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5화. 신궁(神弓)
*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이 눈을 떴다.
“기껏해야 대여섯 번이면 그 자를 잡을 수 있을 것이네. 조금 전 전송이 이루어졌을 만한 지점을 몇 개 알아냈으니 바로 이동하지.”
“예, 대인! 하하, 영계 이족인들이 어찌 대인의 위대함을 알겠습니까. 그런데 대인의 보물이 어찌 낯선 자의 손에 있었는지요?”
“현천여의인 조각을 훔쳐간 마원(魔猿)은 내가 깨어났을 때 이미 죽어 있었네. 마원을 죽이고 보물을 가져간 것이겠지. 그동안은 줄곧 천운인들 소행이라고 생각해 태상장로들과의 협약 때문에 굳이 찾으려 들지 않았네. 그런데 인족 수사가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저도 당시 마금산맥에 침입한 천운인들을 보았지만 그들이 마원을 죽였는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천담화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니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세. 내 부상을 일부 호전시킬 수 있는 기회이니 놓칠 수 없지. 게다가 며칠 전 점괘에 따르면 내 상태에 크게 도움이 될 영약도 인근에 있는 듯하네. 흑악, 자네도 주의 깊게 주변을 살펴주게. 영약을 찾아 내 회복을 도우면 그만한 보상이 있을 것이야.”
“최선을 다해 대인을 도울 것입니다. 마음 푹 놓으십시오. 그저 대인께서 점괘에 나온 영약이 무엇인지 모르신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점괘술을 익히기는 했지만 이 방면에 정통하지 않다보니 어쩔 수 없군. 오래 전 전사한 운 수사와 용 수사가 떠오르는군. 그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운 대인과 용 대인의 명성은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성조가 아님에도 성조 대인들조차 꺼릴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니셨다고요. 특히 운 대인의 점괘술은 성계 제2라 불릴만해서, 현광 대인 말고는 넘어설 분이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자네도 그들에 대해 알고 있었군! 하긴 당시 그들의 명성이 자자하기는 했었지.”
여인이 웃음을 머금으며 생각에 잠겼다.
* * *
두 시진 후, 빼곡한 밀림 상공에 분홍색 거대 꽃이 나타났다.
“흠?”
빛이 가시고 거대 꽃을 밟은 보화와 흑악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인, 그 놈들을 찾으신 것입니까?”
“아니네, 그저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들 것 같구만.”
흑악의 물음에 백의 여인이 멀리 허공을 응시했다.
“손님이요?”
흑악이 허공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휘잉!
다음 순간 아무 징조도 없이 하얀 빛덩이 두 개가 나타나 그들이 있는 인근으로 다가왔다.
“건곤반과 석마전!”
거한이 비행 법기들을 확인하고 표정이 달라졌고, 여인의 시선에도 복잡한 기색이 묻어났다. 석전과 옥 원반 속 인물들도 거대 꽃을 발견했는지 급히 보물을 세우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보화 언니가 어째서 여기에!”
원살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원살 수사, 영계에서 다시 나를 만나게 될 줄 몰랐나 봅니다. 성계의 성제가 시작된 모양이에요. 그런데 수사의 언니라는 호칭은 감당하기 어렵군요.”
그녀의 말에 안색이 창백해진 원살이 차마 뭐라 답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옆에 있던 혈광의 화신들도 보화의 신분을 눈치 채고 내심 울상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보화 대인이 아니십니까! 혈광이 인사드립니다!”
“혈광,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분신을 만들어내고 실력이 많이 늘었습니다. 심부름을 시킬 일손이 부족하던 참인데 여기 남아 내 일을 도우면 되겠어요.”
백의 여인의 어투가 무척 매서웠다.
“……!”
그 말에 혈광 화신들은 그녀의 악의를 감지하고는 얼굴에 핏기가 가셔 검은 빛으로 변해 서둘러 옥 원반으로 달아났다.
웅!
그들을 태운 건곤반이 맑게 진동하며 흑백의 태극문양을 만들어내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건곤반이 현묘하다지만 제 주인이 조종하는 것도 아닌데 내게 통할 것 같습니까?”
보화가 냉랭히 한 마디를 하고는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하늘에 뜬 일곱 개의 태양 중 하나가 몸집을 부풀리더니 흐릿하게 변했다.
보화와 성조 화신들 위로 파동이 크게 일고 커다란 태양이 나타났다. 태양의 작열하는 빛에 순간적으로 기운이 솟구쳤다. 마치 진짜 하늘의 태양을 끌어내린 것 같았다.
