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4화. 꽃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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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 한립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와와를 회수하고 직접 비차를 조종해 거한에게 다가갔다.
“한립 수사가 아닙니까! 어째서 그런 꼴로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거한이 의식으로 한립을 훑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뇌 형, 그 말은 제가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명족(鳴族)의 소주인 수사가 그리 주눅이 들어있다니 누군가에게 추격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곤란한 처지이기는 하지만 수사보다는 살만합니다. 못 본 사이에 합체 중기에 이른 것은 그렇다 쳐도 그 많은 법력은 다 어디로 간 것입니까? 대승기 수사에게라도 쫓기고 있는 겁니까?”
“뇌 형의 짐작대로입니다. 정말 대승기 수사의 추격을 받아 이곳까지 온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뇌진 신통을 지닌 뇌 형 역시 대승기 수사에게 쫓겨서가 아닙니까?”
한립이 솔직히 인정하고 반문했다.
“알고 보니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쯧쯧, 어쩌다 이 근방에 대승기 수사가 이리 많아진 것인지 모르겠어요!”
“인족과 인근 부족들이 마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러니 제 뒤를 쫓는 것은 당연히 고마족일 테고요. 그런데 수사는 무슨 일로 쫓기는 것입니까?”
“마겁! 몇 달 전에 폐관을 마치고 나온 내가 마겁을 어찌 알겠습니까.”
처음 듣는 소리인지 거한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모르실 만도 합니다. 마겁이 시작된 지 꽤 시간이 지났고 저를 쫓는 것은 마족 성조의 화신들입니다. 각각이 합체 후기의 신통을 지닌 데다 힘을 합치고 있어 살아남기 위해 그저 달아나고 있지요. 뇌 형을 쫓는 자도 고마 성조의 화신은 아니겠지요?”
“마족 성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정순한 진마기를 부리기는 하더군요. 한 명은 내 오뢰체와 상극인 공법을 쓰고 다른 한 명은 나도 정확한 수행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진짜 고마 성조의 화신일지도 모르지요.”
거한이 얼버무리자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가 금방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오래전 알게 된 이종족 수사 뇌운자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 그것을 캐묻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운 좋게 수사를 마주쳤습니다. 뇌 형 예전에 제게 말했던 뇌진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우리 둘이 힘을 합친다면…….”
“쌍중뇌진(雙重雷陣)을 어찌 잊겠습니까! 허허, 드디어 희망이 보입니다!”
한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뇌운자가 얼굴이 밝아져 끼어들었다.
“수사도 같은 생각이라면 어서……. 이런, 어디서 향기가?”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재촉하려다 표정이 확 달라졌다.
“제길, 그 자들이 쫓아왔습니다! 한 수사, 어서 이리로 오시지요. 일단 수사를 데리고 이곳을 떠야겠습니다.”
뇌운자가 얼굴에 핏기가 가신 얼굴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깜짝 놀란 한립이 서둘러 거한 옆으로 가 비차를 거두었다.
긴장된 얼굴로 거한이 수결을 맺자 은색 뇌전들이 폭발적으로 튕겨나가 은색의 새로운 뇌진을 형성했다.
콰르릉!
거한과 한립은 기다란 뇌전에 휩싸여 곧 사라질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뇌진 위에 공간 파동이 일고 분홍색 꽃나무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분홍색 수정처럼 반짝이는 거대한 꽃나무에서 기이한 향기가 느껴졌다. 느릿하게 퍼진 분홍 기운이 허공을 뛰어넘어 순식간에 뇌진을 덮치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피해요!”
거한은 분홍 기운을 보고는 기겁해 완성 직전인 뇌문 전송진을 버려두고 날개를 펄럭였다. 뇌전으로 변해 뇌진을 빠져나온 그는 허공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한립은 꽃나무를 처음 보았지만 뇌운자의 그런 행동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도 머뭇거리지 않고 청백색 빛의 실로 변해 뇌전을 탈출했다.
