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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51화 (908/2,000)
  • 1151화. 성동격서(聲東擊西)

    *

    산봉우리가 무너져 내린 자리에는 바람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파앗!

    두 시진 후, 폐허 구석에 서 있던 굵직한 고목(枯木)이 빛을 발했다. 고목은 흐릿하게 녹색 피부의 청년으로 변했다. 그는 나무 속성 영기를 내뿜는 영체 화신이었다.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온 영체는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머리 위로 녹색빛에 휩싸인 어린 여자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는 창백한 얼굴로 수결을 맺은 채 꼼짝 않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 아이의 얼굴에 약간의 혈색이 돌아왔다.

    “역시 주인님 말씀이 맞았어. 본래 초목이었던 영체의 몸을 이용해 나무나 돌에 숨으면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하셨는데. 이제 임무를 완수했으니 원래 계획대로 숨어 있다 주인님에게로 가야지! 주인님도 위기에서 벗어나셨어야 할 텐데…….”

    어린 여자 아이가 걱정 가득한 말투로 중얼거리다 다시 녹색 빛에 휩싸여 영체 안으로 들어갔다. 영체는 눈을 번쩍 뜨고는 소리 없이 몸을 띄워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 시각, 백여 명의 마족 정예병들이 거대 옥 원반을 중심으로 모여 산골짜기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거대 옥 원반은 새빨간 빛으로 산골짜기 곳곳을 비추며 탐색을 했다. 주술문자들이 어른거리는 새빨간 빛에서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

    옥 원반 속의 혈광 화신 셋은 나란히 서서 수결을 맺고 수정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여러 불구슬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골짜기 안을 뒤졌지만 풀과 나무 그리고 영성이 없는 야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 끝에서 하얀빛이 날아들었다. 원살이 조종하는 석전이었다. 석전이 옥 원반 인근에 멈추자마자 수정벽에 호리호리한 인영이 나타났다.

    “원살 수사, 드디어 오셨습니다!”

    중간에 선 혈광 화신이 여인을 보고 희색을 드러냈다.

    “쓸데없는 인사는 되었고, 그 녀석이 골짜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 확실합니까?”

    원살은 세 화신을 훑고 담담히 물었다.

    “제가 어찌 이런 일로 수사를 속이겠습니까. 추격당하던 놈이 갑자기 땅속으로 파고들어 토둔술을 펼쳐 달아나지 뭡니까. 그때 제가 건곤반을 이용해 땅을 봉쇄했으니 절대 달아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고명한 은신술을 썼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혈광 화신이 낭랑히 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제가 직접 마원대법(魔元大法)을 펼쳐 녀석을 끌어내겠습니다.”

    “우리 중 한 명이 수사와 함께 골짜기로 내려가 호법을 서지요.”

    마지막 혈광 화신이 입을 열었다.

    “호법이요? 그게 아니라 감시겠지요.”

    “허허, 오해십니다. 꾀가 많고 보물을 여럿 지닌 녀석이라 미리 대비하려는 것뿐입니다.”

    중간의 혈광 화신이 웃음을 흘렸다.

    “그러든 말든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딴마음은 품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혈광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수결을 맺어 사라졌다.

    “잘 되었다. 네가 가서 여인을 감시하고 녀석을 찾는 대로 우리에게 알리는 것으로 하자. 절대 원살의 손에 녀석을 넘겨서는 안 된다.”

    중간 혈광 화신이 미소를 지우고 또 다른 화신에게 말했다.

    “상황을 봐서 적절히 대처할 테니 걱정 마라. 녀석의 움직임으로 보아 절대 원살에게 쉽게 잡히려 들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녀석을 찾아내기 전에 절대 건곤반 금제를 풀면 안 돼.”

    나머지 화신이 고개를 끄덕이고 당부했다.

    * * *

    쿠르릉.

    석전 표면에 주술문자가 반짝이자 두 마리의 거대 석인으로 갈라졌다. 원살은 수결을 맺고 그 중 한 마리의 머리 위에 서서 천천히 산골짜기로 내려가고 있었다.

    휙!

    옥 원반에서 핏빛 그림자가 빠져나와 역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원살과 혈포 소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골짜기 속 돌무지 위에 내려섰다.

    “여기로 하지. 석 장로, 자네들은 변신을 하게.”

    “예, 원살대인!”

    원살의 명에 두 석인이 주위를 살피고 답했다. 그들은 땅을 쿵! 하고 굴러 회백색의 거대한 돌기둥으로 변했다. 표면에 기이한 문양과 주술문자들이 새겨져 있는 장승이었다.

