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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57화 (914/2,000)

1157화. 목족(木族)

*

같은 시각 진마쇄 밖.

한립은 의식 화신을 회수하고 원영을 육신으로 돌려놓았다. 그는 바로 하얀 옥간을 불러냈다. 옥간을 이마에 대고 강력한 의식을 불어넣자 구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여 개의 글자가 모두 현묘하고 심오한 뜻을 품고 있었다. 부분 구결을 연구하는 동안 한립의 표정이 수시로 바뀌었다. 겨우 구결 일부를 확인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3일 째 되는 날 아침,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의식을 거두고 옥간을 재로 만들었다. 옥간 속 구결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달달 외운 후였다.

“법결은 진짜 같은데……. 하긴 손을 쓰려 해도 처음부터 수작을 부리지는 않을 테지!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연화술을 얻는 즉시 진마쇄를 마계로 던져 버려야 한다. 농 가 노괴를 기다려 마계로 진입하면 너무 늦고 따로 두 세계의 접점을 찾아 이걸 던져 버려야겠어.”

한립은 불안한 예감에 원래 계획을 수정했다.

* * *

한립이 만황지역에서 차기공과 풍사에게 연화술 구결을 조금씩 얻어내고 있을 때, 천연성은 수천만 명의 마족 대군에 물샐틈없이 포위당하고 말았다.

천연성의 거대 성벽을 중심으로 곳곳에 마족 요새들이 빼곡하게 솟아 있었다. 마기 구름으로 둘러싸인 요새들은 갑옷을 입은 정예 병사들로 가득했다.

거대한 탑 형태의 보물과 웅장한 전차와 전함들도 마족대군 상공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그리고 마족 요새 사이에는 크고 작은 돌산 이나 흙더미가 빈틈없이 쌓여 있었고 무수히 많은 마수들이 그곳을 지켰다.

마족 요새에서 백여 명의 고계 마족들과 혈포 소년이 천연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계 마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상의했다.

“공격을 개시한다! 몇 년 후에는 정식으로 천연성에 입성할 수 있도록 하라!”

“온 힘을 다해 성조 대인을 보좌하겠습니다!”

혈포 소년의 명에 마족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붉은 갑옷을 입은 병사가 들고 있던 물건을 높이 집어던졌다.

퍼퍼펑!

은빛이 하늘 높이 치솟아 폭발했고 은색 문자가 허공에 떠올라 눈부신 빛을 발했다. 그 모습에 마족대군들이 거세게 요동쳤다.

쿠릉!

거대 빛의 진법들이 허공에 나타나 커다란 검은 빛구슬을 만들어 천연성으로 몰려갔다. 거대 빛구슬이 지나는 곳마다 허공이 왜곡되었다. 마기 속의 마탑과 전함들도 동시에 출격해 굵은 빛기둥들을 비처럼 쏟아 부었다.

콰르릉!

그때 천연성에서도 굉음이 일고 거대 빛의 진법이 층층이 성벽 위로 떠올랐다. 오색 기운 속에서 불구슬, 바람의 칼날, 얼음송곳 등 각양각색의 법술 공격이 튀어나와 파도처럼 마족을 향해 밀려들었다.

천연성 보호막 앞에서 인족과 마족의 공격이 충돌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폭음이 터졌다. 폭발로 인한 강렬한 빛에 어두컴컴하던 하늘이 다 밝아질 정도였다.

하늘과 땅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마수들이 천연성으로 달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전함과 전차들도 서서히 천연성으로 접근했다. 드디어 마족 대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 * *

어두침침한 밀림 속, 새까만 갑옷을 입은 여인이 거목 아래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고, 그 옆을 남색 궁장 차림의 여인이 걱정스런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

한참 후 흑갑 여인은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떴다.

“괜찮아요, 언니? 부상은 호전이 된 거예요?”

원살이 반색하며 서둘러 물었다.

“낙일진염(落日眞焰)이 그렇게 쉽게 몰아낼 수 있는 것이었으면 성계에서 명성이 자자할 리도 없었겠지. 단약을 복용해 억눌러 놓기는 했으나 돌아가는 대로 백년 간 요양하지 않으면 완전히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보화도 아직 옛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더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겨우 화신의 몸인 나도 상대의 낙일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겠지.”

“그건 그래요. 하지만 본체가 직접 강림하지 않는 한 화신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잖아요.”