거대한 뇌진이 분홍 기운에 휩쓸려 소멸되었다! 분홍 기운은 뇌전의 힘과 상극인 듯했다. 청백색 둔광이 사라지고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한립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뇌 형, 저들은…….”
“맞습니다. 나를 쫓던 자들입니다! 어찌 추격해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지!”
한립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뇌운자가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그 말에 한립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꽃나무 허상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 그들은 다행히 꽃나무의 미혹에 걸려들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이제 어찌 도망가려느냐? 그만 항복하고 물건을 내놓아라! ……흠, 네 놈은 또 누구냐?”
꽃나무 인근에 검은 장포를 입은 추남이 나타나 뇌운자와 한립을 훑었다.
“저 자 때문에 그렇게 황급히 달아났단 말입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저 자 말고도…….”
“물론 나도 있다.”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가 꽃나무 허상에서 울렸다. 나무 표면의 분홍빛이 미친 듯이 반짝거리고 하얀 치마를 입은 맨발의 여인이 등장했다.
굉장한 미모를 지닌 여인은 거대한 분홍 꽃을 밟고 서 있었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마치 질식할 것 같은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상대는 대승기 수사이거나 대승기 수사의 화신이 틀림없었다. 거대 꽃 위의 여인은 한립과 뇌운자를 번갈아 보고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만 생각을 바꾸는 것이 어떻겠는가. 겨우 꽃 한 송이를 위해 한 달 넘게 달아나다니, 천담화(天曇花)가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그것만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네.”
백의 여인의 말에 뇌운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천담화가 어떤 보물인데 그냥 내놓으란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뇌둔술에 자신이 넘치는 모양이구나.”
“당신이 나를 잡을 수 있었으면 내가 어찌 한 달이나 달아났겠습니까.”
뇌운자가 두려움을 떨치려 애써 냉소했다.
“감히 보화 대인께 그런 망발을 하다니!”
“나와 단독으로 싸우면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 자가 입만 살아가지고!”
흑포 거한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뇌운자도 거침없이 받아쳤다. 그 말에 거한이 콧김을 내뿜으며 당장 달려들려 했다.
“흑악, 그만두게. 자네가 상대할 자가 아닐세.”
“하지만, 대인…….”
자신을 가로막는 여인의 말에 거한이 달갑지 않은 기색을 했다.
“내 말에 따르지 않겠다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립은 흑포 사내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분명 처음 보는 자인데 어딘가 익숙한 기운을 발산해 언젠가 멀리서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억을 더듬을 때는 아니었다. 뇌운자와 같이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립은 뇌운자의 뇌진을 상당히 믿고 있었다. 상대의 신통에 미리 준비만 하면 그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앞의 여인이 정말 대승기 수사라 해도 그걸 막기는 어려울 테니 뇌운자도 당당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여인이 뇌운자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뇌진을 다루는 술법은 뇌 수사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가? 현묘하기는 하지만 오뢰체를 지닌 자가 아니면 그렇게 강력한 위력을 내긴 어렵겠군. 그것을 믿고 내 제안을 거절한 것이겠지.”
“그렇다면 어쩔 것입니까?”
“뇌진 전송술이라는 것이 공간의 힘과 뇌전의 힘을 결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자네도 그 두가지 힘을 융합하는 법을 다른 비술에서 참고해 공법을 만들어냈을 테지.”
담담한 보화의 말에 뇌운자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공교롭게도 나도 뇌전의 힘과 공간의 힘을 다룰 줄 알아서 말이네. 두 가지 천지법칙에 대해서 연구도 꽤 했고.”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자네를 따라잡는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것을 알아챘을 테지? 앞으로 몇 번만 더 자네의 뇌전을 살펴보면 관련 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네. 게다가 자네에게 표식을 심어 놓아 한 번에 천만리 밖으로 전송되지 않는 한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고.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내가 준 기회를 잡게. 안 그래도 보물을 제련하는데 합체기 수사의 정혼이 몇 개 필요하던 참인데 수사가 그 재료가 되어서야 안 되지 않겠는가.”