    “석륜도등(石侖圖騰)! 수하들의 신통이 훌륭합니다.”

    혈포 소년이 그것을 보고 신기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석마족(石魔族) 중 열 손가락 안에는 드는 이들입니다. 이마저도 못한다면 제가 그리 오랜 세월 비호했겠습니까.”

    “하하, 하긴 저라도 수하 중에 석륜도등을 제련해낸 석마족이 있었으면 애지중지 했겠지요. 장승들은 마원대법의 위력을 증폭하기 위해 불러낸 것이겠군요.”

    “건곤반을 지닌 수사들도 한 가 녀석을 찾지 못했다면 마원대법이 통할지도 미지수입니다. 석륜도등으로 위력을 증폭하면 실수가 없을 겁니다.”

    원살은 지체 없이 두 장승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쿠릉!

    고풍스런 돌 제단이 지하에서 솟아 그녀를 높이 떠받쳐 올렸다. 여인이 길게 숨을 들이쉬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나머지 손으로는 열댓 개의 검은 깃발을 뿜어 돌 제단 주변의 바닥에 꽂아 넣었다.

    원살의 기합소리와 함께 그녀의 등 뒤로 삼두육비의 거대 마물 형상이 나타났다. 새까만 갑옷을 입은 마물 형상은 새빨간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웅!

    중얼중얼 주문을 외던 여인이 주변으로 열댓 개의 법결을 뿌리자 검은 깃발들이 진동하며 몸집을 키웠다. 이때 원살 등 뒤의 거대 마물 형상이 여섯 개의 팔을 쳐들었다. 마물의 손바닥에서 여섯 개의 검은 빛기둥이 떠올라 펑펑! 터지고는 검은 연기로 응집되었다.

    마운(魔雲)을 형성한 검은 연기가 꿈틀꿈틀 움직이며 날짐승과 들짐승의 모습으로 시시각각 변했다. 그 모습에 원살이 손가락을 뻗어 깃발들을 가리켰다.

    휘휘휘휙!

    검은 기운이 어린 깃발들이 검은 연기로 변해 솟구쳤다. 잠시 후, 마운이 미친 듯이 영역을 넓히며 산골짜기 전체를 뒤덮었다.

    원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늘한 눈빛으로 마운을 향해 정혈도 몇 모금이나 뱉어냈다. 핏물이 거꾸로 솟구치는 빗물이 되어 새까만 구름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우웅!

    이때 두 돌기둥이 오색 빛의 고리를 방출했고, 빛의 고리가 지날 때마다 마운이 더욱 짙고 두꺼워졌다. 잠시 후 검은 구름 속에서 엄청난 수의 까마귀들이 응결되었다.

    까악까악!

    온 천지가 까마귀 울음소리로 가득 찬 것 같았다.

    “가라.”

    원살의 명에 까마귀들이 산골짜기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여인은 손끝을 이마에 가져다 대고 묵묵히 감응을 했고, 혈광 화신은 까마귀 떼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까마귀들은 실체가 없는 존재라 돌산과 수목을 가리지 않고 닿는 족족 파고들어 내부를 살폈다. 결국 산골짜기 절반을 지하 천 장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아직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웅!

    원살이 까마귀들을 다른 방향으로 보내려는 찰나, 혈포 소년의 몸에서 무언가 진동했다.

    흠칫 노란 소년이 허리춤을 건드렸고 달걀 크기의 수정돌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혈광 화신이 나란히 수정돌에 나타났다.

    “어서 원살 수사와 함께 돌아와! 방금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또 다른 ‘한립’이 우리가 펼쳐 놓은 저지선을 연달아 돌파 중이다. 마존급 수하까지 둘이나 죽이고 천연성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다고 한다!”

    “현천잔보를 사용하고 서금충 떼를 부린다니 그 녀석이 진짜겠지. 골짜기에 숨은 것도 화신이었다! 명을 내려 녀석이 어디로 향하는지 감시하라고 했으니까 지금 쫓아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두 명의 혈광 화신이 열 받은 얼굴로 한마디씩 했다.

    “뭐라고? 원살 수사, 들으셨습니까. 바로 술법을 거두고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혈포 소년이 얼굴을 구기고 서둘러 돌 제단 위의 여인을 향해 소리쳤다.

    그 말에 원살은 눈을 뜨고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그것 역시 잘못된 정보일지 모르지 않습니까? 이곳에 공들여 술법을 펼쳐 놓았고 마무리하기 직전입니다. 산골짜기에 숨어든 것이 본체가 아니라 해도 생포하면 쓸 때가 있을 테니 먼저 가시지요. 이곳에 숨어 있는 녀석을 잡은 다음 따라가겠습니다.”

