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2화. 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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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한 핏빛 실로 변해 번득이며 사라진 마영이 하늘 저 끝에서 검은 날개를 펼치고 나타났다. 마영은 흐릿하게 변해 시야에서 사라졌다.
“혈영둔! 성가신 둔술을 익히고 있다만 그렇다고 달아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일 것이다!”
원살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짓에 땅에 박혀 있던 거대 돌기둥이 뽑혀 올라와 회백색 석전으로 합쳐졌다. 원살은 마족 정예병들을 남기고 석전으로 뛰어들어 하얀 빛으로 쏘아져 나갔다.
정예병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라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북적이던 산골짜기가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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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원영과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어느 호수 위. 한립이 검빛으로 만들어진 거대 청룡을 조종해 반인반충(半人半蟲)의 마족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있었다.
마족들은 원영도 달아나지 못하고 검빛에 조각이 나 푸른 연기로 사라졌다. 그가 소매를 털자 푸른 청룡이 맑게 울고 빽빽한 푸른 검빛으로 돌아갔다.
검빛들은 허공을 선회해 한립의 몸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반인반충의 고계 마족 잔해 옆에 또 다른 열댓 구의 시체들이 더 있었다.
비검을 회수한 한립의 얼굴이 퍽 창백했다. 급히 심법을 운용해 몸의 기운을 조정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벌써 눈치 챈 것 같으니 더 이상 이 방향으로 갈 수는 없겠어.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천연성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 비술을 펼쳐 그가 만들어낸 여덟 허상 중 본체는 없었다.
곡아와 제2원영에게 각각 영체와 금신을 조종하게 해 추격을 따돌리고 그는 태일화청부를 사용해 제자리에 숨어 있었다.
수행이 크게 늘어난 덕에 태일화청부의 현묘함도 상상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렀고 원살과 혈광의 화신들도 부적의 은신술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물론 지금까지 달아나면서 일부러 태일화청부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방법은 영체와 제2원영에게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체는 지선의 육체로 만들어진 것이라 천지영물이 환형을 한 곡아가 부리면 적당한 기회를 보아 숨을 수 있었고, 제2원영에게는 따로 태일화청부를 내주었다.
‘마영은 마공 비술을 수련했고 마기로 날개를 응결해 혈영둔도 펼칠 수 있고 말이야.’
이렇게 되면 마영과 곡아가 달아날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적당한 거리에서 마족 추격자들을 격살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한 것이었다.
이제 혈광 등에게 그의 위치가 전해졌을 테니 더는 천연성 방향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한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경로를 틀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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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간, 한립의 움직임에는 어떤 규칙도 없었다.
처음에는 혈광 화신들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보고에 뒤늦게 그를 쫓고는 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한립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이상한 것은 원살로 의심되는 여인이 혈광의 삼대 화신과 같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립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고 법력이 부족하지 않다면 혈광 화신들을 거꾸로 습격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혈광의 화신들은 자꾸 그를 놓치자 이를 악물고 대량의 병력을 파견해 곳곳에 수하들을 심어놓았다. 이에 달아나면서도 한립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물처럼 배치된 병사들에 마족대군의 손아귀에 떨어진 전송진들을 생각하면 한립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잠깐 멈춰 법력을 3, 4할 정도 회복하다 혈광 화신들에게 따라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곧바로 달아났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위험한 상황에 부딪혔을 것이다.
결국 그는 성황성이나 4대 진령세가 등 인족 거점으로 향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목적지를 바꾸었다.
인족 거점으로 향하는 곳이 아니면 확실히 지키고 있는 마족 병사들의 수가 적었다. 이에 혈광 화신들이 그의 소식을 접하는 간격도 길어졌던 것이다.
한립은 여유가 생겨 멈춰서 쉬는 시간이 길어졌고 법력도 점차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여유도 길게 가지 않았다.
세달 후, 그를 추격하는 무리 속에 원살성조 화신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가 두세 시간 정도 쉬고 있으면 반드시 여 마두가 혈광 화신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인근에 마족 병사가 많지 않아 적시에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 후로 한 달간 아무리 방향을 바꾸어도 네 마두들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뭔가 이상해.’
한립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네 마두는 마치 그가 가는 방향을 알고 있는 것처럼 끈질기게 쫓아오고 있었다.
그의 행적을 쫓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얻은 것이 분명했다.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지며 마족들이 있을 만한 곳을 피해 더욱 황량하고 외지 곳으로 달아났다.
네 마두에게 완전히 달아날 수는 없어도 상대가 부릴만한 병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렇게 네 마두와 한립은 나날이 인족 영토 변방으로 날아갔다.
만황세계와 가까워 가끔 고대 짐승들이 금제를 뚫고 난입하기도 해 인족들도 거의 살지 않는 곳이었다.
어두운 얼굴의 한립이 푸른 빛줄기로 변해 쾌속으로 날아갔다. 이제 거대 붕새로 변신해 전속력을 다할 만큼 법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리 강철 같은 정신력을 지닌 한립이라 해도 반년 동안의 도망 생활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멈춰 서서 네 명의 성조 화신과 생사를 건 일전을 벌일 생각 따위는 없었다. 네 마두들도 영원히 그를 추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 * *
한립과 멀리 떨어진 고공.
석전과 옥 원반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옥 원반 내부에는 혈광 화신들이 수정벽 앞에 나란히 서서 원살 성조와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원살 수사께서는 건곤반으로 건너오기 싫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대로 각자 비행 보물을 끌고 이동하면 법력소모가 막대하다는 것을 아실 텐데요! 저는 급히 오느라 법력을 보충할 만한 단약을 얼마 지니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급한 대로 수하들에게도 구해보았지만 얼마 되지 않았고요.