“환일대법(幻日大法)!”
원살이 어두운 얼굴로 소리를 높였다. 보화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거침없이 거대한 태양을 가리켰다.
쿠쿠쿠쿵!
거대한 태양이 빙글 돌아 하얀 광선들을 퍼트렸다. 공격 범위가 워낙 방대해 천지가 하얀빛으로 뒤덮였다.
이에 원살은 서둘러 검은 거울을 방출하고 수정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하얀 광선들이 보호막에 막혀 접근하지 못했지만 급히 수결을 맺어가며 법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보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콰콰쾅!
이때 멀리서 굉음이 울리고 하얀 광선이 꿰뚫은 허공에서 거대한 옥 원반이 휘청거리며 튀어나왔다. 수많은 하얀 광선들의 습격에 옥 원반 속에서 혈광 화신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옥 원반은 다시 검은색과 하얀색의 태극 문양을 만들어 광선의 맹공을 막아냈다.
그 모습에 보화가 무표정하게 허공을 쥐었다.
경천동지할 폭음과 함께 하얀 태양에서 활활 타오르는 거대 손이 나타나 옥 원반을 잡아채려 들었다.
우웅!
옥 원반 속 화신들이 놀라 서둘러 술법을 발동했다. 이에 흑백 태극문양이 진동하며 다시 한 번 순간이동을 하려 흐릿해졌다.
그러나 흑백의 태극 문양은 하얀 화염으로 불타오르는 거대 손과 닿자마자 부들부들 몸을 떨고 폭발해 버렸다. 애원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옥 원반은 하얀 화염이 옮겨 붙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거대 손이 뜨거워진 옥 원반을 쥐자 손끝에서 하얀 화룡(火龍)들이 튀어나와 보물을 휘감고 녹이기 시작했다.
“안 돼!”
쉭!
손바닥 크기의 작은 탑이 그 안에서 빠져나와 일곱 빛깔의 보탑 허상으로 변하고는 옥 원반 주위를 둘러싼 다섯 마리의 하얀 화룡들을 떨쳐냈다.
화룡들이 입에서 쉼 없이 하얀 화염을 분출해도 보탑 표면에 일곱 빛깔의 광채가 어려 적잖은 화염을 흡수하고 있었다.
쿠쿠쿵!
그때 허공의 하얀 태양이 통째로 떨어져 내렸다. 보탑 허상이 아무리 대단한 보물이라도 혈광 화신들이 제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거대한 태양의 압력에 허상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어 흩어졌다.
일곱 빛깔의 점으로 부서진 허상은 다시 손바닥만 한 보탑으로 돌아갔다. 광채를 잃어버린 보탑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화르륵!
눈부신 하얀 빛 속에서 옥 원반이 완전히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세 개의 핏빛이 그곳을 탈출하려고 튀어나왔다.
그러나 하얀 화염이 순식간에 핏빛들을 감싸 활활 타올랐고, 핏빛 빛덩이들은 참혹한 비명만 남기고 검은 연기로 피어올랐다.
혈광의 삼대 화신들은 합체 후기에 이르는 신통을 지니고도 보화의 일격을 막지 못한 것이다.
이는 혈포 소년들이 화신에 불과하고 보화는 본체인 탓도 있었지만 환일신통이 대부분 마공과 상극이기 때문이었다.
* * *
천연성 인근의 마족대군 진영.
혈포 소년이 상석에 앉아 진지하게 다른 합체기 마존들과 논의를 하고 있었다.
마족대군은 천연성 주변의 거대 인족 거점을 소탕했고 숨어 있던 작은 세가와 종문까지 대부분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 이제 어떻게 천연성을 철저히 봉쇄해 함락시킬지 세부적인 사항을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혈포 소년이 벌떡 일어나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어찌 이럴 수가! 그 셋이 힘을 합쳤는데 당했다고?”
다른 마족들은 혈포 소년의 격노한 모습에 깜짝 놀라 눈치를 살폈다.
“혈광 대인, 무슨 일로 그리 화를 내십니까?”
마족 노인이 주저하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아니다. 의식을 심어 놓은 병사들에게 문제가 생겨 그들이 수행하던 임무에 차질이 생겼구나. 나중에 다시 처리하면 되니 계속 하라.”
혈포 소년이 냉정을 되찾고 노기를 가라앉혔다. 그 말에 다른 마족 수사들은 감히 더 이상 캐묻지 못했다.
* * *
고마계의 어느 핏빛 호수 깊은 곳.