“일대일로 싸우면 그렇겠지만, 우리에게는 대군을 통솔할 권리가 있다. 성계 성조가 아닌 보화와 일대일로 싸울 필요가 없어. 돌아가는 대로 원살 너는 절대 진영을 홀로 떠나지 말거라.”

원살을 향해 육극이 당부했다.

“알겠어요. 하지만 보화의 성격상 일부로 우리를 찾아와 성가시게 굴 것 같지는 않은데요? 우리의 화신을 죽여 봤자 자신의 처지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요. 성제 기간에 함부로 나돌아 다니는 데는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거예요.”

원살이 곰곰이 생각해보다 신중하게 의견을 밝혔다.

“다른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몸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일 게다.”

흑갑 여인이 냉소했다.

“언니 말이 일리가 있네요. 보화는 성계에서도 꽤 알아주는 점술사였으니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곳에 나타났을 수도 있겠어요. 흠, 일단 이 일은 나중에 자세히 상의하고 인족으로 돌아가요. 언니의 또 다른 화신과 합류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

“다른 녀석들의 눈을 피해 영계로 온 것은 숨어 있기 위해서가 아니다. 성조들의 협의에 따르면 누구든 인족의 영토를 빼앗으며 이후 성족이 영계에서 거점을 마련할 때 그 땅의 절반을 가질 수 있다. 그런 막대한 이권을 놓고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느냐.”

“그럼 언니의 뜻은…….”

“돌아가는 대로 쇄룡단(鎖龍丹)을 복용해 화신의 잠재된 힘을 격발할 것이다. 8. 9할의 법력을 회복하게 되면 남모르게 손을 써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쇄룡단! 그러면 백년 후에는 반드시 천 년간 폐관 수련에 들어가야 하잖아요.”

육극의 말에 원살은 깜짝 놀랐다.

“화신이 천 년간 폐관 수련을 해야 한다 해도 이곳에서 얻게 될 이권과는 비교할 수 없다. 물론 화신이 목숨을 잃지 않게 원살 네 보살핌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제가 이번에 하계로 내려온 건 언니를 돕기 위해서이니 그건 걱정 말아요. 그저 보화를 마주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옛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가 않네요.”

원살이 쓴웃음을 지었다.

“보화가 우리와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인데 옛정이랄 것이 뭐가 있느냐. 승자독식(勝者獨食)은 당연한 원칙이다! 당시 실패한 것이 우리였다면 더 처량한 꼴을 하고 있었겠지.”

흑갑 여인이 코웃음을 치며 냉랭히 말했다.

“그랬을 지도요. 그런데 보화는 성조의 3대 시조(始祖)라 완전히 영향력을 지우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적잖은 이들이 티는 안 내도 아직도 충성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시조 중 한 명인데 당연히 평범한 성조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아무리 영향력이 커도 십만 년, 백만 년이 지나서도 그녀를 기억하고 충성할 자들이 있겠느냐. 물론 그렇다고 해도 보화가 영계를 배회하고 다니게 둘 수는 없으니 본체가 강림하는 대로 병력을 꾸려 깨끗이 처리하자꾸나. 절대 우리 일을 방해하게 둘 수는 없어.”

“언니가 그렇게 하겠다면 따를게요. 지금은 부상이 심하니 얼른 돌아가요. 출발하기 전 인족의 천령성 금제를 거의 다 뚫어 놓았으니, 돌아갈 쯤에는 그곳을 점령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원살이 고개를 끄덕이며 즐겁게 말했다.

“또 다른 화신이 통솔하는 대군은 내가 선별한 정예 병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계에 강림한 대군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테니 겨우 인족의 주요 성 하나가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함락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야.”

“하긴 그래요! 그렇지 않았으면 언니의 화신이 저를 보내 인족이 다른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지는 않았겠죠. 하아, 갑작스런 일을 당해 한 가 녀석을 놓친 것이 아쉬울 뿐이에요.”

원살은 한립을 떠올리고 이를 갈았다. 그 모습에 흑갑 여인이 더는 대꾸하지 않고 입을 벌려 붉은 비차를 불러냈다. 작고 정교하던 비차가 그녀의 법결을 맞고 부풀어 올랐다.

원살과 육극은 주저 없이 비차에 올라 붉은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 * *

다섯 달 후, 인족의 3대 황성 중 천령성이 마족대군에게 잠식당했다. 전투 중 성 내의 모든 수도자들이 전사했고 합체기 장로들도 고계 마족들의 포위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천령성 고계 수사들의 반격도 처절해서 자폭함으로써 동일한 수의 동급 마존들과 수천 명의 고계 마족들의 숨통도 끊어졌다.

