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150화 (907/2,000)
  • 1150화. 잔꾀

    *

    일다경 후 전투가 벌어졌던 허공에 옥 원반과 석전이 날아들었다. 빛줄기가 빠져나와 호리호리한 몸매의 원살과 핏빛으로 둘러싸인 혈광 화신으로 변했다.

    주변을 훑은 그들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남색 궁장 차림의 여인의 눈빛은 분노로 번득였고, 혈포 소년의 청수한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혈광정위로도 막을 수 없다면 잡는데 아주 골치가 아프겠습니다!”

    혈광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수사의 호위들은 불사체라 들었는데 겨우 영충들에게 몰살당했군요. 너무 약해 빠진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원살이 싸늘히 대꾸했다.

    “영충의 정체를 알아챘으면서 괜히 비아냥거리지 마시지요! 제 호위병들이 혈신마공(血身魔功)을 익혔다 해도 어찌 상고 흉충 떼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허나 십만 마리 이상이면 몰라도 겨우 수천 마리로 우리를 어쩔 수는 없습니다. 목석(木石) 류의 보물로 가둬버리면 그만인 것을요.”

    “저도 목석 류의 보물이라면 두어 가지 지니고는 있습니다. 허나 정말 저 녀석이 고작 서금충 수천 마리만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십여 만 마리만 동시에 방출해도 저는 상대할 자신이 없습니다. 저 녀석이 아직 얼마나 많은 필살기를 감추고 있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궁지로 몰아가다가 괜히 양패구상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입니다.”

    혈광이 입을 비죽이며 대꾸했다.

    “걱정도 많으십니다. 저 녀석이 그렇게 많은 영충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부릴 만큼 의식이 따라 주겠습니까? 서금충 십여 만 마리면 저나 수사가 본체로 강림해도 순식간에 의식의 힘을 소모할 수 있는 양입니다. 그렇게 쉽게 우릴 상대할 방법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달아나지는 않았겠지요.

    물론 녀석의 신통이 만만치 않으니 조심해야겠지만 설마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저 혼자 쫓을 것이니 저 녀석이 인족 거점으로 되돌아가는 길목만 막아주십시오.”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포기하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원살 수사께서 그리 자신이 있으시다니 저도 끝까지 함께 하지요.”

    한립에게 중요한 보물을 두 개나 빼앗긴 그가 어찌 쉽게 추격을 포기하겠는가.

    “하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이곳의 성족 대군을 통솔한다고 마음대로 병력을 이동해 저 녀석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 전황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여인이 미간을 좁히고 짜증스레 물었다.

    “허허, 다름이 아니라 인족 수사를 쫓는 일이 장기전이 될 것 같은데 육극 수사 쪽에 정예병을 지원해 달라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수사와 육극 수사 사이에 그 정도 부탁은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육극의 병사를 지원받는 것도 괜찮은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다만 지원이 오기 전까지 반드시 녀석의 퇴로를 봉쇄해 쉴 틈을 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인은 눈을 반짝이며 뜻밖에도 혈광의 제안을 수락했다.

    “안심하십시오, 원살 수사! 천연성과 몇몇 인족 거점으로 가는 길목은 최대한 병력을 배치해 두었으니 절대 다른 인족 수사들과 합류할 수 없을 겁니다.”

    혈광이 기뻐하며 장담했다.

    “잘 되었군요. 육극의 병사들이 오기 전까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쫓으면 되겠습니다. 녀석이 지칠 대로 지쳤을 때 따라잡아 한 번에 처리하지요.”

    “허허, 물론입니다. 우리의 수행과 신통에 그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럼 이제 움직입시다! 녀석이 달아나는 속도가 빨라 잠깐 사이에 감응 범위를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걱정 말고 출발하시지요. 앞쪽에 일곱 부대 정도 배치를 해두었으니 그중 몇 개만 마주쳐도 녀석의 행보는 상당히 지체될 겁니다.”

    혈광이 교활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마쳤고 그들은 석전과 옥 원반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자 영기의 빛이 흐르며 석전과 옥 원반이 휘잉!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같은 시각, 한립은 침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두 달 동안 추격을 당하면서 상대의 대략적인 전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간 3, 40번이나 적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저계 마족과 마수들인 경우도 있었고 마족 정예병들인 경우도 있었다.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 볼 규모의 기습이지만 뒤쪽에서 강적이 호시탐탐 지켜보는 상황에서 한가롭게 싸울 수만은 없었다.

