며 인족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름난 천지영물답게 극히 소량을 연화시켰는데도 법력이 크게 늘고 수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인족으로 돌아갈 쯤에는 연화를 마쳐 법력이 합체 중기 최고봉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합체 후기를 준비해야 했고, 이번 수련의 고비를 넘기 위해서는 빙봉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만황세계에서 고비를 넘기는 것이 좋았겠지만…….’
어쨌든 지금 인족은 마족의 침략으로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 * *
천연성 성벽 위, 수사들이 겹겹이 늘어서 필사적으로 마족 대군을 막고 있었다. 격렬하기 짝이 없는 대규모 전투였다.
인족과 멀리 떨어진 요족의 땅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최근 마족대군은 공격이 아주 거세져 인족과 요족을 상대로 물불 가리지 않고 맹공을 가했다.
이에 인요 양족에서 막대한 피해가 생겼고, 수많은 중저계 수사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화신기 이상의 고계 수사들 중에서도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 마겁을 보면 마족대군은 초반 몇 년 동안 대대적으로 공격을 가하다가 이후에는 공세를 늦추고는 했다. 거대 거점을 지키는 수사들은 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고된 나날을 버티고 있었다.
그때 인요족 경계 지역의 섬에서 열댓 명의 인요족 합체기 수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마들이 정말 이번에는 우리 영토를 점령하고 대군을 주둔시키려 한다는 소리군요.”
백발노인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뿐이 아닙니다. 마계로 보낸 밀정들이 알아낸 소식에 따르면 머지않아 영계로 넘어 오기 위해 수많은 저계 고마들이 움직이고 있답니다.”
붉은 깃털을 지닌 중년 사내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 수가 어느 정도랍니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0억 이상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0억!”
깃털 사내의 말에 대부분 수사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보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순종 고마는 마계에서도 그리 많지 않은데 10억 명이면 전체의 10분의 1은 될 것입니다. 마족 성조들이 그렇게까지 할까요?”
가죽 장포를 입은 노부인이 나서서 물었다.
“착오일 리 없습니다. 고마들이 거주하는 마계의 성과 마을 중 상당수가 이미 텅 비었다고 하니까요. 게다가 최소한 10억이라는 것이지 그 이상이 넘어올 확률이 큽니다.”
깃털 사내가 자신 있게 답했다.
“마계로 보낸 밀정들이 겉으로 나타난 움직임만 확인하고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마족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면 그에 맞춰서 대책을 세울 수 있을 텐데요.”
백발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마족들의 목적은 오직 성조들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마족 존자들은 그저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서야 위험을 무릅쓰고 생포한 마족 존자에게 추혼술을 하고도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
가죽 장포 노부인도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들의 목적이 뭐든 우리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요. 준비해 놓은 작전을 동시에 진행할 때입니다. 그 중 두 가지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강림해 있는 마족대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마족의 3대 시조(始祖)가 다른 성조들과 함께 강림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 몇 종족의 대승기 수사들이 힘을 합쳐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마족 3대 시조들은 전부 수십만 년 이상 살아온 괴물들인데다 비승해 진마급 수사가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자들이 아닙니까.”
깃털 사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화들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마족 3대 시조면 도겁기의 상고 노마들이 아닙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영계 전체를 뒤져도 그들을 상대할 자는 몇 되지 않을 겁니다. 진령을 모시는 대형 종족이면 몰라도 영계에서 약소한 종족인 우리들이 어쩌겠습니까. 3대 시조들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아무리 마족대군을 격퇴시켜도 전쟁의 승패는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노부인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주변 수사들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모두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막간리 대인께서 성도를 떠나기 전에 다른 종족의 대승기 수사들을 찾아 이 일에 대해 상의해 볼 거라 했으니까요. 시간이 꽤 지났으니 지금쯤은 대책을 찾으셨을 겁니다.”
이제까지 말이 없던 하얀 피부의 사내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순 수사, 저희는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듣습니다.”
깃털 사내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다른 이들도 처음 듣는 이야기 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일은 저와 낙 수사만 알고 있습니다. 막 선배님께서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유의하라 신신당부 하셨기에 지금까지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고요. 이제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얀 피부의 사내는 설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낙 형, 이 말이 사실입니까?”
깃털 사내가 입을 열기 전에 노부인이 먼저 백발노인을 향해 물었다.
“허허, 순 수사의 말씀 대로입니다. 막 선배님께서 저희 둘에게만 일러주시고 출발하셨지요.”
“정말 다행입니다! 막 선배님께서 진작 대책을 마려하고 계셨군요!”
“이번 마겁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잘 되었습니다!”
대전 안 수사들이 한결 마음이 놓이는지 떠들어댔다.
“자자, 진정하시지요.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하기 전에 알려드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얼마 전 황량석령을 잡으러 떠났던 흑우 수사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성황성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파견 나왔던 천선 수사의 말에 따르면 황량석령을 잡는데 성공하고 헤어졌다고 하더군요.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흑우 수사의 본명패가 부서졌습니다.”
합체기 수사의 죽음에 수사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합체 중기의 수행을 지니고 만만치 않은 신통을 지니고 있던 흑우상인이 아닙니까. 어찌 소리 소문도 없이 죽는단 말입니까. 무언가 숨겨진 일이 있는 것 아닙니까?”
하얀 사내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건 아닐 겁니다. 황량석령이 아무리 희귀해도 평범한 수사에게는 별 쓸모가 없습니다. 게다가 천선 수사의 말을 증명할 증인도 있다고 하고요. 그들을 도와 석령을 잡은 또 다른 합체기 수사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석령을 잡지도 못했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깃털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증인이요? 그게 누구입니까. 설마 천선 수사와 같이 성황성 출신은 아니겠지요?”
노부인도 의심을 드러냈다.
“아닙니다. 아마 대부분 들어보셨을 텐데 몇 백 년 전에 합체기에 이른 한립 수사입니다.”
“한립이란 이름은 들어 보았습니다! 10만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인족의 천재라 겨우 몇 백 년 만에 화신기에서 합체 초기에 올랐다지요.”
깃털 사내의 말에 노부인이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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