느닷없이 격노한 포효가 길게 이어졌다. 날카롭고 섬뜩한 포효에 호수 표면이 덜덜 떨리다 한참 후에야 잠잠해졌다.
* * *
거대 태양이 떨어져 내릴 때 원살의 거울 보호막도 함께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하얀 화염이 예외 없이 그녀를 덮치려 들었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해져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향해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석전에서 검은빛이 빠져나와 원살의 등에 손을 뻗었다.
휘릭!
금색 구슬이 하얀 화염으로 향해 사라지고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구슬이 금색 기운으로 폭발해 하얀 태양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은 것이다.
태양의 크기에 비하면 작았지만 검은 그림자가 원살을 데리고 빠져나가기엔 충분했다.
“육극!”
검은 그림자의 등장에 흐트러짐 없던 보화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녀의 손짓에 발밑의 거대 꽃에서 꽃잎이 두 장 떨어져 나왔다.
꽃잎들은 각각 청록색의 거대한 궁(弓)과 하얀 화살로 변해 보화의 손에 들렸다. 그녀는 느긋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핑!
기다란 화살이 하얀 화염을 휘감고 사라졌다.
이제 막 원살을 데리고 구멍을 통해 빠져나오던 검은 기운은 파공음을 들고 안색이 달라져 남색빛을 일으켰다. 8개의 수정 방패가 나타나 검은 그림자의 앞을 겹겹이 막아섰다.
갑작스레 나타난 하얀빛이 여덟 겹의 방패 속으로 쇄도했다.
쩌저정!
놀랍게도 방패 여덟 개가 동시에 터져나갔고 가슴에 작은 구멍이 뚫린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펑!
하얀 화염이 폭발해 검은 그림자를 불사르려 했다. 검은 그림자는 새까만 갑옷으로 온몸을 가린 여인이었다.
“…….”
갑옷 여인은 화염에 둘러 싸여서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핏물이 안개로 번져 놀랍게도 기세등등하던 하얀 화염을 멸하고 있었다.
갑옷 여인은 상처를 수습할 겨를도 없이 급히 수결을 맺어 원살을 데리고 검은 빛으로 날아올랐다. 검은빛은 순식간에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때 갑옷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화, 본체의 힘으로 겨우 화신들을 괴롭히지 말고 자신 있으면 본 좌의 본체가 강림할 때 붙어봅시다!”
그 말에 보화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 그녀는 갑자기 오색 기운으로 둘러싸여 주술문자를 내뿜는 석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석전 아래에 빛의 진법이 형성되어 전송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저들은 가도 너희는 남거라!”
보화가 커다란 궁을 거두고 허공을 가리켰다. 거대한 태양이 불의 장막으로 변해 하늘을 뒤덮자 석전 아래로 분홍색 거대 꽃이 떠올라 빛의 진법으로 검기를 날렸다.
파앗.
빛의 진법이 눈 녹듯이 와해되었다. 석전은 전송이 실패하자 으르렁 거리며 둘로 분리되어 석인의 모습을 드러냈다.
석인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분노를 표했지만 감히 보화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보화는 석인들을 보고 기괴한 수결을 맺었다.
쿠릉!
석인들 밑에 있던 거대 꽃이 회전하며 두 줄기의 반짝이는 빛기둥을 분출했다. 석인들이 움찔하며 피하려 했지만 빛기둥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두 빛기둥은 석인들의 보호막을 무시하고 방대한 육체에 파고들어 그들의 몸에 무수히 많은 수정 꽃송이들을 피워냈다. 석인들은 수정으로 봉인되어 더 이상 꼼짝하지 못했다.
보화의 작은 손짓에 석인 몸 외부의 수정들이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잠시 후 수정으로 뒤덮인 석인들은 주먹 크기로 줄어들어 그녀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강적을 처리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옆에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흑악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가왔다.
“그것들은 혈광의 화신일 뿐인데 강적이랄 것이 있는가. 그저 육극의 육대화신 중 하나는 내가 쏘아 보낸 낙일전(落日箭)에 맞았으니 백년 내로는 원래의 법력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네.”
“대인, 이번 기회에 그들을 쫓아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네. 육극은 아마 숨겨놓은 비술을 이용해 만 리 밖으로 달아났겠지. 지금 뒤쫓는다고 해도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천담화를 구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네. 천담화를 지닌 자를 놓치면 앞으로 찾느라 고생깨나 할 것이야.”
“예, 대인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거한의 말이 끝나자 발밑의 거대 꽃이 빙글 돌아 분홍빛으로 두 사람을 감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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