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8화. 석전(石殿)
*
하얀 안개가 걷히자 호리호리한 신영이 소리 없이 나타나 그를 냉랭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한립은 바늘에 찔린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인족 수사의 혼백에서 알아낸 정보가 맞았구나. 과연 네 녀석이었어!”
한립은 상대의 정체를 몰랐지만 고계 마족은 그를 알고 있는 듯했다. 무척 의아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여인이 그를 찾아온 연유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서둘러 삼두육비 금신법상을 불러들였다. 여인이 그것을 보고 움찔하더니 목함과 푸른 기운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진마쇄! 혼돈의 기운! 이곳에서 무얼 하나 했더니 혼돈의 기운을 취하고 있었구나!”
여인은 말을 하면서 동시에 소매를 펄럭여 하얀 비단 손수건을 뿜어냈다. 하얀 손수건은 먼 거리를 뛰어넘어 금빛법상 위에 나타났다.
은빛 주술문자가 가득한 손수건은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보물 같았다.
쿠릉! 쿠릉!
갑자기 한립이 앉은 구덩이 가장자리가 흔들리며 암석으로 이루어진 회백색 거대 손이 솟아올라 양쪽에서 날아들었다.
돌 손바닥들이 닿기도 전에 무형의 압력이 밀려들어 그를 짓눌렀다.
“터져라.”
그러나 그는 허둥대지 않고 차분히 수결을 맺고 중얼거렸다. 그의 주술에 목함과 혼돈이기를 감싸고 있던 금빛이 맹렬히 반짝이며 폭발했다.
금빛 광채가 퍼지는 곳마다 허공이 왜곡되었고 하얀 손수건이 날아드는 속도도 순간적으로 느려졌다.
그 틈을 타 녹색 거대 손이 번개처럼 목함과 푸른 기운을 낚아채 녹색 그림자로 변했다. 영체 화신인 녹색 피부의 한립이었다. 영체는 모습을 드러낸 순간 수결을 맺어 푸른빛으로 소실되었다.
그때 한립의 몸에서 금색 털이 자라나고 몸이 부풀어 거대한 원숭이로 변했다. 금털 거원은 변신을 마치자마자 으르렁거리며 두 주먹을 양옆으로 뻗었다.
뻑! 뻑!
거원의 주먹과 돌 손바닥의 충돌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거원은 뒷걸음질 쳤고 두 개의 돌 손바닥은 일부가 부서져 흩날렸다.
이때 거원 뒤로 공간 파동이 일며 흐릿한 녹색 그림자가 목함과 푸른 기운을 품고 나타났다. 녹색 그림자는 재빨리 거원의 몸속으로 뛰어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크아앙!
거원은 허공의 여인을 향해 입에서 금색 빛줄기를 뿜어냈다. 그러곤 빙글 돌며 은색 거대 붕새로 변해 네 개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은색 뇌전이 피어오른 거대 붕새는 빛의 실로 변해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법력을 크게 소모한 상태로 수행을 알 수 없는 여인과 맞닥뜨렸으니 승산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지난번 혈광 셋이 그를 쫓았지만 한동안 따라잡히지 않았다. 그만큼 달아나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여인이 새까만 검기를 날려 금색 빛기둥을 없앴을 때 그는 이미 까만 점처럼 보였다.
“본 좌의 눈에 띄고 그리 쉽게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여인이 아래쪽으로 손을 펼쳤다.
쿠릉!
땅속에서 거대 석인들이 튀어나와 그녀의 법결을 흡수했다. 그러자 석인들은 거대한 회백색 빛구슬로 뭉쳐져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검은 빛줄기로 변한 여인은 회백색 빛구슬로 몸을 날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파앗!
빛이 가시고 그 자리에 돌로 만든 전각이 나타났다. 열댓 개의 기둥이 우뚝 솟은 거대 전각은 만황시대 특유의 기풍이 가득했고 여인은 그 한가운데에 서서 발을 굴렀다.
“쫓아라.”
거대 전각은 하얀 기운을 일으켰고 별똥별처럼 길게 꼬리를 남기며 한립을 뒤쫓았다.
석전(石殿)은 투박한 겉모습과 달리 발동하자마자 먼 거리를 뛰어넘어 한립이 변한 거대 붕새와 엇비슷한 속도를 냈다.
