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9화. 손을 잡은 강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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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한립은 그의 두 원수들이 손을 잡은 것도 모르고 열심히 날아가고 있었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에 혈광성조 화신들과 싸우느라 구비해둔 임시진법은 물론 각종 부적들을 거의 다 써버렸고, 뒤쫓는 마족 여인과 겨뤄보지 않아 신통과 수행이 어떠한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우선 저 마두의 실력을 알아내야 한다.’
한립은 거대 붕새의 몸에 있는 깃털을 흩뿌렸다. 깃털들이 부적과 진법 법기로 변해 그의 뒤로 열댓 개의 크고 작은 진법 함정들로 변했다.
한립은 빠르게 전진했지만 뒤쪽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폭음을 들었다. 게다가 진법들과의 의식 연계도 속속들이 끊어졌다.
한립은 인상을 찡그렸다!
진법을 파훼하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여인의 실력은 평범한 마족 존자를 훨씬 넘어섰고 혈광의 세 화신과도 비슷했다. 게다가 여인의 기운과 분위기가 무척 익숙했다.
‘정말 그 자의 화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인계에서 분혼을 살해당한 원수를 갚으려고 자신을 쫓는 것이라면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여인의 기운이 인계에 봉인되어 있던 원살성조 분혼과 비슷하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상대가 자신과 원한이 있는 마족 성조의 화신일지 모르는데 여기서 멈춰서 전면전을 펼칠 수도 없었다. 한립이 변한 거대 붕새는 법력을 더욱 끌어 올려 미친 듯이 하늘을 갈랐다.
순간이동을 해서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대신 석전은 일반 비행 법기보다 훨씬 많은 법력을 소모할 것이 분명했다. 시간을 끌면 불리한 것은 상대였다.
그는 전력을 다해 달아나는 데만 집중했다.
이후 한립은 더 이상 다른 시도를 하지 않았고 수시로 단약을 삼키며 극품 영석을 쥐고 법력을 보충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석전은 일정 거리마다 순간이동을 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결국 둘 사이의 추격전이 보름이나 이어졌다!
한립이 막 황무지와 샛노란 사막을 지나 관목으로 둘러싸인 습지 위로 들어섰다. 하늘 위에는 둥실 떠다니는 하얀 구름과 태양밖에는 없었다.
그를 뒤쫓는 석전의 순간이동 횟수가 점점 줄어들자 기뻐하고 있을 때 머릿속에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님, 조심하세요! 앞쪽에서 적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앳된 사내아이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한립이 둔광을 멈추고 서둘러 물었다.
“넌 누구지? 혹시…….”
“주인님, 저 표린입니다! 방금 깨어났는데 다시 깊은 잠에 들것 같아요. 앞쪽에 주인님께 악의를 품은 자들이 숨어 있어요.”
사내아이는 조급하게 몇 마디만을 남기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표린수? 앞에 적이 있다고?”
표린수는 암수왕의 요핵(妖核)을 연화시키고 깨어났다가 그가 합체기에 이룬 후로 갑자기 깊이 잠들었다. 영수 본체의 수행이 중요한 길목에 이르자 잠을 통해 힘을 비축해 경지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런 표린수가 갑자기 깨어나 사람을 말을 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영수가 언급한 적의 기운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한립은 아직 어떤 이상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 붕새가 눈을 부릅뜨고 재빨리 주위를 살피며 방대한 의식을 퍼트렸으나 의심 가는 곳이 없었다. 이때 신비한 법기 속에서 세 개의 핏빛 인영이 나란히 서서 거대한 수정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뿌연 거대 수정벽 표면에 뇌전을 휘감은 은색 거대 붕새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대 붕새가 금색 눈으로 요리조리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흐흐, 원살이 쫓는 인족 수사가 저놈일 줄이야! 공들여 찾을 때는 보이지 않더니 일이 쉽게 풀리겠어!”
중간의 핏빛 그림자가 음산하게 웃음을 흘렸다.
핏빛 그림자는 청수한 얼굴의 혈포 소년이었다.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원살이 내건 조건을 잊은 건 아니겠지?”
또 다른 핏빛 그림자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흥, 원살이 원하는 자와 우리의 목표가 같다면 당연히 거래 조건도 바뀌어야지. 저놈을 넘기기로 한 거지, 지니고 있는 보물까지 내주기로 하지는 않았잖아?”
중간 소년이 냉소하며 답했다.
