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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53화 (910/2,000)
  • 1153화. 만황

    *

    “녀석이 그렇게 많은 단약을 지니고 있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습니까. 당장 녀석의 정확한 위치를 감응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녀석의 법력이 고갈될 때까지 이대로 쫓아야겠지요.”

    중간 화신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녀석의 속도가 처음과 비교하면 차이가 큽니다. 녀석도 법력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제가 원살 수사를 건곤반으로 청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힘을 합쳐 보물을 조종하면 법력을 아껴 더 오래 추적할 수 있으니까요.”

    “건곤반으로 건너가는 일은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석마전은 두 석마장로가 변신해 만들어진 것이라 다른 보물에 비해 법력 소모가 적은 편입니다.”

    혈광 화신의 기대어린 시선을 직시하고 원살이 분명히 선을 그었다.

    “하아, 도저히 수사를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저도 어쩔 수 없이 수하들을 불러 잠깐씩 대신 건곤반을 움직이게 할 수밖에 없겠군요.”

    혈광의 세 화신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시든가요. 녀석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 수사와 저도 미리 준비를 해둬야겠지요. 때가 되었을 때 우리가 먼저 법력이 고갈되면 잡기는커녕 다시 달아날 기회만 주고 말 것입니다.”

    “추격에 성공하면 인족 녀석이 절대 다시 달아나지 못하도록 할 방법을 준비해 두었으니 안심하십시오.”

    “그 말을 한번 믿어 보겠습니다. 앞으로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굳이 연락하지 않고 법력을 비축하겠습니다.”

    원살은 이 말을 끝으로 수정벽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갑자기 건곤반 안에 정적이 흘렀다.

    “방금 원살의 말을 들었겠지?”

    혈광의 중간 화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들은 같은 본체에서 나왔지만 특수한 방법으로 분열된 후 성격이 완전 달라져 각각 다른 이들이 되어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해. 잔혼으로 본체 원영의 위치를 포착하는 신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법력이 상대를 월등히 초월할 때나 가능한 것이지! 화신의 몸으로 그런 짓을 하면 주 원영이 금방 눈치 채고 스스로를 봉인해 연계를 끊을 것이다.”

    또 다른 화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마쇄와 자언정까지 우리에게 넘겨준다고?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 뻔해. 그것들이 진정한 현천의 보물은 아니라도 현천의 물건인데 어찌 그리 쉽게 포기하겠어. 오히려 그중 하나라도 얻어내려고 우리와 다툼을 벌였다면 진심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마지막 화신이 냉소했다.

    “다들 알고 있으면 되었다. 인족 녀석을 잡는 것이 급선무니까 오늘부터 차례로 휴식을 취하며 진마정(眞魔晶)을 지니고 있자! 원살도 대군을 통솔하는 화신이 강림할 때 그렇게 많은 진마정을 갖고 온 줄은 모를 거야. 진마정으로 돌아가며 마기를 보충하면 1년은 더 버틸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원살과 우리의 법력 차이가 커질 테니 한 가 녀석의 보물을 취할 때는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겠지.”

    중간 화신이 음산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고, 나머지 두 화신도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 * *

    같은 시각 거대 석전 안. 궁장 여인이 냉랭한 얼굴로 돌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돌연 낯선 여인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이제 깨어난 거예요?”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원살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하하, 원살 네가 육신을 빌려준 덕에 저들의 이목을 속이고 분혼을 강림할 수 있었다.”

    “이리로 넘어올 때 언니의 분혼이 깊이 잠들어 몇 년 동안이나 깨어나지 못했다고요.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네 화신의 육체가 아무리 강해도 두 개의 강대한 원신을 감당하기는 어렵지. 내 스스로 원신과 감각을 봉인해 네 육신의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그보다 이곳은 어디고 어째서 그리 법력이 쇠한 것이야?”

    “육극 언니,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원신을 육신으로 돌리는 일부터 해요. 언니의 여섯 화신 중 가장 약한 것이라도 지금 제 몸보다는 훨씬 강할 테니까요.”