한립은 그것을 감지하고 흠칫 놀라 더더욱 따라잡히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혼돈의 기운을 얻느라 기력을 쇠한 그가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한립은 여인에게서 위험한 기운과 어딘가 익숙한 기운을 감지했다.
한립은 거대 붕새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지금은 전력을 다해 둔술을 펼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석전과 거대 붕새의 엄청난 속도에 그들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한립은 그동안 석전을 수십 리나 따돌렸다.
한립은 조금씩 거리가 멀어지자 안심하며 여인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석전 속에 있던 남색 궁장 여인은 돌 의자에 앉아 거대 붕새가 날아가는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계에서는 개미만도 못하던 것이 천년 만에 합체 중기에 이르러 저런 변신술까지 쓰게 될 줄이야! 허나 겨우 그 정도로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석감, 이제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겠지? 저 녀석의 위치를 포착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주었으니 말이야.”
그녀가 중얼거리다 날카롭게 명을 내렸다.
“예! 당장 전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전송 위치에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으니 대인께서는 주의하셔야 합니다!”
윙윙거리는 목소리가 석전 천장에서 들려왔다. 천장의 암석이 꿈틀거리며 조악한 석인의 얼굴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상관없네. 당장 전송을 시작하게!”
“존명!”
이번에는 거대 얼굴도 군말 없이 명을 받들었다. 쾌속으로 날아가던 석전이 우뚝 멈춰 서더니 두 개의 목소리가 기괴한 주술을 읊자 석전 표면에 오색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떠올라 빠르게 퍼져나갔다.
파앗!
아래쪽으로 밀려든 주술 문자들은 오색 진법을 형성한 순간 자취를 감추었다. 열심히 날개를 펄럭이며 나아가던 한립은 공간 파동을 느끼고 고개를 홱 돌렸다.
머지않은 곳에 주술문자로 이뤄진 전송진이 떠올라 빛을 분출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거대한 무언가가 빠져나오려 했다.
“이런!”
순간이동과 진법에 정통한 그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왜 모르겠는가. 거대 붕새가 날갯짓을 멈추고 미간 사이에서 검은빛을 번득였다.
붕새의 이마에 제3의 눈이 나타났다. 오랜 세월 배양한 파멸법목을 강제로 불러낸 것이다. 합체기에 이르기 전에는 감히 시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파멸법목이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리며 검은 실을 분출했다. 그러자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실이 굵은 빛기둥으로 변해 허공으로 침투했다.
콰앙!
검은 빛기둥이 전송진 지척에서 나타나 폭발을 일으켰다. 검은빛과 오색 기운이 얽혀 전송진을 뒤덮었다.
한립은 즉시 이마의 제3의 눈을 거두고 네 날개를 펄럭여 쏘아져나갔다.
과연 폭발로 인한 빛이 가시고 전송진 중앙에 거대 석전이 흔들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공간의 힘에 영향을 받아 바로 거대 붕새를 쫓지 못하는 듯했다.
“파멸법목!”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이 난색을 표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한립이 변한 거대 붕새는 또다시 검은 점으로 변해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당장 추격을 지속하게!”
눈을 치켜뜬 여인의 고함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대인께 아룁니다! 공간의 힘에 영향을 받아 한동안은 흐트러진 법력을 조정해야 합니다.”
천장 위에 거대 얼굴이 송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법력을 조정하기를 기다렸다 움직인다면 저 녀석이 달아난 후가 아니겠는가. 내 도와주지!”
여인이 두 손으로 돌 의자의 손잡이를 쥐고 검은 기운을 불어넣었다.
“감사합니다, 대인!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거대 얼굴의 대답소리와 함께 석전이 하얀빛으로 변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이번 전송으로 한립을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거리는 훨씬 좁혀둔 상태였다.
이후로도 거대 붕새는 묵묵히 달아났고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질 때마다 여인은 석전의 전송 능력을 이용해 따라잡는 일이 반복되었다.
첫 번째 전송 실패에 여인도 일정 거리를 유지했기에 더 이상 파멸법목도 쓸 수 없었다.
한립은 이 같은 상황에 무척 답답했다. 그도 뇌전을 이용해 순간이동이 가능했으나 전송위치가 무작위였다.
