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7화. 여마두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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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마물 법상이 펑! 하고 흩어지고 요동치는 먹구름 속에서 사나운 얼굴을 한 노인이 내려왔다. 차기공이었다.
한립은 팔짱을 끼고 한쪽에 서서 냉랭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흥, 오늘에서야 견기대법을 대성한 것을 드러내다니 참을성이 대단하십니다. 그보다 혼돈의 기운을 추출하는 다른 방법을 알아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게 사실인지 노부가 어찌 믿습니까? 당초 여럿이 모여 겨우 연구해낸 것을 혼자 해냈다고요?”
차기공은 화난 기색을 지우고 무표정하게 물었다.
“추출법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아주 우연히 알아냈습니다. 제 말이 사실인지는 수사도 조금만 설명을 들으면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 원기를 상해봤자 결국에는 혈광 그놈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 아닙니까.”
“좋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나 보겠습니다. 허나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결과에는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혈광의 이름이 나오자 차기공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가 다시 무표정하게 돌아갔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만일 제가 알려드린 방법으로 혼돈의 기운을 얻는다면 그중 3분의 1은 제 몫입니다. 이 점에는 동의를 하시겠지요?”
“그건 수사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한 후에 다시 이야기할 문제입니다.”
차기공의 냉랭한 말에 풍사가 입술을 꿈틀하고 직접 노인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 * *
어스름한 산맥 위를 검은 빛이 놀라운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기운을 숨긴 검은 빛은 추레한 노인으로 한립, 천선대사와 함께 산 정상에서 헤어진 흑우상인이었다.
전력을 다해 길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전방에 보기 드문 높은 산봉우리 두 개가 그의 앞길을 막았다. 흑우상인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산봉우리 사이의 틈으로 그곳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검은 빛이 막 두 산봉우리 중간을 지날 때 이변이 일어났다.
콰릉!
아무 징조도 없이 두 산봉우리가 흑우상인을 향해 쏟아져 내린 것이다. 산을 이루는 바위 더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흑우상인은 깜짝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고 입에서 은색 종을 분출했다.
댕!
은색 종은 재빨리 거대한 은색 종 허상으로 변해 노인을 보호했다. 동시에 은색 파동이 사방팔방으로 밀려들어 떨어져 내리는 암석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산봉우리 표면에 회백색 기운이 흐르자 무수히 많은 암석이 응결되더니 거대 손이 되었다. 다섯 손가락을 편 거대 손에는 무궁무진한 힘이 실려 있었다.
쾅! 쾅!
손바닥은 파리라도 잡을 것처럼 호되게 거대 종 허상을 내리쳤다. 그러자 강력한 보물인 거대 종은 애달프게 윙윙거리더니 붕괴되어 사라졌다.
흑우상인의 얼굴에 드디어 당황한 기색이 떠오르고 소매 속에서 은색 뇌전 실로 이뤄진 실그물을 내보냈다. 혼돈만령방에 이름이 올라있는 은소뇌망이었다.
실그물의 현묘한 신통이면 거대 손들을 상대하고도 남았기에 흑우상인은 한시름을 놓았다. 그는 주문을 외며 또 다른 보물들을 불러내 반격하려 했다.
그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공간파동과 함께 하얗고 고운 손이 나타나 펼쳐지고 있는 뇌전 실그물을 잡아챈 것이다.
순간 흑우상인은 혼백이 찢기는 극통을 느끼고 은소뇌망과 의식 연계가 끊겼다. 화들짝 놀란 노인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 순간 양쪽에서 두 개의 돌 거대 손이 날아들었다. 흑우상인이 서둘러 법력을 끌어올려 녹색 갑옷을 불러내 방어했지만 돌 거대 손의 힘은 막강했다.
꽈앙!
거대 손 사이에 끼어버린 노인은 보호막과 녹색 갑옷이 모두 부서져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쉭!
핏물 속에서 검은 빛이 날아올라 하늘을 갈랐다. 그때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은색 뇌전 그물을 쥔 손이 검은 빛이 사라진 방향으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휘익!