여인은 차분하게 압박을 가했다. 그 말에 뇌운자가 얼굴이 창백해져 고민하는 동안 백의 여인의 시선이 한립에게로 옮겨갔다.
‘이런.’
그녀의 눈길에 한립은 마치 온몸이 샅샅이 수색당하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상대의 의식이 그보다 훨씬 강하다는 증거였다.
한립은 재빨리 대연결과 연신술을 운용해 의식의 힘을 간신히 밀어냈다. 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대승기 수사와 비슷한 의식의 힘을 지닌 그가 이런 느낌을 받을 정도면 여인은 대승기 수사 중에서도 절정의 의식을 지닌 것이 틀림없었다.
여인은 눈을 깜빡이고 그가 깜짝 놀랄 만한 말을 내뱉었다.
“마금산맥에서 내 수하를 죽이고 현천여의인을 가져간 자가 너였구나. 남의 보물을 가져갔으면 그만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선배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선배님을 처음 뵙습니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한립은 애써 모른척했다.
“수사는 돌려줄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 알아듣지.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가져가겠네.”
여인은 무표정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우웅!
한립의 소매 속에서 금빛이 튀어나왔는데 정말 현천잔도였다! 칼날 조각이 여인의 대수롭지 않은 손짓에 불타오르듯 뜨거워지더니 그와의 의식 연계를 끊고 날라 올랐다.
한립이 안색이 급변해 푸른 거대 손을 불러냈다. 그러나 금색 칼날 조각이 번득이며 사라지는 바람에 푸른 거대 손은 허공을 스쳤을 뿐이었다.
이때 백의 여인의 손에 금빛 칼날이 들어왔다.
한립은 어렴풋이 흑포 거한의 정체를 알아챘다. 마금산맥에 있을 때 멀리서 강력한 마기를 느낀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기운이었다. 그렇다면 여인은 마금산맥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마족 성조일 것이다.
한립은 갑자기 귀한 보물을 잃어 속이 쓰렸지만 여인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여의인이로구나! 까마득하게 오랜 세월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기운을 몰라볼 수야 없지. 흑악, 자네가 쓸 만한 보물이 없는 것 같던데 가져다 쓰게.”
여인은 칼날 조각을 몇 번 쓰다듬다 그것을 추한 사내에게 던져주었다.
“감사합니다, 보화 대인!”
흑악이 멍하니 있다 보물을 받아들고 즐겁게 인사를 올렸다. 한립은 속이 쓰렸지만 나서서 막을 수도 없었다. 그 후로 백의 여인은 모두의 예상과 달리 더는 한립을 신경 쓰지 않았다.
“결정은 내렸나? 당장 쓸모도 없는 영약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선택을 하지는 않겠지?”
그 말에 뇌운자가 움찔하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님의 말씀이 전부 맞습니다. 반나절 전에 그런 제안을 들었다면 분명 설득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뇌운자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날개를 펄럭이며 수결을 맺었다.
콰르릉!
그가 은색 뇌전을 번뜩이며 사라졌다. 한립 옆에 뇌전빛이 반짝이고 희미한 인영을 품은 뇌진이 생겨났다. 바로 뇌운자였다.
“갑시다!”
한립은 뇌운자가 소리치기도 전에 뇌진이 등장하자마자 이미 몸을 날렸다. 그 모습에 거한이 대노해 검은 거대 도끼를 불러내 뇌진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쉬익!
도끼날에서 굵직한 검은 빛이 빠져나와 허공을 갈랐다.
검은빛보다 뇌운자의 동작이 빨랐던 것이다. 코웃음 소리를 남기고 뇌운자와 한립을 품은 뇌전이 은빛으로 사라졌다.
검은빛은 뇌진의 잔해를 베어냈지만 달아난 그들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보하는 거한을 막지도,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나서지도 않고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묵묵히 무언가를 감응하는 듯했다. 거한은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것에 짜증이 났지만 보화의 행동에 입을 다물고 옆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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