    그 결과 그의 법력과 의식은 빠르게 소모되었고 수많은 영력 보충용 단약이 없었다면 진작 큰일 났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낭패였다. 법력은 5할 미만에 서금충을 부린 탓에 의식의 힘도 절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히 뒤쫓는 자들이 그가 연달아 사용하는 놀라운 신통을 꺼리는지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한립은 수시로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 추격을 따돌리려 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추적과 은신에 뛰어난지 그가 머리를 쥐어짜 실행한 방법들을 간단히 해결하고 다시 따라붙고는 했다.

    그를 쫓는 이가 한 명이었으면 상대가 소홀한 틈을 타 달아날 수도 있겠지만 두 명이 힘을 합쳐 협력하고 있으니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천연성으로 다가갈수록 앞을 가로막는 적들의 출현이 빈번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내가 천연성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알고 병력을 배치해 두었다니, 천연성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먼저 법력이 고갈되겠어.’

    한립은 단약을 억지로 연화시켜 법력을 보충하면서 생각했다.

    “다른 방향도 막고는 있을 테지만 여기보단 배치된 인원이 적을 테지. 이번에는 거대한 미혼진(迷魂陣)을 펼쳐 최대한 가는 방향을 숨겨야겠다.”

    한립은 바로 구체적인 방법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다급해져서인지 번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 * *

    뒤따르던 옥 원반 속 세 명의 혈광 화신들이 복구된 수정벽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중 두 명은 눈을 감고 정기를 비축하고 한 명만 뚫어져라 수정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엇!”

    세 번째 화신이 소리를 내자 다른 두 명이 눈을 번쩍 떴다.

    거대 붕새가 돌연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둔광을 멈추고 수결을 맺고 있었다. 청년은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8개의 똑같이 생긴 ‘한립’으로 변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본 좌에게 이런 잔꾀가 통할 줄 아느냐!”

    혈광 화신 중 하나가 서늘하게 외치고 수결을 맺어 등 뒤로 검은 마물 허상을 불러냈다.

    크헤에에엑!

    머리에 두 개의 뿔이 자라난 마물은 등에 자라난 거대 촉수들을 휘적거리며 끔찍한 괴성을 질러댔다. 마물의 가슴에 핏빛 실선이 생겨 거대한 눈으로 변했다.

    마물의 가슴을 절반이나 차지한 커다란 눈에서 짙은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번득였다.

    파앗!

    혈광 화신의 기합소리에 맞춰 눈동자에서 짙푸른 빛줄기가 쏘아져나가 수정 벽으로 스며들었다.

    “둘은 실체이고 여섯은 허상이다. 본체와 저놈의 화신이겠지. 둘 다 원래와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다.”

    혈광 화신이 확신에 차 말했다.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고 다시 숨으려는 모양인데 건곤반의 속도를 높여 추격한다!”

    또 다른 핏빛 그림자가 음산히 소리쳤다.

    “물론 그래야겠지. 그런데…….”

    마지막 혈광 화신이 고개를 끄덕이고 무어라 하려는데 수정벽이 돌연 원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실체를 각자 하나씩 맡지요. 본체를 찾으면 즉시 알려주는 것으로 하고요.”

    여인은 연락이 닿자마자 무표정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수사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혈광 화신 중 하나가 바로 답했다. 원살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를 펄럭이자 그녀의 모습이 뿌옇게 사라졌다.

    동시에 석전이 우웅! 하고 크게 울부짖으며 주술문자를 방출해 아래에 거대한 전송진을 만들었다. 전송진이 빛을 머금자 석전의 모습이 사라졌다.

    “우리도 간다!”

    혈광 화신 중 하나가 외쳤다. 화신들은 동시에 수결을 맺어 핏빛을 크게 일으켰고, 옥 원반은 눈부신 하얀 빛덩이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한립들은 둔술을 펼치거나 비행 법기를 이용해 벌써 하늘 곳곳으로 달아난 후였다. 그가 원래 가려던 방향에 천 명이 넘는 마족 정예병들이 매복해 기다리다가 갑자기 전달된 명을 받고 벌떼처럼 행동에 들어갔다.