은빛 덩이가 튕겨나가 허공에 스며들었다. 얼마 안 가 펑! 하고 저 멀리서 검은빛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검은빛 속의 보라색 원영은 흑우상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에는 놀람과 분노가 가득했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는지.”
여인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허공의 하얀 고운 손이 들고 있던 뇌전 그물을 회수하고 고풍스러운 검은 거울을 꺼내 원영이 달아나는 방향을 비추었다. 그러자 빛기둥이 쏘아져 나가 원영을 가두었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원영은 거대한 힘에 뒤쪽으로 끌려갔다.
‘안 돼!’
흑우상인의 원영은 혼비백산해 삼각 영패를 뱉어내 정혈을 몇 번이나 흡수시켰다. 흑우상인이 마지막 방법으로 선택한 영패는 매우 구하기 어려운 보물이었다.
삼각 영패가 맑게 울며 푸른 기운으로 변해 원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푸른빛을 머금은 원영이 우뚝 멈춰서 더 이상 끌려가지 않고 앞쪽으로 튀어나갔다.
“인족의 청명령(靑冥令)? 실력발휘를 좀 해야겠는데. 손을 쓰지 않으면 저 녀석이 달아나 버릴 수도 있겠어.”
여인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공간파동이 일고 남색 궁장 차림의 여인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은 백옥처럼 하얗고 아름다웠으나 푸른빛이 어른거리는 눈빛에서 위엄이 느껴졌다.
여인은 원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기이한 수결을 맺었다.
파앗!
그녀의 등 뒤로 삼두육비의 새까만 마물 허상이 떠올라 검은 갑옷을 걸친 흉악한 마물로 변했다.
갑옷에는 복잡한 주술과 진법이 새겨져 있었고, 세 개의 머리에는 검은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세 머리가 길게 포효하자 눈에서 화염이 일고 여섯 개의 손이 재빨리 움직였다.
콰르르르!
괴이하게도 손이 닿는 곳마다 폭발이 일어나고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나 터져나갔다. 소용돌이 속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주술문자들이 검은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멀리서 달아나고 있던 흑우상인의 원영은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졌다. 원영의 머리 위로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나더니 마염(魔炎)에 뒤덮인 검은 발톱이 쑥 빠져나왔다.
원영은 비명만을 남기고 검은 발톱에 붙들려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소용돌이가 소리 없이 소실 된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잠시 후 궁장 여인 앞에 있던 소용돌이 속에서 흑우상인의 원영이 빠져나왔다. 원영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검은 실에 둘둘 말려 포획당해 있었다.
여인은 무표정하게 원영을 살피다 바닥의 무언가를 끌어왔다. 희미한 노란빛을 머금은 저물탁이었다. 여인은 손끝을 저물탁에 가져가 눈을 감았다.
“황량석령? 이 자는 이것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었구나. 육극이 내게 직접 다녀와 달라 부탁한 이유가 있었어. 인족이 정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다면 대비를 해야겠지!”
잠시 후 여인이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무슨 일을 꾸미는지 확실히 알려면 원영을 조사해야 할 텐데, 인족 고계 수사들은 자신의 의식을 봉쇄해 두기에 성가시단 말이야. 마공으로 강제로 비술을 깨도 극히 일부 밖에는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침음하던 여인이 결정을 내렸는지 손을 저었다. 등 뒤의 삼두육비 마물과 검은 소용돌이가 동시에 없어져 허공에 흑우상인의 원영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인은 고대 거울을 다시 불러내 원영을 비추었다.
파앗.
거울에서 흘러나온 은빛에 휩싸이자 원영이 괴이하게 사라졌다.
“가세! 한적한 곳을 찾아 이 인족 수사의 원영을 심문해야겠네. 분신의 몸인 나로서는 며칠이 걸리겠지.”
궁장 여인은 거울을 회수하고 마치 누군가에게 분부를 내리듯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원살대인!”
우렁찬 목소리가 절반쯤 무너져 내린 두 개의 봉우리에서 울렸다. 이어 암석 잔해들이 꿈틀거리자 온몸이 회색 바위로 팔이 네 개 달린 거인들이 나타났다.
“두 장로가 이 자의 육신을 부셔준 덕에 쉽게 원영을 잡을 수 있었네.”