“아니, 그럼 원살이 가만있지 않을 거다. 보물도 일부 나누어주되 진마쇄와 자언정은 반드시 우리가 회수해야 해.”
두 번째로 입을 연 핏빛 그림자가 고개를 저었다.
“인족 녀석이 지닌 보물 중에도 쓸 만한 것이 많던데 아깝지 않겠어?”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원살 뒤에는 육극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돼. 지금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때가 아니라고.”
“하긴 육극이 성가시기는 하지…….”
두 번째 핏빛 그림자의 말에 중간 소년이 얼굴을 굳혔다.
“우선 저 녀석을 붙들고 나서 이야기들 하라고. 아무래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아. 매복해서 기습하는 건 안 되겠어.”
마지막 핏빛 그림자가 신중하게 입을 뗐다.
“우릴 발견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건곤반으로 기운을 감쪽같이 숨겨 대승기 수사라 해도 눈치채기 쉽지 않을 거라고! 기껏해야 의심하는 정도일 테니 원살이 뒤쫓는 상황에서 가만히 서있지는 못할 테지.”
중간 소년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수정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가? 내 느낌에는……. 이런, 저 녀석이 뭘 하는 거지?”
마지막 핏빛 그림자가 고개를 저으며 무어라 말하려다 소리를 높였다. 다른 두 소년도 수정벽에 비친 한립의 행동에 안색이 급변했다.
거대 붕새가 돌연 입을 벌려 금빛 찬란한 뇌전 구슬을 분출했기 때문이다. 커다란 뇌전 구슬은 세 소년이 숨어 있는 방향으로 날아들어 폭발했다. 뇌전이 가닥가닥 그물을 이루었다.
콰르릉!
수정벽에 금색 뇌전이 흐르고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정말 건곤반을 알아차렸잖아! 이쪽으로 유인할 수 없다면 우리가 움직여야겠다.”
중간 소년의 말에 나머지 둘도 반대하지 않고 수결을 맺었다. 주술소리와 함께 금색 뇌전 그물 안에서 희끄무레한 물건이 나타났다! 옥쟁반을 닮은 거대한 보물이었다.
하얀빛을 번뜩이는 원반의 크기로 보아 한립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날아갔으면 십중팔구 상대의 금제 속에 갇혔을 것이다.
거대 옥 원반이 빙글빙글 돌며 두꺼운 하얀색 빛의 장막을 끝도 없이 펼쳤다. 그의 경로를 완전히 막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거대 붕새가 급작스레 허공에서 몸을 굴렸다. 현란한 빛이 터져 나오고 은색 거대 붕새가 있던 자리에 낯선 거대 새가 나타났다.
전설 속의 진령 천봉(薦奉)과 닮은 새였다. 경칩결을 발동해 천봉 화신으로 변신한 한립이 맑게 울며 날개를 펄럭였다.
거대 새 앞에 공간파동이 일고 하얀 균열이 나타났다. 거대 새는 즉시 그 안으로 몸을 던져 하얀 빛의 장막 뒤에서 공간균열을 빠져나왔다.
콰릉!
은색 뇌전이 거대 새를 휘감았고, 한립은 다시 은색 거대 붕새로 변신했다. 네 개의 날개를 펄럭인 붕새가 폭음을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다.
멀리서 한줄기 은색 뇌전으로 모습을 드러낸 붕새는 청백색(靑白色) 빛의 실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
옥 원반 속 혈광성조 화신들은 어안이 벙벙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건곤반 금제를 순간이동으로 빠져나갔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건곤반을 억제하는 보물이라도 지니고 있다는 소리인가?”
핏빛 그림자 하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화가나 펄쩍 뛰었다.
“아니, 저놈의 변신술 때문이다. 건곤반이 제아무리 현묘한 금제를 펼칠 수 있어도 천부적으로 공간을 깨는 힘을 지닌 봉황을 가둘 수는 없는 법이니까. 녀석은 천봉으로 변신해 달아난 게 틀림없어.”
중간 소년이 냉정하게 분석했다.
“이렇게 다양한 변신술을 쓸 수 있다니! 원살과 힘을 합쳐도 잡지 쉽지 않겠어.”
마지막 핏빛 그림자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하늘 저쪽에서 웅장한 석전이 나타나 쾌속으로 날아들었다.
“출발! 일단 녀석을 쫓는다!”
“그래, 저 녀석이 달아나게 둘 순 없지!”