그런데 앞서가는 인족 녀석은 얼마나 많은 단약을 지니고 있는지 아직도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수사가 이리로 넘어와 함께 보물을 조종하고 돌아가며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중간의 혈광 화신이 원살을 설득하려 했다.
“돌아가며 휴식을 취하는 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세 분이 석마전(石魔殿)으로 건너오시지요.”
남색 궁장 여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흔들림없이 답했다.
“안 되는 걸 알면서 그러십니다. 우리가 익힌 혈광대법(血光大法)은 석마족의 기운과 상극이라 그곳에서 휴식을 취해봤자 법력을 얼마 회복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원살 수사가 건곤반으로 오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요? 건곤반으로 넘어갔다 수사가 무슨 짓이라도 벌이면 제 목숨은 누가 보장해 준단 말입니까. 혈광대법이 다른 수사의 정혈과 법력을 흡수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또 그런 일을 한두 번 행하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걱정도 많으십니다, 원살 수사! 어차피 수사나 우리나 화신의 몸인데 그런 일을 벌였다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본체가 난처해질 뿐이라고요.”
또 다른 혈광 화신이 탄식했다.
“무슨 말을 하셔도 저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화신에 불과한 제 정혈과 법력에는 흔들리지 않더라도 한 가 녀석이 지닌 혼돈이기와 진마쇄가 합쳐진다면 수사가 어떤 마음을 품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호, 혼돈이기와 진마쇄라니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원살의 말에 혈광 화신들의 안색이 확 달라졌고, 순간 다른 화신들과 시선을 교환한 중간 화신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혈광 수사, 잔머리는 그만 굴리시지요. 그 녀석이 진마쇄를 갖고 황천지화에서 혼돈이기를 추출한 것은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진마쇄가 수사의 수중에 있을 거란 소문도 들어왔고요. 어째서 그 보물이 인족 녀석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삼대 화신까지 영계로 강림한 것은 바로 혼돈이기 때문일 테지요?”
“그렇다면 더 이상 속이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육극 수사와 다른 이들에게 고하기라도 하겠단 말입니까?”
혈광의 중간 화신이 어두운 얼굴로 인정했다.
“혼돈이기 같이 중요한 것을 어찌 다른 이들과 나눠 갖겠습니까! 제 조건은 간단합니다. 진마쇄와 혼돈이기 절반을 드릴 테니, 나머지 혼돈이기와 인족 녀석이 지닌 다른 보물들을 전부 제게 양보하십시오.”
원살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조건을 제시했다.
“욕심이 과하신 듯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석이 훔쳐간 자언정은 안 됩니다.”
중간 화신의 말소리가 서늘해졌다.
“자언정도 빼앗겼다고요? 그건 예상 밖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것까지 수사께 드리는 것으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이제 정식으로 동맹을 맺은 셈이군요. 이제 슬슬 녀석을 어찌 쫓고 있는지 공개해 줄 수 있겠습니까?”
거래가 성사되자 또 다른 혈광 화신이 질문을 던졌다.
“안다고 해도 똑같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하, 말씀을 해주셔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지 않겠습니까.”
원살의 말에 혈광 화신이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알고 싶으시다니 말씀드리지요. 당초 제가 인족 녀석의 화신을 잡겠다고 남았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합니다! 거기서 몇 개월을 머물다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녀석을 찾아내는 방법이 수사가 잡은 녀석의 화신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중간 화신이 관심을 보였다.
“대략 비슷합니다. 그곳에 있던 것은 인족 녀석의 또 다른 원영으로 이미 연허 후기에 이르렀더군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연달아 강력한 비술을 사용해 제가 오랫동안 쫓았음에도 결국 자폭해 수많은 분혼으로 달아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분혼들 중 하나를 잡았을 뿐이고요.”
“뭐라고요? 연허기 원영이 원살 수사의 손에서 달아났단 말입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또 다른 혈광 화신이 놀라 소리를 높였다.
“혼백을 분리하는 비술을 익히고 있는데다 각종 불가사의한 부적을 지니고 있어 제가 방심한 틈을 노리고 달아난 것을 어쩌란 것입니까? 달아난 잔혼들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해 보였습니다.
혈광 수사와 합류하지 않고 시간을 좀 들였으면 그 잔혼들마저 일일이 색출해 죽였겠지만 분혼 중 하나를 손에 넣어 그냥 돌아온 것입니다. 제가 수련한 마원대법 중에는 분혼을 이용해 본체를 추적하는 신통이 있으니까요.
다른 분혼이 없는 다음에야 혈광 수사가 이 방법을 똑같이 따라할 수는 없겠지요. 이 방법은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을 뿐이고 오차가 큰 것이 단점입니다.”
원살은 단숨에 할 말을 마쳤다.
“녀석의 분혼이 필요하다면 확실히 저는 비슷한 술법을 펼치지는 못하겠군요. 그럴 줄 알았으면 저도 그곳에 며칠 남아 녀석의 원영이나 쫓을 걸 그랬습니다.”
중간 혈광 화신이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그랬으면 인족 녀석은 벌써 감응 범위 밖으로 달아났을 겁니다.”
“하긴 어찌나 교활한지 우리 둘이 이렇게 오래 쫓고도 아직 잡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법력과 의식의 힘도 바닥을 드러냈을 테니 따라잡기만 하면 크게 반항하지 못할 겁니다.”
“그 말은 수사에게 이미 두 달 전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도 멀쩡하게 달아나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수사와 제가 곧 버티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원살이 입꼬리를 실룩하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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