오직 새로 부임한 영황만이 불가사의한 신통을 발휘해 마족대군을 뚫고 멀리 달아났다. 전투가 끝나고도 아무도 영황의 소식을 들은 자가 없었다.

마족대군을 통솔하던 고계 마족들은 격노해 성 안의 모든 인족 수사들을 죽이고 천령성의 상징인 하늘까지 뻗어있는 경천거목도 베어버렸다.

거대한 나무에 기대 세워진 천령성은 붕괴했고 건물의 9할이 사라졌다.

마족대군도 천령성 전투로 원기가 크게 상해 바로 인근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천령성 잔해 위에 주둔하며 마계통로를 통해 마족 병사와 마수들을 보충 받았다.

게다가 마족들은 점령 지역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천령성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전쟁에 필요한 요새는 물론 단순한 마기를 분출하는 새까만 마목(魔木)까지 심어대는 것이 인족 영토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할 준비를 하는 듯했다.

이 소식은 곧 천연성을 비롯한 다른 인족 거점으로 퍼져나갔다. 겉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인족 내부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 * *

만황세계.

목족(木族) 영토에 있는 변두리의 원시삼림에는 열댓 개의 높은 탑과 회백색 성벽으로 이뤄진 작은 요새가 있었다.

요새 안은 마기가 가득했고 희미하게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성벽을 따라 순찰을 돌았다. 성벽 위쪽 상공에 거대한 검은 동굴이 어른거렸다. 바로 마계와 인계가 맞닿는 접점 중 하나였다.

이곳의 접점은 인족 영토의 초대형 ‘접점’에 비하면 극히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있었고 돌아다니는 붉은 피부의 마족들도 수행이 낮아 정예병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소규모 접점에 대량의 병력을 배치할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 목족 영토에는 접점의 수가 훨씬 적어 요새라도 지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소규모 요새 주변에 쓰러진 나무들과 울퉁불퉁한 땅이 몇 차례의 전투가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목족의 거대 세력들은 이런 작은 마족 접점까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현지의 작은 세력은 이런 요새도 눈에 가시였기에 매번 실패하면서도 일정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공격을 했다.

요새는 접점에서 건너오는 마수들과 마족들로 나날이 세력이 커졌고 주변 목족 세력은 이에 겁먹어 더욱 자주 공격을 감행했다.

이 날도 요새에서 멀찍이 떨어진 수풀 속에서 노란색과 녹색 나무 갑옷을 입은 목족인들이 나타나 목둔술을 이용해 조용히 전진하고 있었다.

수행은 들쑥날쑥했지만 훈련이 잘 되어 있는지 모두 기척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 중 연허기 노인과 화신 후기 중년 남녀가 가장 수행이 높아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둔술을 이용해 전진하면서 조심스럽게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죽 어르신, 이번에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족 요새를 점령할 수만 있다면 저희 가문들이 확실히 감사 표시를 하겠습니다.”

수려하게 생긴 중년인이 감격스런 어투로 말했다.

“아닐세. 나도 목족의 일원인데 마족을 상대하는데 당연히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는가. 허나 가문을 비워놓고 멀리 나온 것이 마음에 걸리니 속전속결하도록 하세.”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런 눈빛을 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들의 거의 모든 역량을 집결시켰으니 기필코 승리할 것입니다. 전투가 길어지거나 전세가 불리해지면 죽 어르신께서 나서 주시면 됩니다. 지난 전투를 통해 염탐한 결과 요새 안에 가장 수행이 높은 이들은 네 명의 화신급 마족들이었습니다.”

창백한 피부를 지닌 목족 여인이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그들이 전부라면 노부에게 맡겨두게. 자네들은 먼저 마족 접점을 허물어야 할 것이야. 접점이 없으면 마족들도 달아나지 못할 테고.”

“예, 죽 어르신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저희가 우선 접점을 허물고 어르신을 도와 고계 마족들을 상대하겠습니다.”

노인의 분부에 목족의 화신기 남녀가 당차게 답했다. 그들은 온 신경을 집중해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고계 목족인들은 수풀 속 회색 안개 속에서 남색빛으로 일렁이는 눈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줄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푸른 장삼을 걸친 한립으로 몇 개월이 걸려 이곳으로 이동했다. 그는 목족 병사들과 멀리 마족 요새를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한립은 피식 웃으며 회색 안개 속에서 빠져나와 푸른 그림자로 변해 목족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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