    “그러자. 의식을 찾았으니 네 몸에 오래 머물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원살의 얼굴에 검은 기운이 드리우고 미간 사이에서 빛덩이가 빠져나와 손가락 크기의 녹색 소인으로 변해 날아갔다. 녹색 소인은 검은 옥으로 만들어진 관 위에 멈춰 있었다.

    이때 원살이 주문을 외우며 손을 뻗어 검은 관을 가리켰다.

    화륵!

    검은 관에 붙어있던 금색과 은색 부적들이 불타 사라지고 삐거덕거리며 뚜껑이 열렸다. 짙은 마기가 출렁출렁 빠져나와 대전을 가득 채우려 들었다.

    녹색 소인은 곧장 빛줄기로 변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쿠릉!

    관 밖으로 흘러나오던 마기가 굉음과 함께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대전을 채웠던 마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옥관 표면의 문양이 하얀빛을 터트렸다.

    하얀 문양이 반짝이며 내뿜는 기운에 주변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이런 기운은 오래 가지 않았고 검은빛과 하얀빛이 금방 사라져 대전 안이 어두워졌다.

    우웅!

    이때 옥관에서 수백 개의 은색 고대 문자가 떠올라 허공에서 여섯 개의 은빛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각기 다른 체형을 지닌 은색 그림자들은 모두 갑옷을 입은 인형(人形) 마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은색 그림자들은 순식간에 은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잠시 후 옥관 안에서 긴 포효소리가 들려오더니 그 안에서 누군가 천천히 일어났다. 여인은 고풍스런 검은 갑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험상궂은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언니, 몸은 괜찮아요? 본체의 신통을 얼마나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갑옷 여인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원살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 세계의 제약을 받기는 하지만 본체의 힘을 2할 정도 쓸 수 있을 것 같구나. 대승기에 이르지 못한 수사라면 내 적수가 될 수 없겠지.”

    갑옷 여인이 기지개를 펴며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2할이면 충분하겠어요! 성가신 일이 생겨 마침 언니의 도움을 구하려던 차였거든요.”

    “성가신 일? 아, 이곳에 너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저 건곤탑에 있는 자는 성족 중 누구지? 독룡도 영계로 강림했느냐.”

    갑옷 여인이 주변을 살피며 석전 옆의 거대한 옥 원반을 알아보았다.

    “독룡이 아니라 혈광의 화신들이 보물을 조종하고 있어요. 게다가 지금은 저와 손을 잡고 인족 수사 한 명을 쫓고 있고요. 그자가 진마쇄와 자언정을 지니고 있는데다 혼돈이기까지 지니고 있거든요!”

    원살이 주저 없이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진마쇄와 혼돈이기? 그렇다면 나도 관심이 가는구나. 자세히 이야기를 해 보거라.”

    갑옷 여인은 눈을 반짝였지만 목소리는 더없이 평온했다.

    “그게 제가 언니의 또 다른 화신의 부탁을 받아 인족의 계획을 막으러 떠났는데…….”

    원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녀석을 쫓고 있는 것입니다. 혈광은 온전히 믿을 수 없고요. 인족 수사를 찾으면 분명 저와 분쟁이 생길 겁니다.”

    거의 일다경 동안 종알거린 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을 들으니 혈광이 다른 수가 있기는 한가 보구나. 몸을 빌려 영계에서 분신을 만들어냈으면 직접 분신을 강림한 너보다 훨씬 약할 텐데 말이야. 허나 내가 깨어났으니 걱정할 것 없다. 혼돈이기는 성족급 존재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니 혈광이 차지하게 둘 수 없지. 하계로 오면서 적잖은 진마정을 챙겨 왔으니 네가 법력을 회복하는데 충분할 게다.”

    “언니가 도와준다면야 걱정할게 없지요!”

    갑옷 여인의 차분한 대답에 원살이 크게 기뻐했다.

    * * *

    한 달 후, 한립은 잿빛 안개로 뒤덮인 거대한 산맥을 앞두고 있었다. 짙은 안개는 하늘 끝까지 닿아있는 것처럼 끝도 없이 펼쳐졌다.