    마족 병사들은 둘로 나뉘어 두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한립이 원래 머물던 자리는 마족 정예병들은 물론 원살과 혈광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일다경이 흘러 ‘한립’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 자리에 보라색 빛이 반짝이고 은빛의 희미한 인영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또 한 명의 ‘한립’이었다.

    한립은 기운을 숨기고 있다가 두 눈을 감고 의식을 방출해 주변에 마존급 존재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희색을 드러냈다.

    얇은 가죽을 꺼내 몸에 두른 그는 땅을 박차고 올라 회색 거대 늑대로 변해 떠올랐다. 거대 늑대가 연한 회색 빛줄기를 일으켜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천연성 방향이었다.

    * * *

    한식경 후, 울창한 밀림 위에서 한립이 푸른 둔광으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그 뒤를 석전 하나가 기세등등하게 쫓고 있었다.

    이때 전방에 거대한 산봉우리가 나타났고 그것을 본 ‘한립’은 기쁨에 눈을 빛냈다. 곧장 산봉우리로 몸을 날린 그는 괴이하게 사라졌다.

    휘웅!

    석전이 산 정상에 도착해 천천히 그 주위를 배회하다가 주술문자를 분출했다. 그러자 아래쪽으로 커다란 빛의 진법이 나타났고 오색 진법 중앙에 거대한 빛구슬이 맺혔다.

    웅!

    진법이 진동하자 빛구슬이 그대로 산봉우리로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빛구슬은 소리 없이 산봉우리를 파고들어 새까만 구멍을 뚫었다.

    잠시 후 산봉우리 깊은 곳에서 폭음이 울렸다. 수많은 빛기둥들이 산봉우리를 뚫고 나와 녹음이 푸르던 산 하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콰르르!

    휘청거리던 산봉우리가 결국 무너져 내렸다. 수많은 암석과 돌조각들이 굴러떨어져 흙먼지가 자욱한 폐허가 되고 말았다.

    폐허 중간까지 아까 보았던 검은 구멍이 이어져 있었고 밑으로 한참 더 파여 있는 듯했다. 빛구슬이 떨어져 내린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공의 빛의 진법이 또 한 번 기운을 방출해 폐허 더미를 관통했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때 석전이 서서히 하강하며 원살이 하얀 빛으로 변해 빠져나왔다.

    “분명 산속으로 숨어들었으니 살아남지 못했겠지? 이렇게 쉽게 죽은 것으로 보아 화신이 틀림없구나. 그런데 아무리 화신이라도 잔해는 남아 있을 텐데 공격이 명중해 시체도 남아 있지 않단 말인가.”

    여인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중얼거리며 손끝으로 자신의 미간을 짚고 눈을 감았다. 방대한 의식이 힘이 파도처럼 밀려나가 사방을 훑었다. 꼼꼼하게 폐허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괜한 의심을 했나보군.”

    그녀는 눈을 뜨고 더 이상 폐허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몸에서 기이한 파동이 느껴졌다.

    원살은 소매 속에서 검은 거울을 방출했다. 거울은 여인의 머리 위를 선회하다 멈춰서더니 혈포 소년의 얼굴을 비추었다.

    “원살 수사, 그쪽은 더 이상 쫓을 것 없습니다! 십중팔구 화신에 불과할 테니까요. 제가 쫓는 녀석이 가로막는 병사들을 격살하고 단번에 포위를 3겹이나 돌파해 도망갔습니다. 강력한 신통으로 보아 진짜는 이놈이겠지요. 다행히 건곤반을 이용해 한 곳으로 몰아두었는데 이상한 은신술을 사용해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셋은 보물을 조종해 주변을 봉쇄해야하니 수사가 와서 도움을 주셔야겠습니다.”

    “그쪽에 진짜가 있다고요?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쫓는 녀석은 이미 해결한 참입니다. 바로 합류하지요.”

    혈광 화신의 말에 여인은 의심을 거두고 검은 거울을 거둬 몸을 날렸다. 그녀는 하얀 빛줄기로 변해 석전으로 돌아가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