    “원살 수사의 뜻이 그렇다면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겨우 화신이 그리 위험할 리도 없고요. 허나 본체는 상대하기 까다로우니 일을 마치는 대로 합류해 주시지요.”

    “걱정 마십시오. 화신을 잡아 어떻게 쓸지 수사도 곧 알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병력을 절반만 남겨 놓고 수사의 명에 따르라 분부를 내려놓겠습니다. 약삭빠른 화신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혈포 소년의 마지막 말에 원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소년은 핏빛으로 변해 고공으로 날아올라 옥 원반으로 돌아갔다. 옥 원반이 사라지자 동시에 괴이하게도 그 주위에 포진해 있던 정예병 절반도 종적을 감추었다.

    남은 백여 명의 마족을 이끌고 연허 후기의 마족 병사가 아래로 내려왔다.

    “원살 대인, 어떤 분부든 제게 말씀해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됐다, 너흰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족하다.”

    “존명!”

    여인의 말에 고계 마족이 허리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백여 명의 정예병들이 제단 주위로 흩어지고 원살은 다시 눈을 감았다.

    까악! 까악! 까악!

    산골짜기 절반의 수색을 마친 까마귀 떼가 다른 방향으로 몰려들었다. 이번에는 낮은 관목 숲 주위로 까마귀 떼가 몰려들어 날카롭게 울기 시작한 것이다.

    “찾았다!”

    원살이 기쁨에 차 제단을 박차고 날아올라 관목 숲으로 향했다. 동시에 관목 숲에서 보랏빛이 번졌다. 왜곡된 보랏빛 허공에서 튀어나온 검은 빛줄기가 빠르게 달아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그것을 본 원살이 지체 없이 손을 뻗었고 주변을 배회하던 까마귀들이 부나방처럼 몰려들었다. 한두 마리는 별 것 아니었지만 수백 수천 마리가 마구 충돌해오자 검은 기운도 본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한립과 똑같은 얼굴을 한 새까만 원영이 짙은 마기를 머금고 떠있었다. 한립의 제2원영이었다.

    제2원영의 수행은 주 원영보다는 떨어졌지만 쉼 없이 법력을 증진하는 단약을 복용하고 광한계에서 기연을 얻은 탓에 이미 정순한 마공으로 연허기에 이르러 있었다.

    원영은 잠시 멈춰서긴 했지만 달려드는 까마귀 떼를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두 팔을 펼쳤다.

    휭!

    검은 바람이 일어 칠흑 같은 마기가 검은 구렁이 두 마리로 변해 까마귀 떼를 덮쳤다. 구렁이들이 머리와 꼬리를 펄떡이며 까마귀 떼를 처리했다.

    제2원영이 그 틈을 뚫고 재빨리 날아가려는데 하얀빛이 번득이고 머리 위로 원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릉!

    그녀의 손이 아래쪽을 가리키자 하얀 거대 손이 나타났다. 성조 화신인 그녀의 신통에 제2원영을 막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한립의 마영(魔嬰)은 미리 생각해 둔대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을 썼다.

    퍼펑!

    검은 그림자로 뭉쳐진 원영이 스스로 폭발해 열댓 덩이의 검은 화염으로 튀어나갔다.

    쉬쉬쉬쉭!

    새까만 소인(小人)들이 괴이하게 저 멀리 나타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딜 가려고!”

    원살이 눈을 치켜뜨고는 기괴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거대 손이 폭발해 하얀 기운이 퍼져 나갔다.

    휘휘휘휘휙!

    수많은 수정빛들이 쏘아져 나가 열댓 명의 검은 소인들을 쫓았다. 순간이동을 하려던 검은 소인들을 하얀 수정빛들이 빠르게 관통했다.

    퍼퍼펑!

    단 한 명의 소인만이 어깨를 비틀어 그것을 피하고 나머지는 수정빛에 맞아 검은 화염으로 사라졌다. 놀랍게도 나머지는 허상들이었다.

    제2원영은 환술이 파훼되자 안색이 급변해 입에서 피를 토해내고 바람처럼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핏빛 안개가 일어나 제2원영을 감쌌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원살이 코웃음 치며 얼른 핏빛 안개를 향해 소매를 털었다. 새까만 실이 소매 속을 빠져나와 안개를 가른 순간, 그 안에서 핏빛 둔광이 튀어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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