    이때 그는 푸른 삼각 마차에 앉아 눈을 감고 극품영석을 쥐고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산맥을 얼마 남기지 않고 한립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남쪽 하늘의 끝인가! 인족을 보호하기 위해 초대형 진법으로 형성한 금제라더니 위용이 대단하구나. 두 세계가 겹쳐져 금제의 힘이 약화되지 않았더라면 통과하기 쉽지 않았겠어.”

    한립이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가 탄 마차가 짙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고 반나절 후, 석전과 거대 옥 원반도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살과 혈광은 잿빛 안개를 앞두고 상의를 하곤 그 안으로 들어갔다. 만황세계가 알 수 없는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포기할 수 없었다.

    * * *

    석 달 후, 한립은 어느 늪 위에 떠서 푸른 검기들을 날리고 있었다. 금빛 뇌전 그물에 갇혀 있던 보라색 거대 사자가 수많은 검기에 베어져 목숨을 잃었다.

    휙!

    떨어져 내리는 핏물과 살점 속에서 보랏빛이 그의 손에 빨려 들어왔다. 달걀 크기의 수정은 짐승의 요단이었다.

    ‘연허 후기의 자정사(紫睛獅)를 잡았으니 그 요단으로 섭령단(攝靈丹)을 제련해야겠다. 그거면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거야.’

    길게 한숨을 내쉰 한립의 얼굴이 어딘가 파리해 보였다. 1년 동안 법력을 회복시켜주는 단약을 계속해서 집어삼키다 보니 단약이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영석으로 법력을 보조하지 않았으면 진작 잡혔을 것이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아예 고대 짐승들이 서식하는 곳으로 뛰어들어 빠르게 요수를 섬멸하고 요단을 얻어 단시간 내에 법력 회복용 단약을 제련했다. 보조 재료들이 충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충분히 공을 들이지 못해 단약의 효과가 떨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떠나고 하루 뒤, 혈광의 세 화신과 원살이 늪에 도착했다. 그들은 고대 짐승의 잔해를 보고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들도 한립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서로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혈광과 원살 쪽도 각각 적지 않은 진마정을 보유하고 있어 당장 법력이 고갈될 일은 없었다.

    이렇게 한립은 고대 짐승들을 격살해 단약을 만들어가며 점점 더 만황세계 깊숙이 들어갔다.

    오랫동안 쓸 만한 고대 짐승의 요단을 구하지 못하면 아예 광한계서 채취한 선계의 영초나 과실을 꺼내 생으로 씹어 먹기도 했다. 약성은 다양해도 함유한 정순한 영기만은 진짜라 약간의 법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금 그의 몸은 온갖 혼잡한 성분으로 난리도 아니었다. 평소였으면 가부좌를 틀어 법력을 정순하게 하거나 혼잡한 기운을 밀어내겠지만 도망가기에 급급한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일단 강제로 약성을 가둬놓고 나중에 처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시간이 흘러 도망 생활은 또 반년 넘게 이어졌다.

    비차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한립 옆에 하얀 치마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통령괴뢰 와와로 그를 대신해 비행 보물을 조종하고 있었다.

    와와의 법력이 한립만 못해 비행 보물의 속도가 크게 줄었지만 멈춰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현재 한립의 얼굴은 반년 전보다 훨씬 핼쑥했고 내뿜는 기운도 있는 듯 없는 듯 허약했다.

    갑자기 한립의 표정이 달라지며 그가 눈을 부릅떴다.

    콰르릉 콰쾅!

    몇 리 앞 허공에 벼락이 내려치고 은색 뇌전들이 결집해 은색 대형 뇌진(雷陣)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펑!

    굉음이 들리고 뇌진 중앙에서 우람한 체구의 신영이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은색 뇌전으로 온몸을 휘감은 신영은 새빨간 머리카락과 수염을 지닌 중년 거한이었다.

    각진 얼굴에 매부리코를 지닌 거한은 등 뒤로 붉은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은빛 뇌전이 수시로 치지직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거한은 창백한 얼굴에 군데군데 타들어 간 은색 장포가 길게 찢긴 채 맨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 합체 초기의 수행을 지닌 그는 한립보다 더 처량한 몰골로 얼굴에 당황스런 기색이 가득했다.

    “저 자는!”

    한립은 한눈에 거한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거한도 그의 존재를 감지하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가 표정이 이상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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