중간 소년의 말에 다른 화신들도 동의했다. 그들은 핏빛 기운을 일으켜 하나로 연결하고는 거대한 옥 원반 속으로 법력을 불어넣었다.
우웅!
원반에 주술문자가 흐르자 옥 원반이 하얀 빛덩이로 변해 급히 날아갔다. 그들과 십여 리 떨어진 곳, 석전 안 돌 의자에 앉은 원살의 표정이 구겨졌다.
“쓸모없는 것들! 화신 셋이 매복까지 했으면서 저놈 하나를 막지 못해? 내가 나서야지 안 되겠구나.”
여인이 성을 내며 석전의 속도를 높여 그 뒤를 쫓았다. 맨 앞에서 날아가는 한립도 속이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옥 원반 속에 있는 적을 정확히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보물을 발동할 때 희미하게 번진 핏빛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했다.
‘동시에 두 명의 마족 성조 화신들에게 쫓겨야 하다니!’
한립은 확실히 싸울 마음을 버리고 거대 붕새의 모습으로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 * *
이틀 후, 은색 거대 붕새는 수십 명의 중계 마족들에게 포위를 당했다. 입에서 마기를 분출하는 마족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대 붕새를 공격했다.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거대 붕새의 몸에서 금색 뇌전이 튕겨 나가 마족 병사들을 재로 만들어버렸다. 거대 붕새는 머뭇거리지 않고 네 날개를 펄럭여 날아올랐다.
휘잉!
일다경이 지나 나타난 옥 원반과 석전이 바람 소리를 내며 그 자리를 지나쳤다.
* * *
닷새 후, 백여 명의 마족이 천 마리가 넘는 저계 마수들을 부려 은색 거대 붕새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붕새가 마수 무리를 파고들어 온몸에서 푸른 검기를 뿌려댔다. 저계 마수들은 물론이고 마족 병사들까지 검기에 조각나 죽어나갔다.
거대 붕새가 지나는 길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때, 옥 원반과 석전은 천여 리 뒤에 있었다.
* * *
열흘 후, 어둑한 산맥 상공에서 금털 원숭이가 맨손으로 수백 명의 마족 정예병들과 열댓 마리의 초대형 마수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거원의 두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족과 초대형 마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순식간에 병력이 절반으로 줄었지만 그들은 거원의 앞을 가로막고 도망치지 않았다.
수천 리 밖의 하늘에서 하얀빛 두 덩이가 나타나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금털 원숭이의 분노에 찬 포효에 금빛 음파가 퍼져나갔다.
퍼퍼퍼퍼펑!
허공을 왜곡시키며 밀려든 음파에 휩쓸린 나머지 마족 정예병들과 마수들이 연달아 폭발해 죽음을 맞이했다. 거원은 맹렬히 땅을 박차 은색 붕새로 변해 다시 날아올랐다.
* * *
보름 후, 사람이 모습으로 돌아온 한립이 이름 모를 호수 위에 떠서 기이한 형태의 마족 존자 두 명을 노려보았다.
양손에 물갈퀴가 달려있었고 무릎 아래로는 거대한 촉수들이 자라난 마족과 삼지창을 들고 푸른 비늘로 뒤덮인 마존이었다.
한립은 한숨을 쉬며 양손을 교차해 푸른색과 검은색 산봉우리를 방출했다. 두 산봉우리가 마존들을 향해 쇄도할 때, 만여 리 밖에서 옥 원반과 석전이 앞 다투어 그가 있는 방향으로 속도를 높였다.
* * *
두 달 후, 열기가 피어오르는 이상한 늪지대 위에서 은색 거대 붕새가 열댓 명의 핏빛 마족과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붕새가 은색 뇌전을 아무리 쏘아 보내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갈가리 찢어도 핏빛 마족은 불사의 몸을 지녔는지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달려들었다.
시간이 지연되자 천여 리 밖 허공에서 옥 원반과 석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은 화신들이 따라붙은 것을 감지하고는 낮게 기합을 넣고 거대 붕새의 몸에서 금색 꽃잎들을 흩날렸다.
웽웽웽웽웽!
꽃송이 하나하나가 바람을 타고 커다랗게 불어났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딱정벌레들은 수천 마리가 넘는 성체 서금충들이었다.
불사의 몸을 지닌 핏빛 마족들은 수천 마리 서금충들이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갉아 먹어버렸다. 거대 붕새는 영충을 회수하고는 날개를 펄럭였다.
은색 뇌전으로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진 거대 붕새는 몇 번 번득이다 종적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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