근거리로 이동하면 오히려 추격하는 석전 가까이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고, 장거리 이동을 하려면 술법을 펼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궁장 여인은 혈광성조의 화신들보다도 더 떨치고 달아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그들의 추격전은 반나절 넘게 이어졌다. 대륙 끝까지라도 쫓아올 기세로 따라오는 석전을 보고 한립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 석전 안의 궁장 여인은 검은 거울을 발동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원살 수사가 여긴 어쩐 일입니까! 기억대로라면 이번에 강림하는 성조 명단에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성제 후기에 진신(眞身)으로 강림할 자격은 더더욱 갖추지 못했고요.”
거울 속의 마족은 핏빛 장포를 입은 청수한 소년이었다. 떨떠름한 얼굴을 한 소년은 천연성 마족대군을 통솔하는 혈광성조 화신이었다.
“혈광 수사, 전 겨우 화신으로 강림해 육극을 도우려는 것뿐 대군을 통솔하려는 것도 아니고 진신으로 강림할 계획도 없습니다. 이는 당초 협의와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아실 텐데요.”
남색 궁장 여인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런데 육극 수사를 돕는다고 하면서 어째서 제가 관리하는 곳에 나타난 것입니까?”
혈광은 짜증이 났지만 여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억지로 화를 억눌렀다.
“저는 인족 수사 한 명을 쫓고 있는 중입니다. 육극의 부탁을 받아 성족 대군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하는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족 수사를 쫓는 중이라고요? 수사의 석마(石魔) 수하들의 전송 능력으로도 쫓지 못한다면 대승기 수사란 말인데, 성족 대군 전체를 위한 일이라니 제가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겠습니다. 다른 화신들을 파견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여인의 말에 혈광이 의미심장하게 제안했다.
“제가 미덥지 못하셔서 그러십니까? 다른 화신이라니, 화신을 셋이나 더 영계로 강림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성계의 본체가 일을 당할까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게다가 이제 와서 화신을 보내면 도착할 쯤에는 본 좌가 일을 다 마쳤을 텐데요.”
“제 본체에 대해서는 상관 마십시오. 또 다른 화신들이 마침 그곳과 가까이에 있어 반나절이 못되어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독룡 쪽에서 건곤반(乾坤盤)을 빌려오는 길이니 도움이 될 겁니다.”
“건곤반을요? 독룡이 목숨처럼 아끼던 그것을 빌려주었단 말입니까?”
“충분한 대가만 지불하면 빌리지 못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쫓고 있는 인족 수사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수사의 손에서 달아날 정도면 인족에서도 명성이 있는 수사일 텐데 화신들을 보내 전방에 매복해 있으라 하겠습니다.”
“돕는 것은 허락하겠지만 그자는 하계에서 내게 큰 죄를 지은 자입니다. 붙잡은 후의 처리는 전적으로 제가 하지요. 수사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홀로 처리하겠습니다.”
“하계에서 수사에게 죄를 지은 녀석이라고요? 하하하하, 그것참 흥미롭습니다! 원살 수사가 하계로 보낸 분혼(分魂)이 하계 수사에게 살해당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자를 찾아 쫓고 있는 것입니까?”
“이 일로 나를 조롱하겠다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군요.”
여인의 표정이 서늘해지며 연락을 끊으려 들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수사의 요구대로 하지요. 대신 이 일이 끝나면 수사께서도 저를 한 번 도와주셔야 합니다. 또한 즉시 제가 맡은 지역을 떠나야 하고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도와달라는 말씀입니까?”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수사도 저를 도와 인족 수사 한 명을 상대해 주면 됩니다.”
“삼대(三大) 화신을 불러놓고 또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설마 화신의 몸으로 인족 대승기 수사를 노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하, 인족 대승기 수사라……. 그러고 싶으면 수사께서나 그러시지요. 저는 화신들이 아까워서 절대 그런 생각은 안 합니다. 제가 처리할 자는 인족 합체기 존재로 지니고 있는 보물이 많아 어쩌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수사가 도움을 주시면 문제될 것 없겠지만요.”
“합체기 수사라면 알겠습니다. 인근에 있다는 화신들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지요.”
여인의 말에 얼굴이 밝아진 혈포 소년은 손끝으로 거울 표면을 짚어 은색 주술문자를 불어넣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