궁장 여인은 거대 석인(石人)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닙니다. 원살대인께서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희의 영광입니다.”
석인 중 하나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석인을 향해 하얀 기운을 날려 보냈다.
쿠쿵.
술법이 풀려 작아진 석인들은 회백색 돌덩이로 변해 그녀의 소매 속으로 날아들었다. 그제야 여인은 허공을 박차 올라 어딘가로 날아갔다.
* * *
같은 시각 구덩이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립이 눈을 떴다. 진마쇄에서 의식 화신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들이 원신의 몸으로 격전을 펼치려던 것을 보면 혼돈의 기운이 무척 중요한 게 틀림없구나. 혼돈의 기운을 얻자마자 진마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미완성이긴 해도 현천의 보물인데 혼돈의 기운이 대단해도 설마 그럴 리가. 저들도 다른 꿍꿍이가 있을 테지만 심마에 맹세를 했으니 내 쪽에서 먼저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한립이 문뜩 서늘하게 웃었다.
“하하, 혼돈의 기운을 두 마두에게 나눠주고 바로 진마쇄를 마계에 던져두면 될 일 아닌가! 어차피 마계에 다녀올 일이 있으니 그 김에 진마쇄도 처리를 하고 말이야. 육신도 없는 원신들이니 일단 마겁이 끝나면 다시 영계로 넘어 오기는 힘들겠지. 마계에서 마두들끼리 무슨 짓을 벌이든 그 후의 일은 내 알 바가 아니고.”
한립은 마음을 정하고 하얀 목함을 가리켰다.
휙!
목함이 날아가며 구덩이 중간에 떠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립이 수결을 맺자 등 뒤로 삼두육비의 법상이 떠올랐고 여섯 개의 손이 다시 한번 수결을 맺자 금빛이 솟아올라 목함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목함은 점차 금빛으로 차올라 반짝였다. 이때 푸른 기운이 드리운 한립의 본체가 은색 화염을 뿜어 목함을 휘감았다.
동시에 한립의 금색 법상이 눈을 번쩍 뜨고 성큼 뛰어올라 두 손으로 목함을 감싸고 천천히 구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함이 들고 있던 금색 법상이 누런 안개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스스슷!
한립이 주문을 멈추고 수결을 유지하며 몸에서 알 수 없는 음기를 발산했다. 그가 가부좌를 튼 땅을 중심으로 노란 얼음층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점차 푸른 기운이 사라지고 전신이 노란 기운으로 뒤덮이더니 온몸에 노란 서리가 내려앉았다.
거대 구덩이 아래쪽으로 안개가 부글부글 요동쳤고 그 속에서 이상한 폭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한립은 주변의 노란 한기와 황천지화 속의 굉음에 연연해하지 않고 비술을 발동하는 데만 집중했다.
이레 후, 한립은 여전히 구덩이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합체 중기의 막대한 법력과 동급 수사를 초월하는 의식과 육신을 지니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꽤 많은 법력을 허비한 그는 상당히 지쳐있었다. 구덩이 속의 폭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노란 기운도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비술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콰릉!
돌연 구덩이 밑에서 금빛이 뿜어져 나와 아름다운 광경을 이루었다.
“됐다!”
한립이 눈을 번쩍 뜨더니 흥분해 소리쳤다. 이 혼돈의 기운이 있으면 단시간 내로 합체 후기에 이를 수 있었고 수행이 늘어나면 자연히 마겁과 마계 원정에서도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수결을 맺고 온몸에서 오색화염을 분출했다. 빛이 닿는 곳마다 노란 서리가 녹아내려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누런 안개 속에서 삼두육비의 금색 법상이 서서히 떠올랐다. 목함을 들고 있는 법상의 모호한 형체 속에 푸른 빛덩이가 보였다.
푸른 빛덩이 속에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빛의 점이 둥실 떠 있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어딘가를 쳐다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꽝!
고공에서 굉음이 터지고 정체모를 힘이 그가 펼쳐둔 금제를 공격했다. 괴력이 만들어낸 돌풍이 금제로 이루어진 하얀 안개를 가볍게 흩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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